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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버타리아트>, 어슬러 휴즈, 신기섭 역, 갈무리, 2004{/}살아있는 여성의 눈길로 세상을 보라

By 2004/06/01 10월 25th, 2016 No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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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식

평소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 두 가지. 하나, 정리해고 바람이 몰아치면서 은행창구의 ‘여’직원들의 절반은 목이 달아났다. 그와 동시에 창구에서 해주던 전표작성은 물론 이제 왠만한 예출금 거래는 ‘캐쉬 로비’에서 고객들이 알아서 해결한다. 그런데 뭔 놈의 수수료가 그렇게 많이 붙는 걸까?

둘, 세탁기, 냉장고, 진공청소기, 하다못해 전기밥솥까지 주부들의 살림살이를 돕는 가전기기가 차고 넘치는데 오히려 ‘여인네’들의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던 옛날 시골 살림과 비교해도 집안일은 오히려 더 늘어난 것 같다.

가전기기가 발전하고 충분히 보급되었음에도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은 과거에 비해 줄지 않는다. 예전에는 일주일이나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던 집안의 대청소는 매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상사로 변했다. 이런 식으로 가정에서의 일은 그 강도와 빈도를 높여간다. 주부의 일손을 덜어준다던 가전기기의 덕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반찬가게가 열리고, 밥집이 늘어나고, 탁아소가 만들어지고, 빨래방이 생기면서 가정 바깥에서 가정사의 잔일들이 처리된다. 이것 역시 주부들의 일손을 덜어주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그것과는 정반대의 현상들을 가져온다. 이 시설들을 이용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이제부터 돈벌이의 역할은 남성만의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책임이 전가된다. 그래서 여성은 집밖으로 나가 돈을 벌어야 하지만 여성의 일은 한정이 된다. 여성의 일은 단순한 작업, 재택근무 가능한 사업으로 한정되지만 이것은 불안정고용이다. 이러한 단순노동의 임금이 올라가면 제1세계 여성의 일거리는 제3세계 여성들에게로 전환된다.

어슬러 휴즈는 ‘가사노동의 사회화’라는 용어로 이 현상을 설명한다. 주부들이 하던 많은 일들 즉 요리, 세탁, 간병, 육아, 교육 등의 일들은 상품으로 전환된다. 역사적으로 무보수였던 일 그 자체가 상품이 되는 동시에 그 일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각종 기기들을 상품으로 만들어낸다. 자본은 이처럼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 사회화과정 속에서 재생산을 위한 비용은 물론 생산을 위한 비용까지 부담하도록 강제한다. 그 결과 은행에서의 업무 중 상당부분은 고객이 처리하는 방식으로 전환되며, 여성은 노동자로서 창구업무에서 ‘짤리는’ 한편, 고객의 입장에서 그 일을 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소위 지식노동자로 포장되는 단순전산오퍼레이터의 대부분이 여성으로 전환된다. 이것은 일국적 현상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 현상으로, 인식의 지형 역시 변환된다. 사무직 노동자들에 대한 무관심은 점점 더 심화되며 결과적으로 ‘여성문제’는 갈수록 해명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새롭게 등장하는 계급 ‘싸이버타리아트’는 곧장 여성의 문제로 전환된다.

<싸이버타리아트>는 어슬러 휴즈가 197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중심으로 가사노동의 사회화와 관련된 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쳤던 일련의 연구 성과물을 한데 모은 책이다. 1970년대의 저술에서 보여지는 예측과 2000년대의 저술에서 보여지는 분석은 하나의 완결된 고리를 이룬다. 또한 이 책의 가치 중 하나는 저자 스스로의 경험에서 출발한 살아있는 현장의 감수성이 이론적 틀거리를 통해 제공됨으로써 독자에게 쉽게 전달된다는 점이다. 더불어 이 책의 글쓰기는 소위 ‘여성적 글쓰기’의 전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성의 이야기가 여성의 목소리로 전개되는 글을 도대체 얼마 만에 보게 된 것인지. 논문임에도 서술자가 ‘나’로 명확하게 지정됨으로써 남성적 권위로 포장된 다른 논문들과 달리 독자를 서술자의 위치로 승격시킨다.

<싸이버타리아트>는 섣부르게 해방의 방법론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노동계급의 일원으로서 여성’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는 것은 분명하다. 17대 국회에서 여성의원의 비율이 13%가 되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성의원의 비율이 두 자리 수를 차지했다는 것이 ‘기념비적 사건’이란다. 그러나 이 사건은 21세기 대한민국이 아직까지 성평등에 대한 인식이 ‘13%’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비적 사건’이기도 하다. 이 척박한 현실에서 <싸이버타리아트>는 충분히 일독할만한 가치를 가진다.

 

 

2004-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