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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인권 미디어] 한병철 『투명사회』{/}[정보인권 미디어] 단행본 『투명사회』

By 2015/05/05 4월 25th, 2018 No Comments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어린이집 보육실에 CCTV가 설치되어 모든 일거수 일투족이 만인 앞에 생중계되면 어린이집 폭력이 사라질까? 최근 널리 읽힌 <투명사회>의 핵심 메시지는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 이론에서 오랫동안 투명성은 권력에 대한 민의 통제를 실현하는 데 데 꼭 필요한 가치로 인정되어 왔다. 그리고 통상 우리는 진실에 가까이 가기 위하여 투명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저자는 역설적으로 더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이 있을수록 불명료함이 더욱 첨예화된다고 주장한다(27쪽). 오늘날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투명성은 가치로서의 투명성이 아니라 상품으로서 전시되기 위한 투명성, 어쩌면 절차에 국한되는 투명성이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에서 드러나는 내 일상의 투명성과 친구관계는 정말로 투명한 것인가?

투명사회는 신뢰가 구축되는 미래로 나아가는 사회가 아니라 통제사회이다. 전면적 커뮤니케이션과 전면적 네트워크화의 흐름 속에서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 튀는 견해를 밝히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매끈하게 다듬고 평준화하는 작용을 하여, 결국 획일화를 초래하고 이질성을 제거한다. 투명성은 순응에 대한 강압을 낳고 이로써 지배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다(6쪽). 투명한 사회가 획일화를 강제하는 것은 “타인에게서 이해되지 않는 바를 받아들이는 불투명한 평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19쪽).

투명성에는 공통의 단위가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그 기준은 돈이다. 인간마저 돈으로 평준화하여 시스템의 기능적 요소로 만든다. 그렇게 “더 이상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하나의 구조 속에 놓인 정보의 투명성과 외설성”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투명성은 폭력이다(16쪽).

인간의 영혼은 분명 타자의 시선을 받지 않은 채 자기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오늘날 ‘포스트프라이버시’ 시대는 투명성의 이름으로 사적 영역의 완전한 포기를 요구하며, 이를 통해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는 특히 정치적 시민성에 영향을 미친다. 사유와 영감은 ‘어떤 빈자리’(20쪽)을 필요로 하는데, 모든 것이 즉각 공개되는 사회에서 정치는 호흡이 짧고 즉흥적이 된다. 미래지향적인 비전은 희소해진다(6쪽).

물론 저자는 투명성의 이데올로기가 긍정적인 핵심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한다(8쪽). 문제는 투명성이 신화화되고 절대화되어 전제적 지배자가 될 때 위험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투명성을 부패와 정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사람이 그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투명사회는 우리 스스로 불러온 감옥이다.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려는 강박이 통제로 이어진다는 저자의 통찰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투명성은 모두에게 같지 않다는 것이다. 세월호의 진실을 감추려는 이들과 그것을 밝히고자 하는 이들 사이에는 명백히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있다. 집회에 나오는 시민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CCTV로 투명하게 드러나지만 CCTV 관제센터에서 그것을 누가, 왜, 어떻게 주시하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시민들의 휴대전화 속 대화내용은 낱낱이 까발려지지만 그것을 엿보는 이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사항이 비밀이다. 불투명한 권력은 무책임으로 이어지고 사회 전체적으로 불신과 음모론이 횡행하게 된다. 시민들은 아무도 믿지 못하여 서로를 감시하게 되었지만, 권력은 점점더 불투명해지고 있다. 이렇게 병들어 가는 민주주의를 바로세우기 위해 우리에게는 투명성의 가치 해체가 아니라 권력에 대해 아직 더 많은 투명성을 요구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by 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