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 액트온행정심의

심의, 규제 패러다임에서 협력 패러다임으로

By 2012/01/18 No Comments
원용진

꼰대’ 심의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연일 뉴스의 중심에 선다. 특정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겨냥한 심의와 결정, SNS와 앱을 이용한 소통에 대한 심의 및 차단 계획, 과도한 심의에 반대하는 심의위원에 대한 경고 징계 등. 공적 기금을 활용하는 국가 기구가 언론과 시민의 소통에 관여한다 하여 위헌시비를 불러일으키던 위원회였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위헌 시비를 벗어나 사회 내 소통 질서를 뒤흔들며 정치권력의 ‘홍위대’ 역할을 해내고 있다. 새로운 미디어가 대부분 웹과 통신으로 재매개(re-mediation)되면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활약이 전방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사회 내 여러 형태의 효과들과 결합해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는 사회적 영향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미디어에 대해서는 엘리트들은 대체로 음울한 예상을 한다. 자신들이 제시하는 사회의 방향을 대중이 배신한다며 자주 실망한다. 대중이 엘리트의 말을 따르기 보다는 어리석은 대중적 여론이나 인기에 영합하려는 미디어를 더 추구한다며 안타까워한다. 미디어 연구자는 이를 두고 ‘제 3자 효과 (the third person effect)’라 이름을 붙였다. 미디어에서 내놓는 내용을‘자신 말고 제 3자들’이 잘 따른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디어 담론은 늘 대중을 우려하는 엘리트 목소리로 채워진다. 대중매체의 시대를 지난 지금에도 그 같은 효과에 입각한 담론은 여전하다. 트위터 등의 SNS가 정치적 유언비어를 만들어내고 대중을 현혹한다는 믿음이 의외로 광범위하고 견고한 것도 그런 탓이다.

심의를 맡고 있는 기구들에 대해 ‘꼰대’ 심의라는 지적을 갖다 붙인다. 심의를 맡은 자들이 사회의 변화나 미디어의 변화를 전혀 따라잡지 못한 채 개인적 입장에서 심의를 행한다는 지적이며 비판이다. 터무니없는 지적은 아니다. 가끔 공개되는 회의록이나 징계 사유문을 확인해보면 최근의 경향에서 터무니없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 일은 다반사다. 개인의 문화적 취향을 투사시키거나 연령대와 부합하는 윤리잣대로 재단하는 일도 많다는 느낌이다. 그 같은 비 전문성에다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주문까지 챙겨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 심의 기구들은 사회적 조롱거리로까지 전락해 있다. 대중의 취향이나 선택을 믿지 못하는 의구심에 정치적 비 자율성까지 드러내고 있으니 심의기구가 면을 세우지도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SNS에 관여하겠다는 발표 이후엔 시민들에 의해 희화화 대상으로까지 전락하고 있다.
‘꼰대’ 심의든, 희화화되든 간에 심의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 표명에는 일정 사회적 영향력이 뒤 따른다. 이른바 ‘겁주기 효과(chilling effect)’가 그것이다. 심의를 하고, 계정을 삭제하거나 권고를 하는 일이 뒤 따를 것을 알면 제작자, 사용자는 당연히 몸을 사린다. 불만스럽지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를 할 밖에 도리가 없다. 이메일 계정을 뒤지는 일이 생기자 ‘사이버 망명’이 일어나 외국 검색회사의 계정을 갖는 일이 늘어난 경험이 있지 않던가? 자신의 글이나 프로그램이 심의 대상으로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면 미리 알아서 차단하는 자기 검열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궁극적으로 온 사회의 말하기 방식, 내용, 빈도가 모두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에 사회를 경색시키는   ‘공안적 행위’를 해낸다는 지적은 괜한 말이 아니다. ‘꼰대’라는 희화화 뒤에는 몹쓸 비생산성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공명효과(resonance effect)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중심으로 공권력에 의한 심의의 폐해를 말했지만 이는 한 특별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 이후엔 심의의 폐해가 다방면에서 만연하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뿐 아니라 언론사 자체 심의, 기타 행정부에 의한 타율 심의 모두 입을 막는데 몰두하고 있다. 그로 인해 소통이 경색되고 표현의 자유가 위축된다는 불만이 팽배해있다. 이는 공적인 소통을 정부나 정권의 홍보 수단으로 사고하는 경직된 관료주의적 발상 탓이다. 시민사회 내 언론 조차도 정부나 정권의 ‘선의’를 전달하는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소명을 강조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다. 정부 기구는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며 자신들의 윤리 잣대에 맞춘 표현, 소통을 강조한다. 대중의 욕망이나 소통방식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부터는 이른바 정권 효과까지 보태져 표현물에 대한 심의 등이 강화되고 간섭 혹은 정치적 관여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들어서 사회 내 여러 소통 기구들은 비슷한 행태를 같이 드러내는 공명효과(resonance)를 연출했다. 여성가족부는 청소년을 보호한다며 게임 시간을 제한하고, 가요에 따르는 내용을 규제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방송통신위원회는 정치적 관여의 핵이 되고 있다. 각 언론사는 게이트 키퍼와 관련된 인사조처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표현을 제한하고 있다. 자율적이어야 할 각종 문화예술 기구에 인사잡음이 끊이지 않고 관료적 인사 파동이 일고 있음도 같은 맥락이다. 방송사에서도 전에 없이 출연자들의 의상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영화계에서도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 특정 작품에 지원을 거부해 망신을 자초한 일도 있다. 특정 정책에 불만을 표시한 시민들도 처벌을 받기까지 했으니 공직에 있으면서 내부의 정책 결정의 불합리함을 비판한 사람들이 겪은 고통은 불문가지다. 이처럼 이명박 정부 들어서 표현, 소통, 대화를 지향하는 욕망들은 전방위적으로 찬서리를 맞았다.

시민들의 표현, 소통, 대화에 국정, 국가 사업의 홍보가 자리를 차지했다. 표현, 소통, 대화의 중심에 서야 할 문화체육관광부는 홍보기구로 전락했다. 효율성을 위한다며 없애기로 한 약속과는 달리 홍보기구는 과거와 다름없는 활약을 폈다. 한미 FTA, G-20 회의, 4대강 사업에는 온 부처가 다 동원되어 홍보에 몰입했다. 시민사회의 소통은 위축시키고, 정책 홍보는 팽창시키는 방식으로 인해 사회는 전에 없던 정서구조(structure of feeling)를 만들어냈다. 위로부터는 억압이 있고, 그에 반하는 것은 위축되거나 삭제되니 모두 공식적 담론에 대힌 신뢰를 걷어 들이기 시작했다. 신뢰를 갖지 못하는 공적 담론기구를 피해 비공식적 담론기구를 새로운 소통수단으로 택한다. SNS가 폭발적인 담론 소통 기구로 등장하고, 팟 캐스팅을 이용한 ‘나는 꼼수다’가 2011년 최고의 히트 발명품으로 등장한 것도 그런 배경 탓이다. 곳곳에서 행해지는 모든 사회적 심의는 이미 희화화되고 있다. 관련 기구들의 신뢰는 추락을 거듭했다. 사회가 퇴락한 느낌을 주고, 활력을 잃고 있으며 적의가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시민사회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반응을 끊어둔 현 시스템으로는 그 신호를 받아들일 수도 없고,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대처할 방안이 없다. 이른바 사회적 소통이 완전히 퇴락한 것이다.

 인내, 관용, 리터러시

사회 내 여러 기구를 통해 표현과 소통의 내용을 심의하겠다는 의지가 사회적 소통의 퇴락으로까지 이어졌다. 심의하는 국가 장치를 지닌다는 사실 자체는 권력으로서는 늘 유혹일 수 밖에 없다. 언제든 편리하게 활용하도록 유혹하기 때문이다. 심의 기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심의 당하는 쪽에 겁주기 효과를 주고, 심의 기구를 언제든 동원하는 쪽에는 권력 활용 의지를 작동시킨다. 권력 활용 의지가 발동되면 금방 위축 효과를 얻어 성공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사회적 소통의 퇴락이 아니라 건강한 소통이 이뤄지고 있다는 착시 현상이 생긴다. 이어 위생적 사회 소통을 이뤄냈다는 공명심도 발생한다. 이는 사회적 심의를 더욱 공식화하거나 강화하려는 관료적 욕망으로 되 먹임친다.

원래 소통, 대화의 장은 시민들 간의 협력을 기반으로 한다. 제 3자 효과에서 바라보듯 대중들이 낮은 차원에서 비윤리적인 갑론을박에 머물기도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회 내 소통, 대화의 장은 긴 기간을 통해 견제, 비판, 격려, 화해 등을 통해 소통과 대화의 장을 만들어가는 자정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 자정 능력을 효율적으로 발동시키는 사회적 힘(impetus)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시민사회는 그 힘을 전파, 전수, 재생산시키는 것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대화, 소통과 관련된 인내, 관용, 리터러시 등과 관련된 교육을 의미한다. 심의를 통해 규제를 하는 대신 교육을 통해 대화와 소통을 더 신장시키자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심의 제도, 기구가 전환해 나갈 방향은 분명하다. 시민들 간의 협력을 촉진하고, 인내, 관용, 리터러시를 챙길 수 있는 제도, 기구로의 전환이다. 그 전환은 심의, 규제 패러다임에서 협력 패러다임으로의 변화이고, 진정성있는 민주주의로의 진입이다.

심의, 규제 패러다임에서 인내, 관용, 리터러시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대중에 대한 믿음의 전환과도 통한다. 대중에 대한 ‘꼰대적’ 인식은 심의와 규제를 지속시키려는 의지로 이어진다. 대중이 늘 취약한 심성과 윤리를 지니고 있다는 믿음이 심의와 규제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대중이 과거와는 달리 더 많이 토론하려하고, 알려하고, 참여하려 한다는 믿음, 그리고 스스로 자정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인내, 관용, 리터러시 패러다임으로 이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지금의 과도한 심의 사회, 규제 사회의 모습은 대중의 욕망과는 한참 거리가 먼 관료 사회의 모습의 재현이다. 권력 활용의 욕망의 결과다. 결국 비민주적 사회성의 집적체처럼 보인다. 새로운 정권의 수립을 넘어서 진정한 민주주의로의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계속 이어야 한다는 의지가 확고하다면 지금 작동하고 있는 심의, 규제 제도 및 기구들은 제거해야 할 제 1순위에 등극시켜야 한다. 

 

2011-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