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네트워커

10대들을 위주로 형성되고 있는 인터넷 소설…문학성 이전에 배경에 주목하라{/}인터넷 소설? 어떤데?

By 2004/02/20 10월 29th, 2016 No Comments

좌담

김창균

이용욱(이하 욱) : 작년 한해동안 ‘인터넷 소설’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라고 말한다. 그 예로 ‘귀여니’라는 스타 작가의 탄생과 <옥탑방 고양이>, <내사랑 싸가지>가 인터넷에서 인기를 얻어 드라마나 영화화됐다는 점을 든다. 이런 작품들이 하나의 대중문학 아이콘으로 떠오르면서 인터넷 속에서의 문학 행위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게 사실이다. 사이버 문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상당히 긍정적이라고 본다. 다만 문제는 언론들에 의해 너무 부풀려진 경향이 있고, 가벼운 쪽으로만 간다는 점이다. 한국의 사이버 문학은 결과물로 얘기하기보다는 과정에 포커스를 맞춰 접근해야한다. 그런데 과정은 무시하고, 몇 작품들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니까 일종의 거품이 있다.

인터넷 소설, 가벼워! 너무 가벼워!!

이우혁(이하 혁) : 일간지에서 뭔가 하려고 했는데 완전히 ‘찌라시’식이었다.
인터넷 소설은 검증 받지 않은 상태에서 ‘대중과의 접촉만으로 인정받은’ 정도다. 덕분에 글쓰는 사람의 저변확대에는 도움이 됐지만, 문제는 국민학교 6학년이 열 줄도 안 되는 글을 써놓고. ‘내 작품이 어쩌니 저쩌니’하고 ‘작가로써의 입지가 어떠니’하는 소리부터 쓴다는 거다. 너무 글쓰기가 가볍게 된 경향이 있다. 사실 인터넷 소설만이 아니라 TV드라마도 그렇고, 거의 환타지에 가까운 황당한 스토리가 인기를 끌고 상호간에 묘한 시너지 효과를 낸다. 인터넷이 너무 급속하게 퍼져서 사람들이 인터넷을 성숙하게 사용하기보다는, 지금 시행착오를 거치고 있다. 인터넷이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터넷 소설만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충돌로 나오고 있다. 문학에서는 그 대표적 예로 나온 것이 ‘귀여니’라고 본다. 인터넷 소설을 얘기하더라도 현재까지 이런 양태 속에 빠져 있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극복하고 이걸 찾는 방향을 얘기했으면 좋겠다.

욱 : 아직은 인터넷 공간이 제대로 된 문학을 만들어 내기에는 이르다는 말인가.

혁 : 인터넷에서는 ‘대중검증만 받으면 된다’로 바뀌고 있고, 잘못된 점은 ‘수만 많으면 된다’로 착각한다는 거다. 그 예로 귀여니 소설 자체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말없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라는 부분에는 반대다. 인터넷이 있고 인터넷에서 뭔가 툴(tool)을 사용하니까 인터넷 소설이 아니냐하는데, 현재까지는 인터넷의 개별성을 가진 문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만들려고 혈안이 된 것 같다. 지금 인터넷 소설은 외계어체 쓰고, 이모티콘 쓰고 하니까 꼭 인터넷 채팅을 보는 것 같다. 나도 통신으로 등단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면 결국 유머와 다를 것이 뭐냐. 지금 인터넷의 유머나 만담, 일화랑 뭐가 다르냐는 거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소설이랑 경계가 없어진다.

욱 : 한국사이버문학의 발전과정을 3세대로 나눈다면, 1세대가 이우혁씨가 활동했던 초창기 PC통신세대고 문자가 더 익숙한 문자세대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통신이라는 도스환경의 문자 중심 공간이었다. 이우혁씨는 소재적 측면에서는 변별력을 갖지만 어쨌든 문학이었다. 문학적 상상력을 말하는 것이다. 2세대는 97년 이후 이영도를 중심으로 한 환타지다. 이영도씨는 70년대 생들이 갖고 있던 일본의 환타지나 애니매이션같은 상상력이 갖고 있는 대중문학 코드에 대한 접근점을 제대로 짚어냈다. 그래도 이영도씨가 문자를 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우혁씨랑 비슷하다. 그리고 작년에 나왔던 인터넷 소설이 3세대가 되는데, 이 친구들은 처음부터 인터넷을 접한 세대다. 귀여니 또래의 10대 인터넷 작가라고 하는 아이들은 통신이 일상이고, 자체고, 여기서 행해지는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다. 귀여니도 ‘이 정도 글은 나도 쓸 수 있겠다’, ‘나도 한번 써 볼까’는 식이다. 결국 작가의 의식이 아니라 독자의 의식을 더 많이 갖고 있다. 인터넷에서 글을 썼다가 재미없거나 반응이 없으면 지우면 되고, 거기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십대 애들한테 글쓰기를 훨씬 더 자연스럽게 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것이 문학이나 작가에 대한 진지한 자의식을 형성하게는 못하게 된 이유다.

혁 : 솔직히 십대 인터넷 소설은 내버려두고 싶다. 책을 만들어서 팔든 말든 사람들이 좋아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막고 싶은 것은 그런 소설이 공인되는 것이다. 문학적으로나 새로운 시도나 그런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요소가 있으면 내가 먼저 기뻐했을텐데, 그거 아니고 장난수준이다.

욱 : 그러니까 지금 십대아이들의 접근방식이라는 거죠. 재미이고 유희적 수준의… 그것에 일정한 책임은 기성세대가 져야한다. 인터넷상의 문학판에 끼여들지 않거나 관망하거나 “내가 놀 공간이 아니야”하고 방치하면 이 공간은 자생력이 생겨서 이런 문학들이 발생한다.

인터넷 소설은 문학이 아니라 문화상품

욱 : 인터넷 소설의 가장 큰 핵심은 작가가 아니라 작가들을 만들어낸 사람들, 이우혁님이 말씀하신 대중들이다. 대중들이 왜 점차로 어렵고, 무겁고, 진지한 문제의식의 작품들을 읽지 않고, 가볍고 유희적이고… 문학이라기보다는 문화 쪽에 훨씬 더 가까운 그런 작품들에 관심을 쏟느냐하는 거다. 단지 인터넷의 흥망성쇠나 귀여니 작품이 갖고 있는 스타 아이콘성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의 ‘한국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해 나갈 것이냐’다. 이제 인터넷 소설의 현상에 대해서 좀 더 차분하게. 감정적이거나, 문학이냐 문학이 아니냐는 이분법적인 논리가 아니라, 대중의 변화하는 문학적 취향에 접근을 해야 된다. 인터넷 소설의 주체가 됐던 십대들이 언제까지 십대로 머물지 않는다. 십대 때 가장 재미있고 감동 있게 읽은 게 뭐냐고 하면 귀여니 소설을 생각하는 아이들이 20대가 되고 30대가 돼서 실제로 현실 문학판에 들어가 글을 쓴다고 했을 때, 지금 현재의 한국문학과는 다른 식의 것이 그려지지 않겠는가.

혁 : 귀여니 소설이 대단한 베스트셀러나 되는 것처럼 언론에서 뻥튀기하고 있다.

욱 : 어떤 평론가가 귀여니 소설이 팔리는 것의 문화적 의미는 ‘십대들이 지갑을 열어서 책을 산다는 데 있다’고 하더라. 또 한 가지는 귀여니의 홈페이지에 가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작권을 놓고 생각해 보면, 만약 종이로 책을 내면 홈페이지에 글을 지워버리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저작권이다. 그런데 귀여니 소설은 여전히 홈페이지에 남아있다. 그게 뭐냐하면 책으로 안 사도 되고, 굳이 돈을 주고 책을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귀여니의 책을 샀다. 귀여니의 책을 샀다는 것은 이제 아이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수의 시디를 사듯이, 일종의 문학도 대중의 상품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얘기다. 20만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샀느냐는 것은 생각했을 때, 우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혁 : 그점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나는 반대다. 책을 산 아이들은 그것을 책으로 생각하고 산 것이 아니라, 문화상품으로 산거다. 일종의 장난감으로 사고, 장식용 액세서리로 사는 거지 절대로 책으로 사는 게 아니다. 십대들이 지갑을 열어서 책을 구매했다는 걸 기뻐해서 책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해 주면 쉽게 말해서 뒤통수 맞는다.

욱 : 그걸 논리적으로 비약시켜 보면, ‘앞으로 문학이 그렇게 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상품으로…

혁 : 물론 상품이다. 상품이지만 아이콘화 되기에는 문학은 그것보다는 깊다. 더 깊다. 전반적으로 책의 판매량이 반으로 줄었다. 이런 상황에 뭔가 팔리는 책이 있으니까 거기에 주목하고 현상학적으로 무엇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제도권이나 언론은 굉장히 힘든 면이 있어서 잘못 때리면 계속 그 논조를 유지해나가려고 한다. 그렇게 볼 때 굉장히 위험하다.

문학이 가벼워졌다, 그럼 수준은?

욱 : 작년에 평론가들이 꼽은 좋은 작품들이 있었는데, 본격문학 쪽에서 나왔던 기대할 만한 작품들이라고 해서 세 편을 읽었다. 국문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책들은 3-4년 전만 해도 문학이라고 생각도 안 했을 거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귀여니 소설에만 문학적 수준이 없다고 얘기할 게 아니라 한국문학이 전반적으로 가벼워지고 있다는 거다.

혁 : 본격문학으로 볼 때 나도 아직 수준미달이다(웃음).

욱 : 근대문학이라고 하면 세르반테스 <돈키호테>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얘기한다. 그런데 읽어보면 성적으로 웃긴 얘기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고, 그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중세 로망스의 장르를 희화나 극화시킨 것인데, 거기서부터 근대문학이 출발했다고 본다. 그 당시 새로 등장한 부르주아지들의 삶이 담겨 있고, 그들이 바라보는 시각이 녹아 있기 때문에 그 시각으로부터 ‘노블(소설)’이라는 장르가 만들어졌다. 그 점에서 생각하면, 최근에 문학이 가볍고 수준 떨어지는 것이 마치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것에서의 문학적인 양상들-세르반테스나 보카치오의 과도기적인 양상들로써 최근의 한국문학을 이해해야 하지 않겠나. 인터넷도 아직 과도기다. 들끓고 있는 수준에 불과하고 이게 어느 정도 가라앉은 다음의 한국문학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문학과는 조금 다른 것으로 펼쳐질지 않을까 생각한다.

혁 : 조금 달라질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세르반테스나 보카치오는 사회의식 전반을 가지고 있었다. <데카메론>도 중세의 폐쇄적인 사회에서 터부시되어 왔던 얘기들을 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던 욕구였다. <돈키호테>도 중세에 신물을 느끼고 있을 때 나왔다. 그런데 현재 인터넷상에서 나와야 된다고 하는데, 지금 나올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인터넷 폐인이나 몇 명의 세계를 가지고 문학 세계를 주류로 바꾸는 것 같다고 보는 건 침소봉대 하는 것 밖에 안 된다.

욱 : 십대 인터넷 소설 <내사랑 싸가지>, <그놈은 멋있었다>는 장르로 보면 학원 명랑물 정도로 생각된다. 70년대에도 있었다. <얄개>류나 <꺼구리 장다리>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똑같은 학원물인데 70년대는 어른들이 바라보는 10대 이야기지만, 요즘 나오는 십대 이야기에는 어른이 없다.

혁 : ‘할리퀸’의 빈자리를 메우는 거라고 생각한다. 최초로 사이버문학이라고 할만한 시도가 있었는데, 예전에 하이텔에서 공식적으로 한 것이 있다. 하재봉씨랑 이성주씨랑 채팅방에서 글을 썼었다. 세 명이 동시에 들어와서 아무 때나 치고 들어온다. 그렇게 잘 된 작품은 아니었지만 이런 시도들이 있어야 사이버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다. 개인적으로 버전 업된 인터넷 소설을 구상하고 있는데, 이건 출간할 수가 없다. 인터넷에만 볼 수 있고, 작품 출간은 하지도 못하고, 인터넷을 못하면 읽을 수도 없는, 아주 묘한 방식이다. 작품을 읽는(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형태다.

진정 인터넷 소설다운 소설이 필요하다!

욱 : 제가 10년 동안 기다렸던 인터넷 소설이 그런 거다. 한국문예진흥원에서 매년 문예연감을 내는데, 올해 처음으로 사이버 문학이라는 꼭지를 넣겠다고 청탁이 왔다. 담당자 말이 ‘요새 인터넷 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지 않느냐’고 하더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뭔가 새로운 문학적 움직임이 있는 거구나라고 생각하고 문예연감에서 다뤄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혁 : 대중문학이라고 해서 대중평가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검증내지는 비평을 받아야 한다. 하다 못해 포르노 배우도 연기를 잘 하냐 못 하냐라는 말을 하는데 말이다. 현상에 겁을 먹으면 안 된다. 사람들이 우루루 몰리는 것, 예를 들면 책이 왕창 팔린 경우도 많다. <올인> 같은 경우 도박신드롬을 가지고 문학적으로 평가해야되나. 그런데 이번은 ‘인터넷에서 했다’는 것뿐이다.

욱 : 출판사들의 생존전략으로써 스타작가들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건 아닌가

혁 : 그런 시도는 옛날부터 있었다. 운동권시절에는 ‘운동권 중에 누가 감옥가면 된다’고 했고, 마광수씨 시대에는 ‘야한 것 써서 감옥갔다 오면 출판사는 산다’고 공공연하게 돌았던 얘기다. 하지만 뒤걸음질 치다 쥐 잡는 식이다. 요새 만드는 것은 누드다. 처음에는 ‘와’ 하고 왔다가 벌써 휘청거린다.

욱 : 이렇게 문학이 역사로부터, 진지한 주제로부터 벗어나서 궁극적으로 한국문학이 잘게 쪼개져서 매니아문학, 동호회문학 쪽으로 가고 있는 것 아니냐. 귀여니 문학도 팬클럽 문학으로 우리 문학이 쪼개지고 분열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 과도기로 이해하면 된다. 물론 귀여니라는 아이콘의 거품이 만들어졌다는 혐의는 지울 수 없다. 이슈를 만들고 싶어하는 제도권 언론과 책을 팔기 위한 전략을 가진 출판사인데, 이것이 하나로 영합돼서 귀여니라는 돌출된 아이콘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로 정리된다.

혁 : 아무튼 때가 잘 맞았다. 현재 제도권문학은 순수문학이 아니면 문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순수문학이 있고 대중문학이 따로 있다고 인정하면 된다. 순수문학 아니면 다 문학이 아니라고 너무 배타적으로 나오니까, 나머지는 다 똑같은 것이 된다. 그래서 혼란이 오고, 아수라장이 된다. 난 신대중문학이라는 걸 하고 싶다.

인터넷을 통해 독자들을 만나자!

욱 : 신대중문학 얘기했는데, 70년대 문학은 신문연재문학이 주를 이루었다. 최인호씨 같은 경우 신문에 연재하는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하지만 요즘은 신문 연재소설을 안 본다. 70년대는 대중들과 만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지면이 신문이었고, 그래서 신문문학이 발달한 것이고, 지금은 인터넷게시판에 대중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데 왜 시도를 안 하느냐. 저작권이 걸리고, 돈이 안되니까, 쉽게 말하면 작가들에게 인터넷에 글 좀 연재해봐라 하면 안한다.

혁 : 먹고살기 힘들다. 나 같은 사람은 먹고 살수는 있다. 대부분 글쓰는 사람들의 생활이 어떤지 아나. 어느 정도 지명도를 획득한 사람들은 인터넷에 올리나, 올리고 책으로 내나 판매부수는 똑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쪼들리는 지명도가 없는 사람들은 안 된다. 결국 진짜 사이버성이 있는 문학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사이버 문학이라고 하면 출판이 안되고 기존의 출판과 관계가 없어야 ‘사이버 문학’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출판을 해도 똑같고, 상관없는 작품성을 가지고 있으면 그건 사이버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

욱 : 개인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문학 사이트에 ‘웹아트’라는 꼭지가 있다. 외국을 돌아다니며 웹아트를 소개하는 꼭지인데, 예를 들면 보리에스의 소설을 써놓고 이 중에서 작가가 자기가 원하는 문장을 떼어내서 새로운 소설을 만들어내는 방식같은 거 말이다. 언뜻 보면 메타픽션계열이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든지. 다른 예로 ‘맥도날드’라는 작품도 있다. 맥도날드라는 영어가 계속 뜨면서 맥도날드와 관련된, 미국의 패권을 상징하는 시들이 맥도날드의 이미지들과 계속 돌아간다. 인터넷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형식이다.

혁 : 그렇다면 플래시다.

욱 : 플래시인데, 이것인 가지고 있는 장점은 상호작용이다. 내가 눌러야지 대답해준다는 거다. 어떻게 보면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플래시라는 것을 이용하는 거다. 이런 식의 문학도 가능하다. 게임 같은 문학! 내가 주인공이 돼서 서사를 만들어 가는 거다. 버전 업 해가면서.

혁 : 따라하기도 힘들고 따라할 수도 없고, 사이버문학은 사이버 공간에서의 상호작용하는 활동이 중요하다. 사람의 활동 자체를 소설로 봐야 된다. 나름대로 구상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상호작용에 의해서 서핑을 하면서 구문을 찾는 거다. 찾는 과정을 박스에 입력하면 그 박스에서 결과물을 내준다. 총괄편이 나오면서 프로그램은 자폭되고 결과물만 남고 그걸 다시 하려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욱 : 우리나라에도 빨리 천재적인 사이버 작가가 나와야 된다. 작가하나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이 정착됐듯이, 천재적인 작가가 나와서 사이버 문학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나라의 영화가 50% 넘은 이유가 ‘쉬리’ 이후로 하나의 물줄기를 튼 것인데, 사이버 문학도 그렇게 가야 된다.

혁 : 나오기 힘들다는 게 문제다. 쉽게 글쓰게 할게 아니라, 창조적으로 쓰게 하고, 남이 안한 것을 찾게 해야한다. 나이의 많고 적고가 아니라, 누가 했으니까 따라가는 것은 결국 망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위기의식을 느낀다. 현재의 인터넷 소설에 개별성을 붙인다는 건 실수다. 나중에 인터넷의 개별성을 가진 것이 나오면 그건 뭐라고 부를 건가. 오히려 인터넷은 등용문이나 등단과정이 좀 더 폭넓어진다는 의미 정도는 있을 것이다.

인터넷은 등용문 vs 새로운 장르의 가능성

욱 : 생각이 다른데, 문학이 인터넷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난 인터넷이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멀티미디어 공간이고 문자가 가장 불편한 공간이다. 문학이 살아남기에는 아주 적합하지 않은 조건이다.

혁 : 그 지점인데, 그러면 문학이라고 불리기가 쉽지 않다.

욱 : 문학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 동국대 교수가 미국에 가서 한국의 사이버 문학에 대해서 발표를 했는데, 미국은 우리보다 훨씬 전부터 인터넷을 썼는데, 우리나라의 퇴마록이나 이런 식의 사이버문학이 있다고 하니까 미국학자들이 놀라더라. “참 특이한 나라다. 왜 인터넷안에서 글자로 문학을 하느냐, 현실 공간에서 못하고 굳이 인터넷가서 하느냐”며, “한국에서는 인터넷에서 매체를 이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되는데 왜 문자를 가지고 만들면서 사이버 문학이라고 하느냐”고 신기해 하더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한국에는 상상력이라는 것이 인터넷에서의 문학적 상상력과 다르다는 거다.

혁 : 매스컴 부풀리기나 인터넷의 개별성을 가졌다고 착각을 해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욱 : 게시판에 올라온 인터넷소설을 주제로 발표했다가 질의토론시간에 들은 얘기가 문학적 수준도 안 되는 텍스트를 가지고 무슨 논문을 쓸 수 있느냐는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작품이 아니라 이런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문학적 환경이라고 했더니, 한국의 본격문학이나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귀여니 소설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그 사람들한테는 십대들의 낙서 정도로 보는 것이고 파격적 시도라고 보지도 않는다.

혁 : 결론적으로 인터넷 소설이라고 해서 인터넷을 위주로 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터넷 환경에서 부산물적으로 나온 것들이 지금의 인터넷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너무 특성화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욱 : 지금 인터넷 소설은 미래형이다. 현재 보여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이것이 ‘인터넷 소설의 전부’라거나 ‘이것이 인터넷 문학의 한계다’라고 한정 짓지 말았으면 한다.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관심을 갖고 이우혁님이나 이런 분들이 뛰어들어서 활동하면서 자정작용을 해야 한다.


이용욱: 디지털 문화웹진 <사이버리즘> 발행
이우혁: PC통신소설 <퇴마록> 저자

2004-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