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협약입장

[보도자료] 릴레이 칼럼 제5탄 : 지적재산권 집행

By 2008/03/07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오병일

한국은 미국와 유럽의 지재권 집행 강화 전략을 시험하는 ‘폭격 시험장’인가?

릴레이 컬럼 1탄(http://nofta-ip.jinbo.net/?q=node/152)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한EU FTA 협상 지적재산권 분야에서 유럽의 주요 관심사항은 ‘지적재산권의 효과적인 집행’이다. 여기서 ‘지적재산권 집행’이란 협정 상의 지적재산권 권리의 보호를 실효성있게 관철하기 위한 행정조치 및 민, 형사 사법조치를 의미한다. 그 중요성에 비해 부각이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한미 FTA 협정에서도 ‘권리 보호 수준의 강화’와 함께, 지재권 챕터의 거의 절반을 집행 조항이 차지할 정도로 ‘강력한 집행 조항’이 핵심 축을 이루고 있다.

강화되는 집행 조항, 각 국의 사법체계를 무너뜨린다

원래 세계무역기구(WTO) 트립스 협정(TRIPS,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 이전에는, 베른협약, 파리협약 등 지재권에 관한 국제조약에 집행과 관련된 조항이 거의 없었거나 있더라도 추상적인 일반 원칙을 정하고 구체적인 조치는 개별 국가의 법률에 맡기는 수준이었다. 미국계 다국적기업들이 트립스 협정을 추진하게 된 주요 동기 중 하나도 바로 기존 협정의 집행 조항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그래서 트립스 협정에는 지재권 집행과 관련된 약 20개의 조문을 두고 있다.
그러나 트립스 협정의 집행 조항은 관세청을 통한 통관 절차(이른바 ‘국경조치’)는 상세히 다루지만, 민사절차나 형사절차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되어있다. 실제로 국경조치는 집행 조항에서 절반을 차지하지만, 형사 절차는 단 하나의 조항만을 갖고 있다. 이는 트립스 협정의 출발이 상표 위조품을 제재하는 것이었고, 트립스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상표 위조품 이외에 특허나 저작권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조약의 체결에 개발도상국들이 강력히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트립스는 각국의 법 제도를 존중하고, 각국의 법제도 및 관행의 토대 위에서 협약을 시행하며, 지적재산권 분야에 독특한 사법체계를 만들거나 일반적인 법 집행에 지장을 줄 수 없다는 원칙 규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트립스 집행 규정의 한계는 FTA를 통해 무너지고 있다. 특히 가장 공격적인 형태의 미국식 FTA는 트립스 집행 규정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볼 수 있는데, 한미 FTA 지적재산권 협상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지적재산권 분야에 독특한 사법체계를 만들 수 없다는 트립스 원칙은 유명무실해졌다.

한편, 유럽연합과 미국은 2005년 정상회담 이후 지재권 집행에 관한 전략행동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것은 (1) 역내 및 국경에서 강력하고 효과적인 지재권 집행을 도모하고, (2) 전 세계의 지재권 침해 행위를 줄이려는 협력을 강화하며, (3) 지재권 보호를 위한 민관 공조를 강화하는 것을 주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그 주요 내용에는 ‘지재권 집행을 강화하기 위해 제3국과 직접 협상하는 양자 조치를 활용하며, 산업계로부터 정보를 취합하고 유럽연합과 미국의 조율된 메시지를 전달하며(우선순위는 중국과 러시아며, 아시아, 중동, 라틴아메리카도 주요 관심국임), 제3국 주재 대사관끼리 정보를 교환한다’는 것과 ‘다자틀을 통한 목표 달성을 위해 OECD, G8 정상회의를 활용하고, WTO의 트립스 이사회와 같은 무역기구와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 등에서 양국이 긴밀히 협력하고, 제3국의 트립스 협정 이행을 도모한다’는 것 등을 포함하고 있다.

택시기사도 지재권 침해로 형사처벌?

유럽연합의 공공, 민간 기관에서 나온 각종 보고서들에서도 한국의 지적재산권 집행의 문제점과 권고 의견을 제시하며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주한유럽상공회의소의 지적재산권 위원회는 2007년 보고서(Trade Issues and Recommendation 2007)에서 한국의 법률이 현재 트립스 협정의 기준을 대체적으로 준수하고 있지만, 규제에 관한 정책과 집행 방법에 있어 여전히 간격이 존재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지재권 침해자에 대한 엄격한 처벌, 강력한 단속, 법 집행기관에 전담부서의 설립, 공무원과 국민에 대한 지재권 교육 등을 주문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상표법 위반자에 대한 한국 법원의 판결이 지나치게 관대하다며, 엄격한 벌금형과 판결을 선고할 것 △ 법무부, 검찰청 등 법 집행기관 내에 별도의 지재권 전담 부서를 설립하여 범죄 규모에 관계없이 지재권 범죄에 대한 조사만 수행할 것 △ 이태원, 동대문, 남대문, 명동 등 위조품 판매 시장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단속을 하고 위반자에 대해 엄중한 형사 조치를 취할 것 △ 범죄 혐의가 있는 지재권 위반자의 은행 계좌를 동결하고 침해 행위로 얻은 수익을 몰수하며, 위반 물품을 철저히 폐기할 것 △ 담당 공무원을 대상으로 위조품 식별 요령에 대한 교육을 실시할 것 △ 여행사, 관광 가이드, 택시 기사가 외국인 관광객을 위조품을 파는 가게로 안내하는 경우 범죄 공모자로 처벌할 것 △ 위조품이 거래되는 온라인 쇼핑몰에 대한 책임을 묻도록 법 집행조치를 취할 것 △ 특허법 위반에 대해 고소없이 형사 처벌을 할 수 있도록 할 것 등이다.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진행된, 대기업에서 학교, 심지어 소호(SOHO)에 이르는 불법 소프트웨어 단속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알고 있다. 한미 FTA를 통해 대학가나 인터넷 사이트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더욱 강화될 것이며, 일반 이용자들이 대거 기소되거나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받는 일이 빈번해질 것이다. 여기에 더해 한EU FTA를 하면, 남대문 시장, 동대문, 이태원, 명동, 용산전자상가 등에 대한 대대적이고 정기적인 단속 활동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심지어 외국인 관광객을 이태원이나 명동에 안내한 여행사나 관광 가이드는 물론 택시기사까지도 지재권 침해 혐의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다.

한국의 사법 기관을 권리자를 위한 시녀로 만들 생각인가?

이미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한 행정, 사법적 절차를 충분히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는 권리에 대한 추정 규정, 법정손해배상제도, 일방적 구제절차 등과 같이 권리자에게 편향될 뿐만 아니라, 한국의 법체계와도 맞지 않는 제도의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지재권 침해에 대해 엄격한 형벌을 요구하며, 국회의 입법권이나 법원의 재량권마저 무시하고 있다. 지재권 집행에 관한 유럽연합의 요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법원과 검찰 등 사법기관은 지재권 전담부서를 운영해야 하고, 판사와 검사, 경찰, 지재권 관련 행정부는 위조품 식별요령을 비롯한 지재권 교육을 받아야 하며, 일반인을 위한 홍보 활동과 국가 교육과정도 보완해야 한다. 한국의 사법기관은 권리자를 위해 봉사하는 시녀로 전락하며, 그야말로 지재권 보호를 위한 국가총동원령이 내려지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과 유럽연합은 지재권 집행 강화를 위한 전략적 제휴와 역할 분담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한미 FTA에 이어 유럽연합과 FTA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한국은 이들의 전략을 시험하는 ‘폭격 훈련장’이 될 것인가!

2008-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