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감시자료실

작업장 감시와 노동통제 : 그 배경과 효과 (강수돌)

By 2011/04/27 11월 11th, 2016 No Comments

 작업장 감시와 노동통제 : 그 배경과 효과

 * 2001 제3회 서울국제노동미디어 <워크샵1 : 노동자 감시와 노동자의 인권> 발표문 (2001.11.12)

강 수 돌 (고려대 교수)

1. 문제의 심각성

이미 1936년에 나온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오늘날 우리가 진지하게 토론하는 주제인 작업장 감시 문제를 선구적으로 제기한 바 있다. 콘베이어 라인에서 조립 노동을 하는 채플린이 약간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 화장실에서 담뱃불을 붙이자마자 화장실 벽면에 사장의 화면이 등장하여 “빨리 작업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이에 채플린은 타임체커기에 근태 카드를 ‘찰칵’ 밀어 넣고 다시 작업대로 달려간다. 잠시 후 사장은 감독자에게 명령을 내린다. “5번열 3번째 작업자, 나사를 더 조일 것!” 놀라운 일이다. 사장실에 가만히 앉아서도 누가 작업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라인의 속도가 어떠한지, 공장 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등을 일일이 체크할 수 있는 것이다. 높은 사람이 부하들의 태도와 행동을 일방적으로 감시, 감독, 통제하는 것은 부하들이 높은 사람에게 노예적인 존재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러한 일방성과 노예성에 그치지 않는다. 채플린이 보여주듯 그러한 감시 받는 노동을 매일 반복적으로 수행한 결과 마침내 ‘미쳐버린다’는 것이다. 무의미한 노동의 강제적, 반복적 수행이 노동자의 건강성을 박탈한다는 점, 그리하여 인간성 자체를 말살시킨다는 점, 바로 이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노동자 감시 문제를 진지하고 심각하게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인간답게 일하며 인간답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답게’ 라는 말은 건강과 여유, 인격의 존엄성, 공동체적 유대와 생태계적 건강성을 포함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심각성은, 영화 <미션 임파서벌>에 나타나듯 상상을 초월하는 정보감시 기술의 발전이 단순한 영화의 한 장면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대부분의 전문․기술직 지식노동자들은 자본과 더불어, 혹은 자본 그 자체가 되어 이러한 감시 기술을 개발하고 응용, 적용하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날로 발전시키고 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1) 작업장 감시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며 한편으로는 노동의 저항에 의해, 다른 편으로는 노동의 협력에 의해 부단히 변모, 발전한다는 점을 확실히 인식하는 것, 2) 감시 체제의 유지와 존속은 노동의 협력과 침묵, 순종과 자기 억압, 두려움과 좌절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내는 것, 3) 그리하여 ‘주체적 측면’에서 본 노동의 미래는, 노동자의 자기정체성 회복과 두려움의 극복 여하에 달려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2. 작업장 감시의 배경: 자본이 가진 두려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시장에서 거래되는 노동력이란 일종의 잠재력이다. 이 잠재력을 기업가가 바라는 결과(노동, 노동생산물)로 현실화시키는 것은 관리자의 과제이다. 그러나 노동력을 가진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이다. 그것은 나름의 의식과 소망, 의견과 주장을 가지고 있고 의식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물적 자원과 현격한 차이가 난다. 자본의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자본이 무한히 몸집을 불리기 위해서는 부단히 ‘살아있는’ 인간 노동을 흡입해야 하는데, 바로 그 인간의 ‘살아있음’ 자체가 저항의 기초이기도 하나는 것이다. 노동의 입장에서는 자본에 종속되어 일하면서도 ‘뭔가 잘못되었다’고 판단될 때에는 언제나 저항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언제나 노동의 협력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노동의 저항 가능성에 대해 항상적 두려움을 갖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노동력을 가진 인간을 기업가, 관리자들이 온갖 방책을 동원하여 관리하고 통제해야만 하는 필요성이 나타난다. 그러한 방책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노동능력을 높이기 위한 방책들로, 능력개발, 교육훈련, 경력개발 등이 있으며, 다른 하나는 노동의지를 높이기 위한 방책들로, 동기부여, 기업문화, 성과주의 등이 있다.

그런데 노동능력과 노동의지를 높이기 위한 노동통제 기법들은 자본주의 전개 과정에서 그 주․객관적 조건들의 변화로 말미암아 다양한 형태로 변동해왔다. (이와 관련해서는 K. Marx 이후 ‘노동과정’을 섬세하게 연구한 H. Braverman, R. Edwards, M. Burawoy, D. Noble, M. Foucault, S. Zuboff 등의 탁월한 업적들을 참고할 수 있다. 전자감시와 통제형태 변화에 대한 최근 국내 연구로는 권순원(1998), 강수돌(2000), 장여경(2001) 등을 참조.) 여기서는 필자 나름으로 ‘노동감시 시스템’의 역사적 변형 과정을 아래와 같이 재구성해 보았다.

전자본주의 단계의 수공업 작업장에서는 생산과정 전체를 잘 이해하고 있는 장인들이 자율적으로 작업장을 관리해왔다. 그들은 당당함과 자부심, 책임감과 성실성을 가진 생산의 주체들이었으며 상호간의 동의에 의해 작업장 규칙을 만들고 실행했다. 요컨대 이 시기는 ‘자율 관리 시스템’이 존재했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 시대가 되면서 분업이 이루어지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한 공장 안에서 집단 작업을 수행함에 따라 노동과정이 분할되기 시작했으며 공장주에 의한 총괄적 감독과 인격적 통제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노동과정 자체와 관련해서는 아직도 수공업 노동자들이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었다. 숙련이 저항의 기초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시기는 ‘공장주에 의한 노동 감시 시스템’이 존재했던 시기이다.

기계제 대공업 시대가 오면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가진 저항의 기초인 숙련을 파괴하기 위해 기계를 체계적으로 도입했다. Marx가 ‘전쟁 무기로서의 기계’를 말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기계가 도입되면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 보듯 노동자가 기계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노동자를 통제하게 된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의 저항은 그치지 않는다. 마침내 독점 자본주의 시대가 고도로 발전하면서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나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가 작업장 노동통제의 전형으로 된다. 기술적, 관리적 방책들이 기업가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도입됨으로써 노동자의 개인적, 집단적 저항을 사전에 차단하는 데 주효하기도 했다. 갈수록 노동자들은 탈숙련화되었고 대신에 미숙련, 반숙련의 대중노동자들이 거대한 공장이나 지역에 모여 집단적인 동질성을 높여가게 되었다. 이제 숙련공의 숙련성, 자율성이 아니라 미숙련공의 집단성, 동질성이 새로운 저항의 기초로 되었다. 요컨대 이 시기는 ‘하위 감독자와 기계에 의한 노동 감시 시스템’이 존재했던 시기였다.

한편, 자본의 입장에서는 저항을 봉쇄하기 위한 기술적, 관리적 방책도 필요했지만 저항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물질적 토대가 필요하기도 했다. 그것은 더 효율적인 생산을 통해 더 많은 이윤을 획득한 다음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몫을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예컨대 고임금, 승진, 휴가, 복지 등이다. 다시 말해, 무한 축적을 추구하는 자본이 노동의 비협조적 태도와 저항 행위를 사전에 차단하고 효율적인 노동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노동의 집단적 정체성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 파괴된 정체성 속에 자본의 합리성을 ‘내면화’하도록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자본의 입장에서 더 많은 자동화, 더 체계적인 자동화가 필요했고 마침내 정보화, 네트워크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상대적으로 소수의 숙련․전문 노동자들은 특권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자본의 논리를 대변하는 집단으로 변모하고 상대적으로 다수의 반숙련, 미숙련 노동자는 집단적 정체성의 파괴를 경험하면서 ‘감시의 공포’ 속에 개별화, 원자화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이제 노동자의 노동과정은 자동기계 시스템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눈’에 의해 더 많이 감시된다. 노동자의 행동과 의식, 태도와 성과 등 그 모든 것이 디지털신호 체계로 포착되고 정리, 분류, 비교, 평가된다.1) 마침내 노동자의 감정과 영혼까지도 관리 통제의 대상으로 변하고 있다. 체계적 성과 평가 제도에 의해 감독자는 물론 동료와 자신마저 그러한 평가의 대상과 주체로 된다. 그 결과 마지막 단계, 즉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의 느낌과 의식, 언행을 스스로 감시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요컨대 이 시기는 ‘동료와 자신에 의한 노동 감시 시스템’이 존재하는 시기이다.

요즘 유행인 ‘스스로를 고용하라’라는 것도 사실은 노동자더러 자본가로 행세하라는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노동자들은 더 이상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견지하지 못하며, 따라서 자본이 노동의 저항에 대해 가졌던 두려움은 상당한 정도로 감소된다. 대신에 자본의 두려움은 노동의 두려움으로 ‘변환’된다. 노동은 생존권 불안이나 기득권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되며 부단히 자본의 눈치를 보게 된다. 많은 경우, 노동조합도 마찬가지다. 경우에 따라서는 노동조합이 개별 노동자보다 더 많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드디어 자본이 상대적으로 ‘안심’할 수 있는 단계에 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의 노동에 대한 지배가 영구화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두려움의 원인 자체는 근본적으로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다시 행위하기 시작하는 순간 자본의 지배 구조는 또다시 동요할 수 있다. 문제는 노동자들이 가진 내면의 두려움[특히 기득권 상실 혹은 생존권 불안에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 그리하여 자본과의 동일시를 떨쳐내는 것, 바로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노동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렇다. 현재 문제시되는 전자 기술을 통한 노동과정의 체계적 감시는, 노동자의 개인적, 집단적 저항에 대해 두려움을 안고 있는 자본이 그 두려움을 강제적으로 축출하기 위해 고안해 낸 고도의 기술적, 관리적 방책들의 일부라는 것이다.

3. 작업장 감시의 효과: 효율성과 지배력

작업장 감시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노동자의 개별적, 집단적 저항이 사전에 예방될 뿐만 아니라 ‘강제된 동의’를 노동자들로부터 성공적으로 확보하게 된다면 자본의 효율성과 지배력은 동시에 높아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은 진실의 한 면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이나 의식적 행위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감시로 인한 효율성과 지배력의 증대 이면에 작업장 감시의 고도화와 더불어 자본의 감시 비용, 지배 비용도 갈수록 증대한다. 바로 이것이 진실의 다른 면이다. 작업장 감시가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인권(프라이버시 포함)에 대한 침해로 나타나기 때문에 일정한 상황에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음’에 공감한 노동자들이 개별적, 집단적 분노를 표출한다. 때로는 감시 기술 자체를 파괴하기도 하고 때로는 감시 기술의 수정과 변경을 요구하기도 하여 마침내 자본에게 상당한 보전 비용(maintenance cost)을 발생시킨다. 다른 편으로 감시 자체가 자본의 입장에서도 ‘껄꺼러운’ 혹은 ‘캥기는’ 사안이기 때문에 감시 대상인 노동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본 입장에서는 감시에 대한 보상으로 그 어떤 물질적인 것을 지불하거나 혹은 감시 문제 자체는 논외로 한 채 노동자들을 생산 과정의 일부로 원활히 순응시켜내어야 한다. 즉 막대한 통합 비용(integration cost)이 발생한다. 이 기술적 보전 비용과 사회적 통합 비용은 자본으로 하여금 감시의 전면화에 대해 일정한 한계를 설정하게 한다. 즉 중소기업이나 영세기업은 그러한 고도의 감시 장치를 실시하기 어렵고 단지 독점적 대기업이나 중견 기업들만이 그러한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그 막대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기업들조차도 노동자의 불복종과 저항으로 말미암아 비용 요인이 기대 효과에 비해 현저히 증대하는 경우 더 이상 고비용의 감시 기술을 장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문제 두 가지가 등장한다. 하나는 감시 비용을 줄이려는 자본의 새로운 시도에 노동이 얼마나 협력하는가 하는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감시 기술 자체가 철회되거나 불구화되더라도 노동자가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을 부단히 의식하게 되는 ‘자기 감시’ 문제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노동이 스스로를 얼마나 자본과 ‘동일시’하는가의 문제이며,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노동이 “나는 내 갈 길을 간다!”는 자세를 견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 스스로의 느낌과 의견에 대해 얼마나 솔직하고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4. 작업장 감시를 둘러싼 5가지 거짓말

작업장 감시 기술의 도입과 적용, 확대를 둘러싸고 노사간에 마찰이 심하게 일고 있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사전적 예방은커녕 사후적 대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사용자들이 어떤 논리로 감시 기술의 설치를 옹호하는지 살펴보면서 그 옹호론이 거짓이거나 오류, 근거 부족일 가능성이 큼을 지적해보기로 한다. 동시에 이런 내용들은 새 기술의 개발, 도입, 적용, 평가 과정 등 전반에 걸쳐 노동자가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주체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정치적 과정’(장여경 2001:80)이어야 함을 강력히 시사한다.

4.1 모니터링(감시)은 작업자 안전과 건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전자 감시 내지 작업장 모니터링이 작업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설치된다는 것은 거짓이거나 부차적 효과에 불과할 뿐이다.2) 그 주된 목적은 노동통제를 효율화하여 노동 효율성과 노동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는 것이다.

현대자동차 전주 공장의 ‘액티브 뱃지’ 사례에서처럼(권순원 1998, 강수돌 2000), 누가 언제 어디서 얼마나 쉬는지, 어디로 왔다 갔다 하는지,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작업은 어떻게 수행하는지 등 모든 것이 다 기록, 녹화되기 때문에 노동자의 불안감은 커지고 스트레스는 올라간다. 이 모든 것은 안전과 건강에 해롭다.

작업자 안전과 건강을 일차적으로 생각한다면 작업자들이 스트레스를 받게 하는 감시 체계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안전 장치를 도입하거나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

4.2 모니터링은 작업자 교육과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

모니터링을 실시함으로써 작업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작업 과정을 면밀히 관찰하게 하여 낭비와 비효율을 줄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본의 효율성을 높이는 과정일 뿐이지, 노동자는 노동강도 강화와 감시 받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스트레스를 더 많이 경험하게 된다. 작업자 교육이 올바로 이루어지려면 일방적인 모니터링이 아니라 교육자와 피교육자간의 수평적 상호작용에 의해 납득가능한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을 교육받을지에 관해 노동자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자본주의 기업의 생산성 향상이 마치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인간 노동력과 자연 생태계의 살아있는 에너지를 자본이 부단히 흡입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이므로 결코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혹시 노동자가 그러한 생산성 향상의 떡고물을 좀 더 많이 가져간다손치더라도 그것은 착취와 파괴의 결과물을 좀 더 많이 가져가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런 파괴적 논리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은 모두, ‘설령 배는 부를지라도 결코 건강할 수 없는’ 그런 불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4.3 모니터링은 분쟁시 객관적 자료를 확보하게 한다.

서비스업종이나 제조업종이나 관계없이 고객과 노동자간, 노동자와 감독자간에 분쟁이 발생하면 녹음, 녹화된 내용이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데 도움되는 자료를 제공한다고 한다. 이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맞다. 예컨대 버스에서 동전을 기사가 ‘삥땅’하는지, 소매치기가 손님들을 터는지, 직원이 원료나 부품을 절도하는지 등이 포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분쟁의 소지와 증거들이 모니터에 모두 포착될 리 없고 오히려 녹음, 녹화된 내용이 편집되거나 왜곡되어 오․남용될 소지가 크다. 예컨대 버스에 설치된 CCTV가 노조 간부인 운전 기사의 흡연 장면을 찍었을 때, 평소에 문제없던 일이 노조 간부를 징계, 해고하는 증거 자료로 제시되어 노동조합을 위축시킬 수 있다. 한마디로, 건수 올리기, 꼬투리 잡기에 십분 활용될 수 있다.

4.4 모니터링은 부작용을 최소한으로 줄이면 별 문제 없다.

노동자들의 여러 가지 문제제기에 대해 사용자들은 모니터링의 부작용만 최소화하면 된다고 하나 이것은 주객 전도된 주장이다.

모니터링의 부작용이 감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감시를 하기 위해서 모니터링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래’ 목적을 최대화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자는 것은 형식 논리일 뿐이다. 또 이런 주장은 마치 ‘원래’ 목적이 공익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진다.

1997년 이후 서울시내버스에 설치된 CCTV의 경우 주목적이 ‘삥땅’ 감시와 소매치기 감시이며 부작용이 기사와 승객의 사생활 침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버스 속 CCTV의 경우는 버스 회사 적자의 원인이 업주들의 운송 수입금 빼돌리기에 있음에도 기사의 ‘삥땅’으로 덮어씌우는 협의가 있는 반면, 삥땅 감시와 사생활 침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제기된다. 심지어는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먹기 위해 200원을 가져간 운전자가 ‘삥땅’했다는 죄로 퇴사를 강제당하기도 했다(장여경 2001:79).

효율성 향상과 지배력 증대는 자본 증식이라고 하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따라서 모니터링의 주작용과 부작용은 엄격히 구분이 힘들뿐더러, 그 구분과 무관하게 모두 다 자본의 이해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이지 노동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나온 것은 없다.

4.5 모니터링은 노동조합 탄압과 관련 없다.

감시는 생산과 이윤 창출에 비협조적인 노동력을 가려내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감시의 결과를 수치화하고 자료화하여 개별적으로 인사고과를 통해 보상과 연결지우는 경우 노동자의 행동 반경을 좁힌다. 노동조합 조합원이나 활동가들이 이런 식으로 개별 평가에 종속된다면 심리적으로 움츠려들게 되어 결코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

나아가 2000년 충북대 병원의 사례에서와 같이 노사간 교섭 과정이 몰래 카메라에 의해 포착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누가 선동적인 발언을 했는지, 어떤 표현을 썼는지, 투쟁 일정을 어떻게 잡는지, 어떤 투쟁 방식을 취하는지 등 모든 것에 대한 사전 정보를 경영측이 입수하기 때문에 노동조합 활동에 걸림돌이 된다. 한국 타이어의 DAS도 1995년 파업 이후 체계적으로 도입되었고, 2001년 7월에 익산의 (주)대용에서 CCTV를 설치한 것도 약 1년 전 노조가 설립되고 노동자들이 자기조직화 사업을 시작하자 회사측이 이에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같은 내용은 이미 ILO의 한 연구에서도 밝혀진 바 있는데(장여경 2001), 그것은 미국의 어느 기업에서 노조조직화가 시작되자 작업장 감시 기술이 도입되었고 이것이 그 명분과는 달리 노조원들의 현장 조직화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방식(작업 시간에 작업 공간을 떠나 휴게실에서 다른 노동자를 만난 두 명의 노동자들이 ‘작업 공간 이탈 금지’라는 경고 처분을 받음)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5. 새로운 노동 세계를 위하여

3

인간성 회복, 자기정체성 회복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주체적 전제 조건이다. 그리고 이것이 충족되어야지만 참다운 물적 토대도 마련된다. 물적 토대도 결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3)

대개 그 물질적 기초로서 생산력의 발전을 강조해왔으나 우리는 두 가지 점에서 이를 상대화해야만 한다. 첫째,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은 파괴력의 발전으로서 노동자의 건강, 인격, 공동체, 생태계를 부단히 파괴한다. 따라서 생산력이 발전하면 해방적인 생산관계가 도래한다는 식의 전망은 지나치게 기계적인 것으로 비판되어야 한다. 둘째, 지금 현재 생산력의 발전은 우리가 더 이상 지금처럼 많은 노동을 하지 않고도 인간답게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 많은 경우 그 과잉 발전이 문제다. 따라서 문제는 인간다움 삶에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내어 생산하는 것, 필요한 것은 더욱 풍요롭게 추구하되 불필요한 것은 과감히 철폐하는 것, 이미 생산된 부를 고르게 분배하는 것 등을 포함하는 생산관계의 문제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우리가 열망하는 변화가 오지 않는 것은 물적 토대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변화의 주체가 원자화, 고립화, 자본화되어 변화의 방향과 내용을 채워나갈 의지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자본에 의해 인간성을 파괴당했거나 아니면 자본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모습, 바로 이 모습이 우리 눈앞의 모순적이고 파괴적인 현실을 계속 존속시키는 토대로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감시 기술의 심각성에 대한 문제 제기 뿐만 아니라 기술 일반의 개발과 적용, 응용과 소비 등 전반적 과정에 걸쳐 근본적 문제 제기를 해나감으로써 인간성의 회복, 자기정체성의 재발견을 이루어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고도화된 노동통제 기술인 전자감시 체계는 우리로 하여금 보다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할 수 있게 하는 소중한 계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 내면에 자리한 모종의 두려움들을 조심스레 끌어안으면서도 문제 상황을 공유하는 다른 이들과 ‘작은 연대’를 실천하는 것, 그 속에서 두려움을 경향적으로 극복하는 것[두려움의 파도를 타면서 넘어가는 것], 그리하여 갈수록 ‘더 큰 연대’를 이루어나가는 것, 그 과정에서 자아, 집단, 계층, 계급, 인간, 생명체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되찾는 것, 바로 이것이 실천적 과제로 등장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과 더불어 ‘우리가 꿈꾸는 세계’의 시작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

강수돌(2000), Transformation of Workplaces Through Electronic Surveillance, paper presented at LaborTech 2000 in Wisconsin-Madison, Dec. 2000.

권순원(1998), 전자감시적 노동통제와 노동규율, 워크샵 자료집 <정보 기술과 작업장 감시>, 작업장감시 조사연구팀, 서울.

장여경(2001), 첨단 기술에 의한 노동자 감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노동사회> 2001. 10.

조돈문(1996), 정보화와 노동과정의 변화: 자본의 전략적 선택과 딜레마, <산업노동연구> 제2권 제2호.

1) 정보기술을 통한 전자감시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조돈문 1996 참조): 1) 전자기술은 관찰자와 감시자를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본인의 동의 없이도 개인의 비밀 정보까지 대량 수집하게 한다. 2) 수집된 정보의 전송을 용이하게 하여 공간을 초월한 정보의 공유를 가능하게 한다. 3) 분산적 정보들을 체계화하여 데이터베이스를 만들 수 있게 하고 무한 축적된 정보를 쉽게 검색, 출력되게 한다. 결국 이러한 감시 과정이 원활히 될수록 ‘정보불평등’이 강화되며 ‘권력관계’의 일방성이 강해진다.
2)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즈 프라이버시 위원회는 1995년 9월에 <보이지 않는 눈: 작업장 비디오 감시에 관한 보고서>를 내었는데, 여기서는 사용자측이 작업장 감시 시스템을 도입하는 9가지 ‘명분’을 정리하고 있다. 그것은 절도 방지, 적대적 기물파손이나 방화 방지, 생산성 향상 위한 작업 모니터링, 고객 서비스 향상, 노동자 교육, 노동자 건강과 안전, 법적 의무 준수, 법적 분쟁시 사용자 면책, 생산성 향상 위한 생산과정 모니터링 등이 그것이다(장여경 2001 참조). 서양 속담에도 나오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정말로 잘 포장되어 있다”는 말이 실감나게 한다.

3) 나는 여기서 ‘노동자의 프라이버시는 기본적 노동권’임을 강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가 가진 지식, 경험, 숙련, 지혜, 자율성과 창의성 등 그 모든 주체적 능력이 어떤 형태로든 노동감시 시스템을 통하여 노동자 안에서 억압, 축소, 파괴되거나 자본측에게 이전, 수탈, 점취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아는 세계’에 팽배한 착취관계의 본질을 이루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그러한 파괴적 과정에 자본과 ‘공범자’로서 동참하고 있음을 스스로 깨우쳐야지만 ‘우리가 꿈꾸는 세계’로의 새로운 변화가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다.

200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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