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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통신비밀은 없다. 도청 공화국

By 2004/03/08 10월 29th, 2016 No Comments

정책제언

이상기

93년 5월 한겨레신문 기자인 필자가 국방부를 출입할 때의 일이다. 문민정부 첫해인 당시, 국방부는 군 인사비리 사건 수사로 온통 정신이 없었다. 청와대의 강력한 군부 사정의지에 맞물려 신문 방송에 기사 한 줄 나가면 군인들이 군복을 벗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억울하게 당하는 군인들도 나타났다. 해병대 이 아무개 장군이 그런 케이스였다.

누군가 통화내역을 엿듣고 있다는 공포
전임 사령관이 구속되면서 청렴한 편에 속하던 그를, 자신에게 뇌물을 준 장본인이라고 지목했다. 이 장군은 그길로 구속됐다. 해병대 젊은 장교들은 “앓던 이 놔두고 생니 뽑았다”며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그리곤 이에 항의하는 연판장이 돌았다. 집단행동을 금지하는 군 내부 규율을 잘 아는 그들로서는 군복 벗을 각오를 하고 감행한 일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며 한 장교가 필자를 찾아왔다. “이 기자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지금 연판장 서명이 마무리 단계입니다. 꼭 도와주십시오.” 그 장교는 덧붙였다. “사전에 알려지면 우리는 모두 군복을 벗는 것은 물론 이 장군님 구명도 허사로 돌아갑니다.”

이틀 뒤 밤 늦은 시간, 아파트 아래층집 아주머니가 놀란 얼굴로 필자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누가 급히 자기 집으로 전화해 필자를 바꿔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장교였다. 그는 필자집 전화가 도청될 것을 염려해 아래층집 전화번호를 파악해 놓았다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가 내게 한 말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군대 전화에는 ‘당신의 통화는 적이 엿듣고 있습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은 솔직히 기무사가 들을까봐 겁을 냅니다.” 그 뒤에도 그 장교는 몇 차례 더 부인을 시켜 아랫집으로 전화했던 기억이 새롭다.

퇴행하는 통신비밀보호
최근 국가정보원과 국군기무사가 기자들의 통화내역을 조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새삼 10년 전 사건이 떠올랐다. 그동안 사회 각 분야는 눈에 띄게 달라졌는데, 개인의 사생활보호와 관련된 분야는 제자리거나 되레 뒷걸음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새 정부 들어 국가정보원과 수사기관들의 감청과 통화내역 조회가 급증했다. 누가 누구에게 언제 어디서 얼마 동안 통화했는지 알 수 있는 게 통화내역 조회다. 정보통신부에 따르면 2003년 16만7041건의 통화내역이 수사기관의 손에 넘겨졌다. 하루평균 457건. 또 전년도 12만2541건보다 36.3% 증가한 수치다. 통화를 직접 듣거나 음성 및 문자메시지와 이메일을 열어보는 감청은 작년 1696건으로, 전년도(1528건)보다 11% 늘었다.

이쯤 되면 ‘상대방과 나 이외 아무도 모를 것’이란 생각은 바보들 몫일 뿐이다. 정부 기관의 통화내역 조회가 반드시 불법이거나 부도덕한 것은 아니다. 수사를 위해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는 경우도 많다. 또 이를 위해 통화내역 조회나 전화 또는 이메일 감청을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를 악용하는데 있다. 수사목적 이외에 이를 활용하는 것이다.

불법적으로 활용되는 통신내역들
작년 10월 대검찰청이 수사검사와 출입기자들의 통화내역을 조사한 사실이 밝혀져 기자들의 반발과 함께 검찰총장이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검찰은 수사중인 사건이 공식발표 이전에 언론에 자꾸 보도되자 기자들 통화내역을 조회했던 것이다. 누가 언론에 흘려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올초 청와대 외교부 그리고 국정원 등 우리나라 유수의 권력기관을 연일 뒤흔든 <국민일보> 정치부 조수진 기자 휴대폰 통화내역 조회 사건 역시 당국의 ‘부적절한’ 처사였음이 드러났다.

사건 얼마 뒤 국정원은 조 기자의 휴대폰 통화내역을 조회한 사실을 ‘자백’했다. 기자의 통화내역 조회는 청와대의 의뢰에 따라 이뤄졌기에 국정원이 ‘있는 그대로’ 털어놨을 것이란 관측을 낳았다. 당시 국정원은 조 기자 통화내역조회가 통신비밀보호법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이뤄졌다고 밝혔지만, 누가 봐도 법조문을 자의적으로 확대해석 했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다.

통신비밀보호법 제8조는 법원의 허가 없이도 통신제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긴급통신제한조치’를 규정하고 있다. 즉 ‘검사, 사법경찰과 또는 정보수사기관의 장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음모행위, 직접적인 사망이나 심각한 상해의 위험을 야기할 수 있는 범죄 또는 조직범죄 등 중대한 범죄의 계획이나 실행 등 긴박한 상황에 있고 일정한 요건을 구비한 자에 대해 법원의 허가 없이 통신제한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36시간 이내에 법원의 허가를 받지 못한 때에는 즉시 이를 중지하도록’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을 적용해보려고 실험이라도 하듯 <국민일보> 1월6일자에 ‘외교부-NSC 사사건건 충돌’이란 기사가 실리자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국가정보원과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보안사고 여부를 의뢰했다. 이에 국정원은 통신비밀보호법을 적용해 취재기자의 통화내역을 조회한 뒤 해당기사가 보안사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통보했다. 그러면 당시 청와대와 정보당국은 왜 조 기자의 통화내역을 조회했을까? 무엇보다 취재원을 찾아내기 위해 그랬을 것이라는 데 답이 모여진다.

실제 당시 조 기자와 통화한 공무원들은 곧바로 민정수석실의 조사를 받은 것으로 드러나 이런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물론 통화내역 조회를 통해서 모든 취재원이 밝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가 취재원 특히 공직자인 경우에는 기자접촉을 금하거나 제한하는 효과가 톡톡히 있을 것이란 예상이 어렵지 않다.

통화내역 조회, 쉽고 편안한 유혹
지난 1월 <국민일보> 기자 통화내역 조회로 홍역을 치른 이후 공무원 사회에선 갖가지 진풍경이 나오고 있다. 기자 전화를 받으면 “나중에 전화하라”며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밤에 공중전화로 통화하거나, 타인 명의로 휴대전화를 별도로 마련하는 일까지 생겨나고 있다.

한 기자는 “기자의 통화내역 조회는 언론자유 침해가 아니라 언론의 기본책무를 방해하는 행위”라며, “정부가 앞장서 정보사회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분개했다.

국정원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으로서는 당장 간편한 수사수단인 감청과 통화내역 조회에 대한 유혹을 견디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인권침해 문제를 불러와 국민과 정부 사이에 불신만 가져오게 된다. 더 늦기 전에 정부 스스로 통화내역을 조회할 때에는 감청때와 마찬가지로 법원의 허가를 받도록 해 남용소지를 원천 봉쇄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기자들에게 있어서 취재원의 제보는 생명줄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통신의 비밀을 최대한 보장하고 부득이 한 경우 영장을 지참하도록 통신비밀보호법을 개정하는 것은 국민의 알권리에 대한 보장과 다른 말이 아니다.

 

 

 

2004-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