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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행자 프라이버시를 통째로 집어삼키다

By 2010/06/09 10월 25th, 2016 No Comments
김승욱

미국 비자면제 이면의 진실

지난 8월 3일 부시 대통령 서명에 의해 확정된 「VWP 현대화 방안」에 따라, 미국 비자면제프로그램(VWP) 가입을 위한 비자거부율 요건이 ‘3%미만’에서 ‘10%미만’으로 완화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는 생체여권(전자여권)만 도입되면 내년 7월부터 미국비자가 면제되고, 미국방문이 쉬워질 것처럼 국정홍보를 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외교통상부가 최재천 의원실의 질의에 답변한 바에 따르면, 미국비자면제 프로그램(VWP) 가입요건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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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여행허가제(ETA): 이름만 다른 비자제도

외교통상부는 전자여행허가제(ETA)에 대해 “미국에 무비자 입국 희망자가 미국 출입국당국에 간단한 신원정보를 전자적으로 제공하면, 동 정보를 전자적으로 처리하여 미국 입국 자격 여부를 심사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간단한 신원정보란 미국행 비행기안에서 작성하는 입국신고서(I-94)를 대체하는 수준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입국신고서에 적히는 내용인 이름과 여권번호 정도로 미국이 입국자격 여부를 심사할 수 있을까?

미국의 이민국적법(Immigration and Naturalization Act)의 입국불허사유(범죄경력 등)에 해당하는 경우는 미국비자면제 대상이 아니며, 전자여행허가제(ETA)의 심사과정을 통과해서는 안된다. 이는 미국은 전자여행허가제(ETA)의 심사과정에서, 신청자의 전과기록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CBS의 김진우 워싱턴 특파원이 7월 27일 타전한 기사를 보자.

“전자사전여행허가제란 호주가 도입한 시스템으로 한국의 미국 여행자가 비행기표를 살 때 자신의 전과와 인적 사항 등이 항공사의 전산으로 처리돼 미국 입국을 자동으로 허락받는 시스템이다. 이른바 미국행 비행기표가 미국 입국 비자 구실을 하게 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한국인들의 미국 입국에 필요한 인적사항과 전과기록 등을 여행사에 제공해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현재는 필요할 경우에 한해 개인이 자신의 범죄기록을 조회해 미대사관에 범죄 경력 자료 회보서를 제출하고 있다. 개인의 사법기록이란 한국에서도 검찰과 경찰만이 조회할 수 있는 민감한 개인정보이다. 그런데 비자면제의 조건으로 새롭게 도입된 전자여행허가제(ETA)에 따르면, 개인의 사법기록이 민간사업자인 여행사나 항공사를 통해서 미국으로 전송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개인이 느끼는 기분은 어떠할 것인가?

자국으로의 여행을 허가해주는 것을 비자(VISA)라고 하는데, 전자여행허가제(ETA)란 또 다른 이름의 비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사실상의 비자제도를 전자여행허가제(ETA)라는 웰빙식 이름으로 대체해놓고, 비자면제를 해주겠다는 것은 미국의 기만이다. 미국비자면제 프로그램(VWP)의 새로운 조건으로 전자여행허가제(ETA)를 준비하고 있는 것에 대한 EU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한 EU 관리는 미국이 전자여행허가제(ETA)를 준비하는 것은 EU의 시민들에게 새로운 스타일의 비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에 이것이 다른 이름으로 포장한 비자제도라면, EU도 미국여행자들에게 비슷한 요구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정부는 비자를 면제해주고, 다른 이름의 비자를 도입하겠다는 미국의 기만에 놀아나고 있다.

여행자 정보 공유 협정: 개인정보는 정부가 맘대로 거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행자 정보 공유 협정이라는 것은 더욱 심각하게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을 침해하고 있다. 전자여행허가제(ETA)는 개인이 자신의 정보를 강제적으로 제출해야 되는 것이었다면, 여행자 정보공유 협정이란, 한국과 미국이 여행자와 관련된 정보들을 정부 간에 통째로 교환하겠다는 약속이다. 외교통상부는 여행자 정보 공유 협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해당국은 미국과 협정을 통해 가입국 국민이 미국 여행 시 미국과 미국 시민의 안보와 복지에 위협을 주는지 여부에 대한 정보를 공유”

가입국 국민이 미국 여행 시 미국과 미국 시민의 안보와 복지에 위협을 주는지 여부에 대한 정보란 무엇을 말하는가? 여행자 개인의 사법기록 말고 다른 정보를 상상할 수 없다. 이제 개인의 사법기록을 정부 간에 서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을 맺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미국비자심사에서도 미 대사관에서 한국인의 신원이나, 범죄경력 등을 조회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개인의 제출서류에 의존해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자여행허가제(ETA)와 여행자 정보 공유 협정을 통해, 개인에게 범죄기록 등을 제출받고, 그것을 한국정부를 통해 혹은 스스로 가진 권한을 이용하여, 확인조회해보겠다는 것이다. 미 국토안보부의 발언은 이러한 협정에 빈말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어떠한 전자여행허가제(ETA)라도 도난, 분실여권, 범죄자,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정보공유와, 여행문서와 공항의 보안수준을 높임으로서 강화될 수 있다”

미국은 이러한 정보공유를 EU에도 요청하고 있지만, EU는 미국이 프라이버시 보호 수준이 EU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며 거절하고 있다. EU는 미 국토안보부(DHS)의 데이터베이스(Automated Biometric Identification System)에 수집된 정보들이 75년간 보관되는 것, 출입국심사대에서 수집된 생체정보가 100년간 보관되는 것은 과도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미국에는 미 국토안보부(DHS)에 프라이버시 담당관이 있을 뿐 독립적인 프라이버시 보호기구나 개인정보보호 기구가 없는 것도 지적하고 있다. 반면에 한국은 미국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비자면제에만 눈이 멀어서 모든 조건을 다 들어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여행자 프라이버시를 통째로 집어삼키다

9/11 테러가 항공기를 이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비행을 끝마친 후에 진행되는 여행자들의 입국심사가 아니라, 여행자가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그들을 검사하고, 테러리스트가 있다면, 색출해내는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그 결과 현재도 미국은 미국으로 향하는 전 세계 여행객들의 항공기 예약 정보(PNR: Passenger Name Record)를 비행기가 뜨기 전에 수집하고 있으며, 그들의 이동을 분석하고, 범죄기록 등을 조회하여, 용의점수를 매기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여행자가 어느 지역에서 얼마동안 머물렀는가가 용의점수를 매기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므로, 미국은 여행자들의 이동기록을 모두 기록하고 싶어 한다.

한국의 경우, 미국비자심사 시 제출하는 지문과 함께 개인정보, 항공기예약정보(PNR) 등은 미 국토안보부(DHS)의 데이터베이스(Automated Biometric Identification System)에 75년간 보관되고 있다. 여기서 생체정보는 한 개의 기록을 유일무이(unique)하게 인식할 수 있는 키로서 사용되는데, 생체정보만이 국제적으로 인간을 식별할 수 있는 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9/11 테러 이 후 최초로, 한국이 미국의 비자면제 프로그램(VWP)에 가입하려고 하지만, 이 역시 한국 국민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정보수집을 강화하여, 비행기가 뜨기 전에 테러리스트를 색출해내기 위함일 뿐이다. US-VISIT, 생체여권 등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미국의 모든 노력의 핵심은 생체정보이다. 미국은 이제 미 대사관에서의 비자심사과정이 아니라 항공사나 여행사에서 항공권이 예약될 때 생체정보를 요구하려고 할 것이다. 한국정부가 9/11 테러 이 후 최초로 미국 비자 면제 프로그램에 가입하겠다는 것은, 세계 최초의 굴욕들을 당하겠다는 뜻이다.

불편한 것은 비자가 아니라 미국의 오만방자함

미국비자가 불편한 이유는 비자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다한 개인정보를 요구하고, 고압적인 태도로 비자심사에 일관하는 미국의 오만방자함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편함을 걷어내기 위해서 없어져야 되는 것은 미국의 오만방자한 태도일 뿐이다. 비자심사를 없애면서 전자여행허가제(ETA)와 여행자 정보 공유 협정을 통해 미국은 오히려 더 많은 개인정보를 더욱 오만한 태도로 요구하고 있다. 미국으로 향하는 불편함은 더 깊어만 갈 것이다. 지금 한국정부의 할 일은 미국비자면제를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미국의 월권행위에 ‘NO’라고 말하는 것이다.

2008-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