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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네트워크의 의미

By 2010/05/18 10월 29th, 2016 No Comments

진보네트워크의 운영은 사회운동 내에서 독자적인 물리적 기반, 즉 독립네트워크 구축의 의미를 잘 보여주었다. 일차적인 중요성은 역시 정부나 기업의 검열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서비스를 개시한 후 줄곧 진보네트워크는 수사기관으로부터 이용자의 개인정보 제공을 요구받아 왔다. 수사기관이 혐의사항도 없이 아이디에 ‘marx’나 ‘좌파’를 포함하고 있는 이용자들의 개인정보를 일괄적으로 달라고 요구했던 적도 있었다. 또한 정보통신윤리위원회 등 검열기구는 진보네트워크 내 게시물의 삭제를 요구해 왔다. 하지만 진보네트워크는 이런 요구들에 응하지 않았다. 진보네트워크가 이런 감시와 검열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운동의 힘으로 설립하고 운영해온 독립네트워크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요구가 강제적인 법적 요구도 아니고 위법 혐의가 충분히 입증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규제 전통이 강한 국내 시장 환경에서 상업통신망은 이런 요구들을 거절하기 힘들다.

하지만, 수사기관의 개인정보 제공 협조요청이나 정보통신윤리위원회(2008년 현재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시정요구는 법적 강제력이 없으나, 수사기관이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 정보 제공을 요청할 경우에는 거부하기 힘들다. 그래서 진보네트워크는 이용자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서버에 IP주소를 남기지 않는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합법적인 방식으로든, 불법적인 방식으로든 개인정보의 유출을 막는 최상의 방법은 개인정보 자체를 수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특히 국가정보원)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을 통해 모든 전기통신사업자로 하여금 서버에 IP주소 등 로그기록 보관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 17대 국회에 상정된 바 있으나, 진보네트워크센터,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등 단체의 반발로 결국 통과되지 못하고 17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자동 폐기되었다. 그러나 2008년 시작된 18대 국회에 다시 상정될 전망이다.

두번째로, 사회운동 친화적인 독립 네트워크 기반은 사회운동 진영이 상업적 서비스의 범위를 넘어서 보다 풍부하게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진보달력과 같이 사회운동의 요구에 특화된 서비스, 메일링리스트처럼 수익성이 없어 상업적으로는 제공되지 않는 서비스를 제공한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상업적 웹호스팅 업체에서 서비스되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 의해 폐쇄된 경우 진보네트워크가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예컨데,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자퇴청소년 커뮤니티라며 폐쇄시킨 아이노스쿨이나 음란성을 이유로 폐쇄된 김인규 교사의 개인 홈페이지, 군대반대사이트(http://non-serviam.org) 등에 호스팅, 백업, 도메인 포워딩 등의 다양한 서비스를 지원하였다. 혹은 특정한 사회이슈를 위해 개설되었는데 가처분 소송 등 법적 강제의 대상이 된 경우, 해외의 진보단체들에 요청하여 해외 미러링(mirroring) 사이트를 구축하기도 했다. 안티포스코 홈페이지(http://antiposco.nodong.net)와 KBS 강철구 성폭력사건 공대위 홈페이지(http://antikcg.jinbo.net )등이 그러한 경우이다.

독립네트워크의 존재 의미는 단지 ‘기술적’인 서비스의 제공에 그치지 않는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독립네트워크보다 대규모 상업적 서비스가 더 안정적이고 비용도 저렴할 수 있다. 그러나 인터넷 서비스는 그 안에 수많은 문화적, 정치적인 맥락을 내포하고 있다. 진보네트워크센터는 이와 같은 문화적, 정치적인 맥락을 포착하고, 인터넷 기술과 서비스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이용될 수 있도록 교육하고 홍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 중의 하나가 ‘게시판 운영원칙’의 제정운동이다. 지금까지 시민사회운동은 정부의 검열에 맞서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정작 시민사회단체나 노조의 홈페이지 게시판에서는 아무런 원칙없이 게시물을 삭제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비록 정부나 사측의 농간으로 짐작되는 게시물이 있었을지라도, 때로는 회원(조합원)이나 정치적 반대세력의 표현을 차단하는 것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이에 진보네트워크센터는 사회적 약자의 보호와 인권 침해를 방지하면서도 게시판을 통한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게시판 운영원칙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였다. 2000년 11월 29일, <노동미디어 2000 주간: 다시 살펴보는 인터넷과 노동운동>에서 <사회운동단체, 홈페이지 운영원칙 어때야 하는가?> 워크샵을 개최하였다.

2000년 6월부터 홈페이지 콘테츠를 누구나 자유롭게 접근, 이용, 복제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의 홈페이지 카피레프트(No Copyright, Just Copyleft!)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2004년 10월 4일 정보공유라이선스가 발표되면서 홈페이지 및 블로그 콘텐츠에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자는 캠페인으로 발전했다. 카피레프트 캠페인이 말 그대로 ‘정보를 공유합니다!’라는 선언이었다면, 정보공유라이선스는 저작권과 이용자의 권리를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장애인들도 불편없이 웹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파이어폭스와 같이 인터넷 익스플로러 외의 브라우저로도 원활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홈페이지 웹접근성 지침’을 홍보하기도 했다. 시민사회단체 홈페이지들도 이미지만 제공하여 시각장애인이 이용할 수 없도록 하거나, 파이어폭스와 같은 브라우저에서 깨져보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동영상 포맷을 둘러싸고 벌어진 진보네트워크센터 내에서의 토론도 이러한 고민의 연장에 있다. 참세상 방송국은 설립 후 삼년 간 ‘리얼 플레이어’ 포맷만을 채택해 왔다. 리얼 포맷은 윈도 뿐 아니라 리눅스에서도 접근이 가능한 반면, ‘윈도 미디어’ 포맷은 윈도에서만 접근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윈도 미디어 포맷은 초국적 기업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적 PC 운영체제인 윈도에 부속되어 있는 미디어 플레이어 포맷으로서, 윈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안정성과 편리함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성과 편리함은 독점에서 나오는 힘이기 때문에 참세상 방송국은 의식적으로 윈도 미디어 포맷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장에서 윈도 미디어 포맷의 독점력이 커지자 참세상 방송국에도 윈도 미디어 포맷을 제공해 달라는 이용자 요구가 높아졌다. ‘리얼 플레이어’는 별도로 다운로드받아 컴퓨터에 설치해야 하지만, ‘윈도 미디어’는 윈도에서 자동으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비전문가들은 ‘리얼 플레이어’ 포맷의 동영상을 시청하는데 불편을 호소하였다.

대부분의 진보적인 인터넷 방송에서 윈도 미디어 포맷을 채택하면서 리얼 포맷을 고수하는 정책의 한계가 드러났다. 결국 2002년 여름 진보네트워크센터는 토론 끝에 리얼과 윈도 미디어 포맷을 병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진보네트워크 활동가들은 기술의 실용성과 정치 사이에서 갈등했다. 리얼 포맷을 고수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었지만 윈도 미디어 포맷에 비해 이용자들의 불편이 컸다. 단순히 보는데 불편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 자체에 대한 접근도를 떨어뜨리게 된다.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다면, 진보적 영상을 만드는 의미도 반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기술의 정치성에 대해 성찰하고 적극적으로 계획을 갖지 않으면 독점적 기술의 권력은 커져갈 것이고 진보적인 인터넷 방송의 선택폭은 매우 좁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