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

헌재가 말했다 “인터넷 실명제는 위헌이다”

By 2012/08/31 No Comments

 지난 8월 23일 헌법재판소는 ‘인터넷 본인확인제’(실명제)가 위헌이라고 결정하였다. 선고가 나던 순간 여러 사람이 생각났다. 2007년 차별금지법 논란이 한창일 때, 게시판에 의견을 달면 자신의 이름, 나아가 성정체성이나 국적이 알려질까봐 망설이던 소수자들. 입시 정책을 비판하는 게시판을 운영하면, 만19세 미만의 선거운동을 금지한 선거법 하에서 청소년 글쓴이들의 나이가 밝혀질까봐 고민하던 청소년 인권 활동가들. 

주민번호가 확인된 국민에게만 글 쓸 권한을 주겠다는 정부의 발상이 2003년 처음 발표되었을 때에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해프닝으로 그칠 줄 알았다. 그러나 이른바 ‘개똥녀’ 사건을 비롯해 인터넷에서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인터넷 탓’이 늘어갔고, 뭐라도 해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조급증은 결국 이 어이 없는 정책이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 실현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헌재의 이번 결정에서 가장 주목할 대목은 ‘익명 표현의 자유’가 국민의 기본권이라는 선언이다. 인터넷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흔히 “익명성이 문제”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현대 대중사회는 이미 오프라인부터가 익명 사회이다. 익명은 때로 ‘묻지마 살인’도 불러 온다. 그러나 익명이 문제라고 하여 길거리의 모든 이들의 가슴에 노란 이름표를 달게 하지 않는 것이 근대 인권의 정신인 것처럼, 인터넷이라는 미디어가 어떤 문제적 사회 현상을 나타낸다고 하여 민증을 까도록 강제하는 것은 국가의 폭력이다. 헌재는 인터넷 익명 표현에 대하여 “현실 공간에서의 경제력이나 권력에 의한 위계구조를 극복하여 계층, 지위, 나이, 성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여론을 형성함으로써 다양한 계층의 국민 의사를 평등하게 반영하여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되게 한다”고 보았다. 더불어 “비록 인터넷 공간에서의 익명표현이 부작용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헌법적 가치에 비추어 강하게 보호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실 헌재는 그간 공직선거법상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헌법소송을 계속 물리쳐 왔다. 그러나 실명제 사이트에서 3,500만 명에 달하는 주민번호가 인터넷에 유출되는 사태에 이르러서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계속되는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의 원인이, 개인정보의 수집과 사용을 강제하는 실명제에 있다는 지적이 잇따랐던 것이다.
 
더구나 실명제를 실시하고 몇 년이 흘러도 이 제도는 전혀 제 역할을 못했다. 헌재가 인정했다시피 실명제 실시 이후에도 명예훼손, 모욕, 비방 정보가 전혀 줄지 않은 것이다. 타블로 명예훼손 사건은 실명제가 적용된 네이버 게시판에서 벌어졌으며, 운영자는 다른 사람의 주민번호를 도용하고 숨어 버렸다. 실명제가 악플을 줄이기는 커녕 주민번호 도용을 부추긴 것이다.
 
그런데도 인터넷 실명제가 질긴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경찰과 국가정보원이 이 제도의 폐지를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인터넷으로 촛불시위가 크게 조직된 이후 경찰은 영장 없이 네티즌들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알아내는 편리함에 푹 빠져 있었다. 결국 인터넷 실명제의 주요 목적은 악플 방지가 아니라 네티즌 추적에 있었던 것이며, 이 제도의 주 수혜자는 악플로 고통받는 피해자가 아니라 경찰이었던 것이다. 헌재도 “본인확인제는 … 모든 게시판 이용자의 본인확인정보를 수집하여 장기간 보관하도록 함으로써 개인정보가 유출될 위험에 놓이게 하고 다른 목적에 활용될 수 있도록 하며, 수사편의 등에 치우쳐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와 같이 취급”한다고 지적하였다.
 
헌재의 결정 이후 몇몇 언론은 악플이 넘쳐날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인터넷은 실명제 하에서도 늘 논란의 미디어였다. 학생들의 자살이 계속될 때, 자살 사이트를 탓하는 것은 쉽다. 어떤 사회 문제가 있을 때 미디어는 쉽고 저렴한 표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명/익명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인터넷은 우리 사회와 꼭 같을 뿐이다. 악플이 늘어나는 현상의 이면에는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한 토론 부족과 인권경시적인 문화가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현상보다 본질에 있다. 그리고 싸우는 이들에 있다. 모두가 인터넷이 문제라고 말할 때, 인터넷과 인권의 가치를 믿어 왔던 시민들이 있었다. 이들의 싸움으로 얻어낸 익명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즐기자. 그래서 드러나는 인터넷의 문제가 있다면 또한 이들의 지혜와 힘으로 함께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 <연세춘추> 2012년 9월 3일자에 기고한 글입니다
*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2012-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