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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적 감시체계에 대한 철학적 고찰

By 2004/06/01 10월 25th, 2016 No Comments

PC통신 이야기

신승철

우리의 일거수 일두족을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다는 통제사회는 이제 우리의 현실이다. 푸코는 벤담의 판옵티콘 모델을 사례로 들면서 원형감옥 중앙에 감시망루가 안에서는 보이지만 밖에서는 볼 수 없어서 수감자들은 늘 감시 받고 있다는 통제를 내면화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일은 감옥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이러한 통제의 내면화는 자신이 ‘범법자인가? 아니면 준법자인가?’ 라는 ‘이중결박’에 상태에 처하게 만든다. 그것은 대중에게 유리처럼 투명하고 텅 빈 신체에서 준법서약 상태로 존재하며, ‘자신이 감시 받고 있다’는 것을 절규하는 정신분열증환자가 되기 전까지는 결박을 풀지 않겠다는 권력의 족쇄인 것이다.

권력에게는 시선이라는 것이 특별하다. 눈이라는 기관은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감시자와 피감시자’, ‘주관과 객관’을 나누고 이원론을 작동시키는 이중분절의 기관이기 때문이다. 눈은 대상을 화석화시키고 얼음으로 결정시켜 대상을 포착해내는 카메라기관이다. 거기에는 유동하고 횡단하는 노마드적 흐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의 ‘관조적 유물론’을 비판하면서, 실지로는 관조적인 인식론적 주체를 설정하는 이원론의 노선들 – 여기에는 카우츠키, 레닌의 의식의 외부도입테제도 포함된다 – 을 비판한다. 눈은 플라톤으로부터, 데카르트를 거쳐, 레닌까지 이어지는 ‘서구의 초월철학의 이원론의 모태’가 되었던 기관이다.

훈육사회의 거친 규율과 처벌의 논리들은 대중적인 저항에 의해 해체되었지만, 그 대신 통제사회가 우리에게 새로운 권력의 모델로 나타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잠재적으로 범죄자, 테러리스트로 규정되며 감시된다. 통제사회는 권력의 시선 하에서 자율성이 보장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활력 없이 텅 빈 신체’의 거짓-자율에 불과하다. 통제사회는 우리의 내재적인 자율성을 초월적 권력의 시선 아래로 복속시키고 억압하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할 권력모델이다. 무엇보다도 다중은 통제하에서 순종하기 보다 그것을 넘어선 ‘자율과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권력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생성되지만, 선거라는 권력위임절차가 끝나면 다중의 민주주의의 위에 올라서려 한다. 그 권력자들은 국가이성만이 초월적 권력의 원리만이, 권력의 시선만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군사독재가 광주가 범죄와 파괴로 얼룩져 있다고 선전할 때, 광주는 비로소 범죄에서 해방된 다중의 내재적인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오히려 군사독재자들이야말로 진정한 범죄자들이었다. 권력은 바로 역전된 논리를 만들어 낸다. 마치 감옥이 범죄자를 양산하고, 정신병원이 정신병자를 양산하듯이 말이다.

다중의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초월적 권력이 만들어내려는 ‘유리처럼 텅 빈 신체’는 정체성으로 포획해내는 ‘전체주의적 장치’이다. 그것은 다중을 정체성으로 포획시켜 혹은 전 인민이 간부로 만들어 상호-감시하는 사회로 만들려는 국가주의적 발상이다. 그러나 다중의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는 일관되게 이러한 감시와 처벌의 사회, 통제사회를 넘어선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감시자의 시선에도 포획되지 않는 은밀한 소통의 방식이 대중에게 있다. 그것은 삶이라는 벌거벗은 신체 자체로, 피부로, 가슴으로 느끼는 소통의 방식이며, 연결접속의 방식이다. 다시 말해 ‘기관 없는 신체’가 만들어 내는 ‘되기’의 과정과 ‘일관성의 구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권력의 시선’을 넘어선 다중의 아래로부터의 일관된 민주주의와 활력의 연결접속에 주목하자!

 

 

2004-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