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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감시사회론 비판

By 2004/09/08 10월 25th, 2016 No Comments

독자기고

장여경

감시가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과거에는 은행 등 제한적인 장소에만 설치되었던 CCTV는 이제 거리 곳곳에서 발견된다. 경찰, 건물주부터 주차 문제로 고민하는 이웃까지 다양한 주체들이 CCTV를 설치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에는 CCTV나 그 촬영자료를 규제하는 법률조차 없다.

특히 노동감시는 심각한 수준이다. 최근 KT의 노동자 밀착감시로부터 첨단 휴대폰 기능을 이용한 삼성그룹의 대규모 노동자 감시가 문제가 되었지만 새삼스런 일들은 아니다. ‘노동감시근절을위한연대모임’이 2003년 한국의 207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89.9%의 사업장이 노동자를 감시하기 위해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을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CCTV가 57.0%로 가장 높았고 이메일과 홈페이지 감시 및 차단 등 인터넷 감시도 41.5%에 육박하였다.

어째서 최근 들어 감시 기술이 갑작스레 많이 ‘출현’하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감시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답해 왔다. 그리고 이 설명은 자연스레 ‘전자감시사회’가 출현했다는 진단으로 이어진다. 그런가?

전자감시사회론의 등장

저명한 프라이버시 학자 데이비드 라이온은 그의 저서 <전자감시사회>(한국전자통신연구소, 1994)에서 컴퓨터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의 발달 때문에 노동자와 시민이 보다 강화된 감시를 받게 됐다고 주장한다. 정보의 디지털화는 정보 처리 능력, 정확도, 보존성, 변환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전자감시능력을 극대화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감시에 활용되는 정보처리기술이 발달하여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환경으로 사소한 움직임조차도 시공간을 초월하여 데이터베이스에 수집, 기록된다는 점에서 전자감시사회는 더욱 중앙집중화된 사회이다.

여기서 흔히 조지오웰의 소설 <1984년>에 등장하는 ‘빅브라더’의 국가가 연상된다. 물론 컴퓨터 감시는 이 소설의 감시보다 더 근대적이다. 감시를 일상화시키고, 확장시키며, 심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감시사회의 또 다른 전형은 푸코가 벤담의 판옵티콘을 차용하여 제시한 ‘원형감옥’이다. 원형감옥 안에서 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간의 시선과 권력의 비대칭은 결국 주체가 규율 권력을 내면화하도록 만든다. 원형 감옥은 과거의 직접적인 감시와 달리 ‘벨벳으로 된 장갑’ 속에 철권을 숨긴다. 그러나 감시 권력은 이로써 더욱 막강해진다.

라이온에 따르면 작업장에 감시가 강화된 것도 컴퓨터 기술이 발달한 데 따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최근 노동 현장을 비롯해 이 사회 전반에 감시가 증가하는 것은 기술의 발달에 의한 ‘보편적 현상’이다. 포디즘이 위기를 맞자 등장한 토요티즘(toyotism: 도요타 자동차의 생산방식으로 즉시 관리 시스템을 말한다)은 다기능 작업과 적기 생산을 위해 작업과정을 고도로 통제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는데 컴퓨터 기술이 그 실현을 가능하게 했다. 이에 따라 애초 물(物)을 통제하기 위해 도입된 기술이 사람도 감시하면서 새로운 노동 감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결국 CCTV, 키보드 입력 감시, 운송 기록, 스마트 카드, 생체 인식, 위치 추적, 전자메일 감시 등 첨단 ‘감시 기술의 권능’이 노동자를 ‘완벽한 감시체계’ 하에 처하게 했다. 물론 라이온은 기술결정론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조그맣게 덧붙인다.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사회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그러나 아쉽게도 언급에 그쳤다.

기술의 발달이 감시사회를 불렀다?

전자감사사회론에는 우리가 주목할 지점이 있다. 경제개발 중심의 정보사회론과 대조되는 음울한 통찰력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전자감시사회론이 전제하고 있는 ‘전자감시사회’에 대해 미심쩍은 마음을 거둘 수 없다. 감시 기술이 어떻게 출현했고 어떻게 발달돼 왔는지에 대한 전자감시사회론의 입장이 아무래도 불분명한 것이다.

라이온은 감시 기술이 우연하게 출현한 것이라고 보았다. “노동자 감시는 효율성, 생산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에서 나온 의도되지 않은 결과”라는 것이다. 이런 ‘비조직적’ 감시가 기존 테일러리즘의 감시와 가장 다른 점은 규율 권력의 효과가 크다는 데 있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일초의 오차도 없이 면밀히 관찰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순응한다. 그러나 라이온은 결국 자본주의 사업장이 여러 선택지 가운데 왜 감시 기술을 선택하는지에 대해 얼버무린다. 아무튼 그에게는 전자감시사회가 도래했다는 진단이 가장 중요하며, 전자감시사회를 초래한 것이 컴퓨터 기술의 발달이라는 것만이 확실하다.

결국 전자감시사회론은 조심스럽게 기술결정론을 피하고자 했지만 기술결정론의 혐의를 완전히 벗을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감시사회론은 감시 기술의 발달을 필연적인 결과로 간주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도래한 전자감시사회에 대응하는 것은 매우 부질없는 짓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라이온의 이론은 과감한 진단에 비해 실천적 제언이 매우 무력하다.

여기서 한 단계 더 진전한 것이 홍성욱의 연구이다. 홍성욱은 <파놉티콘 – 정보사회 정보감옥>(책세상, 2002)에서 감시를 극복하는 실천적인 함의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홍성욱에 따르면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의 본질은 그의 동생 새뮤얼 벤담의 공장에서 잘 드러난다. 판옵티콘은 노동을 통해 죄수 혹은 노동자의 영혼에 규율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판옵티콘은 그 자체로 거대한 공장이다. 벤담도 판옵티콘을 감시의 원리가 내재된 자동기계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거대한 기계의 궁극적인 목적이 감시를 내면화해서 규율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공장에 도입되는 기계 역시 그 부속품으로써 판옵티콘의 기능을 구현한다. 기계는 숙련 노동을 무력화시키고 육체적·정신적인 규율을 강제한다.

그런데 홍성욱이 주목하는 것은 최근의 감시가 벤담의 판옵티콘 이상이라는 점이다.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정보 판옵티콘’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작업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이 정보를 관리에게 집중시키고, 작업자 개개인에 대한 실시간 정보 관리를 강화하면서 등장한 정보 판옵티콘은 사람에 대한 정보 수집, 직접적 통제와 규율을 하나로 합쳤다. 특히 정보 판옵티콘에서 정보는 벤담의 판옵티콘에서의 시선을 대신하여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이들에게 규율을 강제한다. 판옵티콘에 갇힌 죄수가 자신이 감시를 당하는지 아닌지를 모르듯이, 전자 판옵티콘의 정보망에 노출된 사람들 또한 자신의 행동이 국가나 직장의 상사에게 언제 어떻게 열람되는지 아닌지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나 작업에 주의를 기울이곤 한다.

전자 감시는 판옵티콘의 감시 능력을 전 사회로 확장했다. 시선에는 한계가 있지만 컴퓨터를 통한 정보 수집은 국가적이고 국제적이다. 감시가 범사회적이고 일상적인 것이 되면서, 간수가 ‘중앙’탑에 숨어서 주변의 감방을 감시했던 판옵티콘과 달리, 전자 판옵티콘에는 ‘중앙’이 뚜렷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또 전자 감시는 피감시자의 자발적인 협조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로 인하여 전자 판옵티콘은 ‘수퍼 판옵티콘’으로 확장된다. 이런 경향은 특히 기업이 소비자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받기 위해 기업의 정보 수집에 자발적으로 협조한다. 기업은 소비자의 상세한 소비 성향에 대한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고 이 정보를 광고 회사나 기타 기관으로 넘긴다. 소비자는 자발적인 참가로 인해 감시 네트워크에 포함되는 것이다.

감시를 역감시로

그런데 여기서 벤담의 판옵티콘을 전자 판옵티콘으로, 다시 수퍼 판옵티콘으로 발달시킨 동력은 무엇일까. 역시 기술의 발달이다. 홍성욱은 기술이 정치적으로 중립적으로, 우연히 발달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기술의 역사를 통해 어떤 기술이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사회·문화적 영향을 낳는 경우를 종종 본다. 기술의 궤적은 … 사회 세력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때그때 형성되는 불안정한 균형에 따라 불규칙하고 가지치기 식의 경로를 따른다.”

이 말을 좀더 발전시켜 보면, 동일한 감시 기술이 역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즉 피감시자가 감시 권력을 감시한다. 이것은 쌍방향 판옵티콘이란 의미에서 시놉티콘(synopticon)이라 불릴 수 있다. 작업장에서는 정보 공개를 통해 판옵티콘을 역감시할 수 있다. 홍성욱이 인용한 주보프의 연구에 의하면 두 개의 회사가 갖고 있었던 비슷한 성능의 노동자 관리 데이터베이스가 노동자에 대한 공개와 참여 허용 정도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았다. 노동자 관리 데이터베이스가 노동자와 관리자 모두에게 공개됐던 회사에서는, 관리자의 수직적인 감시 외에도 작업 단위 간 수평적인 감시와 노동자들이 관리자를 감시하는 역감시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을 볼 수 있는 집합주의적 감시는, 한 사람만이 다른 모든 사람을 감시하는 전자 판옵티콘에 해독제로 작용해 감시를 ‘투명’하게 만들었다. 반면에 데이터베이스가 관리자들에게만 공개되었던 회사에서는, 노동자들이 강한 반감을 갖고 은밀하게 태업했다고 한다. 결국 정보의 공개 여부에 따라 비슷한 정보 기술이 하나는 시놉티콘으로, 다른 하나는 판옵티콘으로 기능했다는 것이었다.

홍성욱의 ‘역감시’는 분명 매우 실천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 특히 현대의 만연한 감시를 파편화한 개인이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국민이 자신을 감시하는 권력을 역으로 감시할 수 있는 집단적인 권리는 매우 중요하다. 시민정치적 영역에서는 인터넷을 이용한 역감시가 최근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노동 감시 기술은 역감시로 극복될 수 없다. 노동 감시는 일차적으로 생산관계라는 특정한 사회 관계가 규정한 관리방식으로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보프의 연구는 작업장이 ‘누구를 위해’ 투명해졌는지를 묻지 않으며, 그렇게 투명해진 작업장이 ‘누구에게’ 좋았다는 것인지도 묻지 않는다. 무엇보다 최근의 노동과정 연구들은 포디즘 이후 ‘상호 감시’가 하나의 전략적 관리 방식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노동 통제를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공정에까지 미치게 하기 위해 자본이 도입한 ‘고도의’ 관리 기법으로서, 감시의 ‘강화’라는 것이다. 물론 정보 공개와 같은 작업장 민주화는 매우 중요한 실천 과제이다. 그러나 주보프가 보여준 것은 감시 기술이 중립적이라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기술에 대한 이런 태도는 때로 매우 위험한 탈정치화의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누가 감시하는 자인지를 직시하자

기술이 발달하고 → 감시사회가 출현하고 → 따라서 노동 감시가 증가했다는 전자감시사회론의 단순한 분석은 기술결정론의 흔한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 기술의 발달로 특정한 사회가 자동적으로 출현한다면 이를 수용하는 것이 역사적 순리이자 사회적 진화의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보사회론이나 전자감시사회론은 똑같은 이데올로기 효과를 갖는다.

무엇보다 전자감시사회론은 기술의 사회적 관계를 암흑 상자(black box)로 간주하고 기술을 중립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이런 관점 하에서 감시는, 비록 차후 역감시로 대응한다 하더라도, 기술의 발달에 따라 확장되는 피할 수 없는 사태이다. 그러나 기술은 그 사회적 관계에 대해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가 말했듯이 기술은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발명되며 그 목적과 효용을 다하는 데서 기술의 결과는 어느 정도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술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유형의 정치 사회적 구조 변화를 조건짓거나 조장한다. 이미 고전적인 노동과정 연구자인 해리 브레이버맨은 “특히 자본의 의도에 따라 공장에 도입되는 기계들은 다소 선결적”이라고 지적했다.(노동과 독점자본)

노동 감시 기술은 일차적으로 생산 관계에 의해 형성되었다. 노동과정에서 노동 통제와 감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고 최근 등장한 첨단 노동 감시 기술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무엇보다 감시로 이득을 보는 자가 누구인지가 분명하다. 감시는 감시하고자 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기술은 그런 이해관계에 따라 발명되고 배치될 뿐이다. 결국 전자감시사회란 없다.

*이번 호 심층연재는 필자 사정으로 쉽니다

2004-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