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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칼럼] 인터넷과 2002년

By 2003/01/14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진보네트워크센터

인터넷과 2002년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정책국장, della@jinbo.net)

2002년 대한민국은 초기 정보사회론자들이 환호할만한 사례들의 전시장이었다.
연초에는 동계올림픽 오노 파동(?)에서 네티즌이 자발적으로 항의 노래와 플래시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온라인 항의활동을 조직해 주목을 받았다. 월드컵 때는 인터넷에서 결성된 서포터즈 붉은 악마가 전국민적인 "대~한민국" 열광을 만들어 냈고 광화문과 시청을 시민의 광장으로 접수해 버렸다. 시민의 광장은 사라지지 않고 11월에 거대한 분노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고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는 수십만 촛불 시위는 한 네티즌의 제안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촛불 시위는 지금도 확산되고 있다.

가장 극적인 드라마는 대통령 선거의 반전이었다.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킨 가장 큰 힘은 인터넷 ‘노사모’의 조직과 자발적인 지지운동으로 분석되고 있다. 특히 정몽준씨의 갑작스런 후보 지지 철회로 투표 포기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핸드폰과 인터넷을 이용한 적극적인 설득이 오히려 2·30대의 투표율을 높였고 이것이 결국 ‘오후의 반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세대교체론도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다. 정말로 낡은 수구 정치는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인가?

적어도 20대에는 분명한 변화가 있는 것 같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은 인터넷을 조직하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조직당하고 설득당하기는 입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좋은 면만 보자면, 인터넷은 이들의 ‘민주적 소양’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 것 같다. 당연히 학교에서 배웠어야 할 ‘민주적 소양’을 학교에서 습득하는데 실패했다면 — 학교 자체가 얼마나 반민주적인 공간인가! — 인터넷에서는 자발적인 강제를 통해 제2의 사회화를 시도하고 있다. 워낙 다양한 여러 사람들과, 그만큼의 다양한 견해들이 붐비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다.

한번은 ‘좀 보수적인’ 대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 대학생이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시위를 옹호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피해를 주는’ 시위를 비판하기 전에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인 인권인 것은 알고 있느냐고 반문하였다. 물론 그는 그정도로 설득당하지 않았으며 계속 항변했다. 하지만 그는 때마침 주한미군과 미대사관 홈페이지에서 불붙고 있던 온라인 시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답변하지 못했다. 분명 이런 사건들이 그와 같은 이들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 분명하다.

좋은 면만 생각하면, 올해는 이렇게 뿌듯한 한 해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한 것이다. 나도 순수하게 환호하고 싶지만 몇가지 의구심 때문에 마음이 부대낀다.

첫째, 우리의 인터넷 정책들이 이런 찬사를 마땅히 받아도 될 만큼 충분히 민주적이라 볼 수 있을까. 사실 나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최고 수훈이 인터넷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아이러니를 느꼈다. 정보통신부에서 ‘디지털 대통령’이라며 기대감을 표시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는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시민사회단체의 질의 때 노무현 후보의 인터넷 내용규제 정책이 다른 대통령 후보들보다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23개 시민사회단체들이 정보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33개 공약을 제안했지만 거의 수용하지 않았다.(http://www.it-president.or.kr) 특히 지난 6월 위헌 결정을 받았던 전기통신사업법 상의 정보통신부 장관의 내용규제권한 폐지와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폐지 등 인터넷 내용규제 정책과 관련해서는 정보통신부의 현재 입장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알려졌다시피 싱가폴 등 몇 나라를 제외하면 법원 혹은 유사한 기구가 아닌 정부가 인터넷을 직접 규제하는 경우는 없다.

인터넷보다 규제적이라는 우리나라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문화관광부 장관이 명예훼손의 소지가 있다해서 신문이나 잡지 내용을 삭제하라 마라 직접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심지어 노무현 후보는 글리벡 강제실시나 디지털 도서관의 전송권 등 주요 현안에 대해서 아예 답변을 하지 않았으며 이회창 후보를 비롯한 모든 다른 후보들이 그 필요성에 동의한 프라이버시보호법 제정에 대해서도 안이한 답변으로 실망을 주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가 인터넷에 진 빚을 어떻게 갚겠다는 생각일까?

무엇보다 지금 인터넷에서 표상되는 흐름이 ‘주류’가 되는 상황 또한 별로 반가운 일은 아니다. 이번 선거가 대한민국 정치의 양당 가르기 구도의 시작이라면 신진 진보 정치 입장에서 보기에 좋은 일은 아니다.

그 뿐 아니라 이번 선거를 비롯한 ‘올해의 인터넷 사건’이 모두 국가적 사안에 대한 것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한다. 제3세계 민족해방 운동은 저항의 민족주의이다. 초국적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국민국가의 위상과 공공 영역의 부활은 시대적 요청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 전세계적 여러 나라에서 민족주의적 의식이 고양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자국민 패권주의는 파시즘과 다를 바 없다.

국가적 사안이 아닌 경우 인터넷 토론은 종종 파시즘적인 힘에 의한 폭력을 휘둘러 왔다. 특히 여성 문제 관련한 논쟁에서. 군가산점 논쟁은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으로 돌변했었고 양심적 병역거부 논쟁에서는 노골적인 여성 혐오를 드러냈었다. 여성들은 인터넷으로 다양한 고발활동을 모색했지만 각종 명예훼손 소송으로 위축되고 있다. 기우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의 ‘주류’들이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힘을 민주주의와 사회적 소수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배타적 민족주의와 기득권 수호를 위해 휘두르지는 않을까?

그래도 좋은 면을 보고 싶다. 인터넷의 궁극적인 미덕은 다양함의 공존이 아니던가. 나는 월드컵의 열광 속에서도 ‘반한’ 감정을 성찰하자는 목소리를 들었다. "태국인들은 ‘꼬레아’와 ‘레드데블스’란 단어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젖는다." 대~한민국의 이주 노동자 정책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작은 목소리들을 놓치지 말고 귀기울여야 한다. 이것을 살리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는 단지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접근 기회를 실질적이고 적극적으로 균등화하는 의미를 가져야 한다.

2003-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