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네트워커

축적구조와 공황

By 2004/02/20 10월 29th, 2016 No Comments

심층연재

강남훈

자본
자본주의는 자본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는 경제체제를 말한다. 그렇다면 자본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가 관건이 된다.

주류 경제학에서 자본에 대한 정의는 매우 불만족스럽다. 자본은 흔히 생산된 생산수단이라고 정의된다. 생산된 생산수단이란 생산에 필요한 수단 중에서 도구나 기계처럼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이렇게 자본을 정의하면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시대가 다 자본주의가 된다. 인간은 구석기 시대부터 돌을 깎아서 만든 생산수단을 사용하여 왔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에서는 자본을 운동으로 정의한다. 자본의 운동을 하는 것이 자본이다. 자본의 운동이란 일정한 액수의 돈을 가지고 운동을 시작해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는 운동을 말한다. 이렇게 정의를 하면 무엇이 자본이고 무엇이 자본이 아닌지 분명해진다. 소비를 목적으로 가지고 있는 돈은 자본이 아니고 돈을 벌 목적으로 가지고 있는 돈은 자본이다. 공장에 있는 망치와 우리 집에 있는 망치는 모두 생산된 생산수단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공장에 있는 망치는 자본이고 우리 집에 있는 망치는 자본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운동으로 자본을 정의하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압도적으로 자본의 운동에 의해서 조직된 사회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자본축적
이러한 자본의 운동에서 처음에 투자한 돈과 나중에 벌어들인 돈의 차이를 바로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따라서 자본의 운동은 잉여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운동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의 운동은 한 번에 그치지 않는다. 벌어들인 돈으로 재투자해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여야 한다. 이와 같이 잉여가치를 재투자해서 자본을 확대시키는 것을 자본축적이라고 부른다. 자본축적으로 인해서 자본의 규모는 끝없이 확대되어 왔다. 인간의 식욕에는 위장의 크기라는 한계가 있지만, 자본의 축적에는 아무런 한계가 없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요, 율법이다.”<자본론> 이렇게 보면 자본은 의학에서 말하는 암세포와 비슷하다.

암세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증식시키는 운동을 한다. 자본도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식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다. 암세포의 운동이 억제되지 않으면 암세포가 기생해서 살고 있는 생명체를 파괴하고 결국 자기도 죽게 되어버린다. 자본의 운동도 적절하게 조절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자본주의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잉여가치 생산의 조건
그러나 자본축적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본의 운동을 시장에 맡겨 놓으면 저절로 잘 돌아갈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최근에 확산된 것으로서 사실과는 매우 다른 측면이 있다.(이 문제는 네 번째 글에서 살펴볼 것이다) 자본축적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려면 많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이 조건들은 크게 잉여가치 생산의 조건과 잉여가치 실현의 조건으로 나눌 수 있다.

잉여가치 생산의 조건이란 잉여가치가 제대로 생산되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잉여가치는 잉여노동에서 나오기 때문에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수가 늘어나든지 노동시간이 늘어나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의 수는 자본의 규모만큼 그렇게 빨리 늘어날 수 없다. 한 가지 극단적 계산을 해보자. 빌 게이츠가 500억불 정도의 자본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그 자본으로 1년에 20% 정도의 잉여가치(이윤)를 벌어들인다고 하면, 1년 동안 100억불의 잉여가치가 생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도 사람 10억 명이 1년 동안 생산한 부가가치는 4,000억불 정도가 된다. 이 중의 절반이 필요노동이고 절반이 잉여노동이라고 가정하면, 1인당 200불씩의 잉여가치를 생산한 셈이 된다. 그러니까 100억불의 잉여가치를 생산하려면 5,000만명의 인도 사람들이 1년 동안 꼬박 일하는 것이 필요한 셈이다. 단지 한 사람의 자본을 위해서!

자본축적은 더 이상 잉여가치를 생산할 노동자가 없어지면 멈추게 된다. 그러나 지구상에 존재하는 노동자들을 다 고용하기 훨씬 이전에 자본축적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자본축적이 진행되어 실업자가 줄어들면 노동자들의 경제적, 정치적 입장이 유리해져서 임금을 올려달라거나 노동시간을 줄여달라고 요구하게 되는 문제이다.
따라서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하여 자본은 노동력을 상대적으로 작게 쓰는 방법으로 축적을 하게 된다. 노동력을 상대적으로 작게 쓴다는 말은, 노동력 대신에 기계를 더 많이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에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진다고 정의한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자원이나 에너지를 절약하는 기술진보도 상당히 많지만, 노동력을 절약하는 기술진보가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유기적 구성을 높이는 기술진보는 노동력의 제약이라는 한계를 돌파하면서 자본축적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그러나 이 방법도 또 다른 한계에 부딪친다. 노동력이 전체 자본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지면, 생산될 수 있는 잉여가치도 상대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잉여가치와 자본 사이의 비율도 떨어지게 된다. 잉여가치와 자본 사이의 비율이 바로 이윤율이기 때문에, 이윤율은 점점 저하하는 경향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이윤율은 자본축적이라는 자본운동의 목표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이다. 이윤율이 낮아지면 자본축적은 정체하게 된다.

잉여가치 실현의 조건
자본축적의 두 번째 조건은 잉여가치 실현의 조건이다. 노동자들이 아무리 많이 잉여노동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시장에서 팔리지 않으면 그것은 화폐로 바뀌지 않는다. 자본운동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돈이 늘어나야 한다.

물건이 팔리기 위해서는 수요가 있어야 한다. 수요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소비와 투자로 구성된다. 여기서 투자는 자본축적을 위해서 새로운 기계나 설비를 구매하는 행위이다.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소득의 대부분을 소비하지만, 자본가들의 경우에는 소득 중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어진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소득을 줄이고 자본가들의 소득을 늘리면 경제 전체의 수요는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투자는 호황이 닥치거나 정보혁명처럼 새로운 기술혁신이 집단적으로 출현할 때에는 지나치게 확대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흔히 과잉축적 경향이라고 부른다. 1990년대의 신경제 호황이 2001년부터 거품이 꺼지면서 붕괴되었던 경험을 생각해 보면 좋다. 투자는 생산능력을 늘리기 때문에 호황말기에 잉여가치 실현의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소득을 늘리거나 해외시장이나 비자본주의적 부문에서 수요를 확보하는 것이 보다 안정적 방법일 수 있다.

축적구조
위와 같은 잉여가치 생산의 문제와 잉여가치 실현의 조건은 시장에서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본축적의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적절한 기술적, 경제적, 정치적, 법률적, 문화적 제도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러한 제도들을 축적구조라고 불러보자.

자본주의는 발전 단계에 따라서 상당히 다른 축적구조를 형성하여 왔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기계가 처음 출현하였을 때에는 노동시간을 늘려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방법이 주로 이용되었다. 당시에는 어린아이들을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노동시키는 것이 합법적이었다. 즉, 기계라는 기술과, 잉여가치의 생산방법, 공장을 규제하는 법률 등이 서로 잘 맛물려 있었던 것이다. 소위 자본주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2차 대전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는 대량생산 기술이 출현하고,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조합이 보호되고,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생산성이 향상된 만큼 증가하고, 상대적 방법으로 잉여가치를 생산하며, 성인 노동자가 하루 8시간 노동을 하고, 여러 가지 복지제도가 확대되는 방식의 축적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축적구조의 변화
정보혁명은 1970년대부터 축적구조를 상당히 변화시켜 왔다. 이러한 변화가 1990년대에 가속화되면서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결합하게 되어 오늘날의 축적구조를 탄생시킨 것이다.

정보혁명으로 인하여 생산방법이 상당히 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유연 네트워크 생산이라고 불러보자. 유연하다는 것은 수요에 맞추어 다품종을 생산한다는 뜻이고, 네트워크라는 것은 제품의 주요 공정이 하나의 공장이 아니라 지역적으로 분산된 여러 공장이나 별도의 독립적 기업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전의 글에서 예로 든 나이키의 하청 생산을 생각해보면 좋다. 수요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여러 공장들 사이의 작업을 조정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정보기슬의 발달이 필수적이다. 최근 ERP, 노동자 감시 등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생산방법의 변화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계급 구성과 재생산 방식이 변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지식노동자와 보통노동자로 확연하게 구분되고, 임금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 CEO를 노동자라고 할 수는 어렵겠지만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보자. 1980년 미국에서 CEO들의 보수는 노동자들 임금의 42배였다. 1990년에는 84배였고, 1999년에는 475배로 증가하였다. GE의 CEO인 잭 웰치(Jack Welch)는 1999년에 보수와 스톡옵션을 합해서 모두 5억 7,750만 달러를 벌었다. 이것은 보수와 스톡옵션을 행사한 부분만 계산하더라도 노동자 15,000명의 임금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이러한 임금격차 이외에도 이제는 임시직 노동자들의 비중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고, 정규직 노동자라고 할지라도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저임금 경쟁에 시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복지 제도가 축소되면서, 연금을 주식에 투자한다든지 스톡옵션이나 우리 사주 등의 형태로 임금을 지급하여 노동자들의 삶이 주식 시장의 풍파에 직접적으로 노출되게 되었다.

정보혁명으로 인하여 과거의 축적구조와 비교하여 독점이윤이나 지대 같은 형태로 잉여가치를 흡수하는 부분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전의 글에서 이미 설명한 바가 있다. 독점이윤은 다른 사람의 소득을 이전 받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소득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지대는 쓸데없는 것에 대하여 가치를 지불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본들은 기생적 자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생물학에서 기생은 스스로 영양분을 생산하지 못하고 숙주로부터 영양분을 빼앗아 오면서 숙주를 약하게 만들고 괴롭히지만, 숙주를 금방 죽이지는 않고, 오히려 숙주가 죽으면 대개는 자기도 죽게 되는 관계를 말한다. 독점이윤이나 지대를 많이 획득하려면 다른 자본이 잉여가치를 많이 생산하여야 한다. 따라서 잉여가치 생산의 부담이 다른 자본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잉여가치 생산의 부담을 떠맡게 된 자본이 세계적으로 가장 싼 임금을 찾아서 네트워크 형태로 생산하는 방법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세계화의 한 가지 동인이다.
금융적 형태로 잉여가치를 흡수하는 부분도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금융자본도 다른 자본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이전 받기 때문에 기생적 측면이 있지만, 다른 자본의 잉여가치 생산을 도와주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공생적 측면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번의 글에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공황
정보혁명은 과연 공황을 사라지게 만들었는가? 1990년대 미국에서 소위 신경제가 한창이었을 때 정보혁명으로 인해서 자본주의 경제에서 공황이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 신경제 찬양론자들이 있었다(<비즈니스위크>지). 이러한 사람들의 주장은 2001년부터 신경제 거품이 꺼지면서 공황(불황)이 시작되자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정보혁명으로 인해서 왜 공황이 사라지지 않는가? 그것은 정보혁명이 잉여가치 생산의 조건과 잉여가치 실현의 조건이라는 자본축적의 기본적 조건들을 바꾼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너무 많이 흡수하면 임금이 상승하여 이윤율이 떨어지고 너무 많이 축출하면 잉여가치가 모자라서 이윤율이 떨어지게 된다. 노동자를 너무 많이 흡수하면 잉여가치 실현의 조건은 완화되지만 잉여가치율이 떨어지게 되고, 구조조정 등의 방법으로 노동자를 너무 많이 방출하면 이윤율은 일시적으로 회복될 수 있지만 잉여가치 실현이 어려워진다. 정보혁명으로 잉여가치 생산의 필요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 부담이 네트워크 형태로 지구 전체로 확산된 것이다. 정보혁명으로 잉여가치 실현의 부담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실질임금을 깎아서 국내에서 잉여가치를 실현시키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그 부담이 세계시장으로 확산된 것이다. 정보혁명은 세계적 축적구조를 안에서 잉여가치 생산의 조건과 실현의 조건을 잠정적으로 회복시켜갈 수 있겠지만, 그것은 문제를 세계적 차원으로 연기시킨 것일 뿐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2004-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