2001년 4월 10일 대우자동차 조합원들에 대한 공권력의 살인적인 폭력이 인터넷을 통해 고발되었다. 디지털 카메라로 당시 장면이 생생하게 녹화되어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재된 것이다. 손쓸사이 없이 퍼져나간 동영상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제도 언론이 모두 빠져나간 현장을 지키고 있다가 이 폭력 사태를 고발한 것은 참세상 방송국을 비롯한 <2001 대우차 총파업 투쟁 영상중계단>(http://dwtubon.nodong.net)이었다. 이 사건은 독립적인 영상운동과 인터넷의 결합이 제도 언론이 독점하고 왜곡해온 미디어 질서에 얼마나 위협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진보네트워크센터는 설립 초기부터 웹호스팅 서비스와 메일링리스트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진보네트워크의 웹호스팅 서비스는 주로 시민사회단체, 노동조합, 이슈 홈페이지 등에 제공되었다. 일반적인 영리기업에게는 제공하지 않았다. 각 단체의 홈페이지 공간을 제공하고 서버 관리를 해주는 웹호스팅 서비스는 서비스 도입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 더 저렴한 상업적 웹호스팅 서비스가 존재했지만, 시민사회단체나 노동조합이 진보네트워크 웹호스팅을 이용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홈페이지 운영상의 문제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노동조합에서 파업이나 선거 등 중요한 일정이 있을 때 서버 부하가 급증하게 되는데, 진보네트워크는 노동조합과의 소통을 통해 홈페이지가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도왔다. 파업 시기에는 며칠동안 노동조합의 홈페이지를 모니터링하며 밤을 새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진보네트워크는 서버 로그기록에 IP주소를 남기지 않으며,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게시물 삭제 요청이나 수사기관의 개인정보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는 특히 보안을 요구하는 사회운동 단체들이 진보네트워크를 이용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진보네트워크는 이러한 통신환경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었다. 초기 진보네트워크 서비스는 PC통신 중심이었으며, 99년까지 각 사회단체들이 진보네트워크의 PC통신 서비스인 ‘참세상 BBS’에 CUG를 개설하도록 조직화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에 따라 참세상의 이용자도 증가하였으나, 다음(Daum)과 같은 무료 웹커뮤니티 서비스가 확산되면서, 99년 후반기부터는 다시 이용자가 정체하기 시작하였다.1999년 중반에 ‘열린네트워크 프로젝트(Open Network Project)’를 기획하여, 지역 통신망이나 상업 통신망에서 014XY 망을 통해 진보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를 확대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한계가 있었으며, PC통신에서 인터넷 기반으로의 환경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진보네트워크센터가 설립된 1998년의 네트워크 환경은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등 상용 PC통신 서비스가 지배적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전화선을 이용한 인터넷 접속(PPP 서비스) 서비스가 상용화되었지만 당시에는 소수의 단체만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과 2~3년 만에 초고속통신망이 각 가정에 보급되면서 인터넷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고, 다음(Daum), 프리챌 등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웹커뮤니티가 PC통신 서비스를 대체하였다. 단체들의 홈페이지 제작과 활용이 급속하게 증가하였고 커뮤니티 형태로 조직된 이슈 그룹이 늘었다. 인터넷 대역폭의 확대와 함께 음성, 동영상 등 멀티미디어의 활용도 증가하였다.
진보네트워크센터 설립을 전후하여, 각 지역에서도 전문 정보통신운동 단체들이 나타났다. 90년대 초반부터 <녹두 BBS>를 운영하며 지역 단체 정보화를 위한 지원활동을 한 전주의 <정보통신연대 INP>(http://www.inp.or.kr)를 비롯하여, <부산정보연대 PIN>, <울산노동자정보통신지원단(LISO)>(http://www.liso.net), 전주 <정보공동체실현시민모임>, 광주 <참@네트워크>, <진주시민정보네트워크> 등이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정보통신 서비스 제공, 정보통신 교육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네트워크는 1998년 7월 24일 1차 <학생네트워크 추진협의회 준비모임>을 갖고 학생네트워크 건설의 의의에 대해 합의하고, 설명회 개최 등 학생네트워크 추진사업에 들어갔다. 같은 해 8월 20일, 학생네트워크 BBS 시범서비스를 시작하였으며, 8차례의 준비모임을 거쳐 1998년 9월 17일 <학생네트워크 추진협의회> 발족식을 가졌다. 당시 참가단체는 진보네트워크센터 추진위원회를 비롯하여,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전국대학방송국연합, 21세기학생연합, 전국대학영자지기자연합, 전국학생연대, 서울대전기공학부통신단, 서울대‧연세대‧서강대‧이화여대‧숙명여대‧강남대총학생회 등이었다. 학생네트워크 역시 PC통신 참세상에 학생네트워크 BBS를 개설하고, 인터넷 홈페이지(http://stunet.jinbo.net) 운영을 통해 학생운동 자료를 공유하고, 학생회 선거 등 학내 주요 사안을 이슈화시키기 위한 사업을 전개하였다.
’97 서울국제노동미디어 직후, 1998년 2월 <서울국제노동미디어 조직위원회>는 <노동미디어협의회>로 전환하였으며, 3월에는 노동네트워크의 구상과 기획을 위하여 노동미디어협의회 산하에 <노동네트워크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회에서 노동네트워크 건설 추진에 대한 초벌 기획안을 작성하고 검토하였다. 1998년 3월에는 노동계 총파업에 대비하여 labor 메일링리스트(labor@mail.sing-kr.org)가 개설되었다. 1998년 4월, 노동미디어협의회와 독립적인 <노동네트워크 추진협의회 준비모임>을 구성하였으며, 양대 노총도 여기에 참가하였다. 1998년 7월 10일 양대 노총과 노동단체, 연구소 등 13개 단체가 참여한 <한국노동네트워크 추진협의회>가 발족하였으며, 노동네트워크 설립 종합계획과 PC통신 사업계획, 인터넷 사업계획 등을 확정하였다. 같은 해 8월 20일 노동네트워크 시범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진보네트워크센터 설립 당시, 여러 노동, 사회단체들은 상업 PC통신망에 CUG를 개설하거나 정보제공(IP)을 하고 있었고, 일부 단체들은 인터넷 홈페이지도 갖고 있었다. 이들 모두가 네트워크를 활용하고자 하는 사회운동의 성과물들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상업통신망에 분산되어 있었고 PC통신 서비스와 홈페이지가 따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찾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에 따라 진보네트워크센터는 설립 초기부터 기존의 사회운동의 정보화의 성과를 모아 노동(LaborNet), 환경(EcoNet), 여성(WomenNet), 학생(YouthNet), 인권(Human Rights), 보건의료(Health), 문화(CultureNet) 등 각 부문별 네트워크 연합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는 진보통신연합(APC)의 미국 회원 네트워크인 IGC가 PeaceNet(평화), EcoNet(환경), ConflictNet(사회갈등), LaborNet(노동), WomensNet(여성) 등 5개의 하위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던 것에 착안한 것이기도 하다.
진보네트워크센터는 발족 직후 1998년 11월 15일 정식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초기 진보네트워크센터는 사회운동에 대한 네트워크 서비스를 주요 활동으로 삼았다. 초기 진보네트워크 서비스는 기존 참세상 BBS 커뮤니티의 기반 위에서 시작하였으며, 인터넷 서비스는 정보연대 SING에서 제공하던 사회운동 디렉토리와 웹호스팅, 그리고 메일링리스트 서비스를 이전받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