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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시선, 관대함이 없는 감옥

By 2010/06/10 10월 25th, 2016 No Comments
김승욱

작년에 미국에서 한 한국계 미국인에 의해 발생한 끔찍한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다. 사건 직 후 한국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한국[인]을 바라보는 생각이 안 좋아질까봐 당황스러워 했었고, 주미대사는 사과의 의미에서 금식을 제안하기까지 했었다. 곧이어 언론은 그가 사실상 미국사회에 의해 길러졌다며 미국 내 한인사회와 한국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개인적 원인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회적 원인만큼은 미국에 있으므로, 한국사회 혹은 미국 내 한인사회의 책임은 없다는 이 논리는 범죄에 사회적 원인과 개인적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즉, 외부의 원인과 개인의 자유가 존재한다.

자유와 책임

우리는 자유가 가능할 때, 즉 누군가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을 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윤리의 문제를 얘기할 수 있고, 행위에 대한 책임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외부의 원인을 따른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자유의지에 따라 시작된 것일까. 예를 들면, 범죄의 원인분석에 있어서 개인적 원인과 사회적 원인의 경계는 늘 모호하다. 둘은 강하게 섞여있다. 모든 원인이 사회적인 것이라면 개인에 대한 처벌은 불가능하다. 반면에 개인의 책임만을 추궁한다면, 처벌은 공허하다. 사회는 또 다른 범죄 행위자를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원인을 괄호에 넣을 때 개인의 책임을 물을 수 있고, 개인의 자유의지를 괄호에 넣을 때 사회적 원인을 볼 수 있게 된다. 근데 자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자유란 자기원인적인 것이다. 원인이 밖에서 오지 않고 내재되어 있는 것이 자유다. 그러나 자유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자유에는 능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고 치자. 그것이 정말 내적 자아로부터 오는 욕망일까? 그것은 타자의 욕망일 뿐이다. 아이들이 장난감 ─예를 들어 다마고찌─ 을 갖고 싶어하는 이유는, 스스로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욕망이 자유일 리 없다. 다른 욕망들도 마찬가지이다. 모두들 "소비의 사회"에서 광고가 시키는대로 필요 이상의 물건들을 소비하고 소유하며 살아간다. 아마 광고가 없다고 해도,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 내면의 법칙이 명령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자유에는 진정 능력이 필요하고 그것은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책임있는 개인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유를 발견하고 행하게 하는 끊임없는 연습이다. 자유연습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는 것, 내면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 내적 자아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것이다. 자유연습은 동시에 책임연습이다. 자유를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책임의식을 가질 수 있다. 거꾸로 자유가 박탈된 자에게서 책임의식을 찾을 수는 없다.

범죄가 발생하면 우리는 그 행위자의 자유를 박탈한다. 동시에 교정을 시도한다. 법정에서는 그가 저지른 범죄의 교환가치와 그의 교정이 이루어질 충분한 시간을 염두해서 그가 살아야 할 징역의 양을 정한다. 감옥의 목적은 형벌로서의 자유의 박탈과 다시 사회에 적합한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교정에 있다. 그러나 자유를 박탈하는 것과 그를 사회를 다시 살아갈 책임있는 개인으로 길러내는 것 사이에는 심각한 모순이 있다. 책임은 자유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수인은 자유를 연습하는 대신에, 완벽한 통제를 연습한다. 철저한 시간표, 말하는 방법, 해야할 일, 하지말아야 할 일 따위가 주어지고,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인은 한 번도 자유를 그러므로 책임을, 연습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자유를 박탈하면서 그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다. 범죄자로 검거되는 사람들 중 40%는 감옥에서 온 사람들이다. 최초의 목적에 비추어 봤을 때, 감옥은 실패했다. 감옥은 범죄 행위자를 재생산하는 공간이다.

감옥과 CCTV

쓰레기통 CCTV

쓰레기통 CCTV

감옥 밖에서도 비슷한 모순이 강화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CCTV인데, 한국에서는 인구 20명당 1대의 CCTV가 설치되어 있다. 최근에는 아동에 대한 성폭력 등 강력범죄가 사회적 이슈가 되자, 정부[경찰]는 발 빠르게 CCTV 설치의 확대를 대책으로 들고 나왔다. 경찰청은 공원과 놀이터에 CCTV를 설치하겠다고 했고, 교육과학기술부는 2010년까지 전국 초중고교의 70%에 CCTV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CCTV는 타자의 시선이고, 강제로서 기능한다. "여기에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 타자[기계]의 눈이 당신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으니, 법에 어긋나는 행위는 하지 마시오."라고 그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길거리 쓰레기통의 입구에 CCTV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CCTV는 사람들이 쓰레기를 통 안으로 제대로 버리지 않은 상태로 자리를 뜨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전국 학교의 70%에 CCTV를 설치하는 것은 학교에서의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다. 성폭력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에 타자의 시선을 도입[강제]함으로써, 개인의 선택을 바꾸고자 하는 욕망이다. CCTV는 행위 이전의 모든 사회적 원인과 개인의지 등을 고려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성폭력을 저지를 것이라고 치자. 왜 그렇게 됐을까? 그의 가정환경은 어떠할까? 그의 아버지는 가부장적일까? 그는 어떤 교육을 받아 왔을까? 그가 보고 듣는 미디어는 어떤 내용들일까? 여성과 남성의 하는 일이 고정[차별]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광고와 드라마만을 보며 자라지는 않았을까? 성적 욕망만을 환타지처럼 주입받지는 않았을까? 여성을 먹을 것에 비유하는 라디오 방송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가 속한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어떤 예술가가 "이 갤러리에서 창녀를 찾아내시면 돈을 드립니다"라고 퍼포먼스를 할 수 있는 사회는 아니었을까? 성희롱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국회의원으로 재선될 수 있는 사회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결국, 개인의 선택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어쨌든, 이 모든 원인을 다 따지면 복잡하니까 잠시 접어두고, 그가 결정해야 될 순간에 타자의 시선을 도입해서 다른 선택을 잠시 강제하는 것이 바로 CCTV다.

CCTV는 감옥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유의 연습을 방조하는 대신에, 내면의 법칙을 따를 수 있을만큼 성숙한 자아를 길러낼 가능성을 만드는 대신에, 자유를 박탈한다. 그리하여 감옥이 실패했던 것처럼 우리는 똑같은 실패를 예상할 수 있다. 행위자를 대상화하고, 하나의 강력한 원인만을 임시처방하는 것은 또 다시 감옥을 불러낸다. 학교에서, CCTV와 함께 자라난 학생은 어떤 사람이 될까? 바꿔 말하면, 자유를 연습하는 대신에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연습을 하며 자란 학생은 어떤 사람이 될까? 이것은 단순히 악취 위에 향수를 뿌리는 처방이 아니다. 그것은 악취의 근원을 또 다른 오물로 뒤덮는 실험이다.

재생산의 끊임없는 악순환은 이미 시작되었고, 확대되고 있다. 그리하여 감옥이 부족해지자 사회 전체를 감옥화되고 있다. CCTV가 감옥을 능가하는 점이 있다면, 기록된 영상을 끊임없이 미디어에 노출시킴으로써, 국민적 관음증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범죄 행위자의 확대재생산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불평등한 시선의 교환으로 인한 감시의 내면화는 임시처방을 영구적인 것으로 만든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어"라는 잠재의식이면 자유[연습]을 박탈하기에 충분하다. 우리 사회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푸코는 감옥이 다소간 엄격한 병영, 관대함이 없는 학교, 암담한 일터와 같으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그것들과 어떤 질적 차이도 없다고 했다. 무제한적 CCTV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푸코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뒤집어야 할지도 모른다: "학교, 공원, 놀이터, 그리고 사회 전체는 다소간 엄격하고, 관대함이 없고, 암담한 감옥과 같으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그것과 어떤 질적 차이도 없다"고.

 

2008-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