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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은 ‘달빛요정’을 못 살렸다

By 2011/03/10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오병일

저작권은 ‘달빛요정’을 못 살렸다

오병일

"현재 저작권과 관련한 체제는 정보로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상호간의 소통 그리고 문화적 교류까지도 차단하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중략)…저작권 소유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대개 예술가나 작가가 아닌 경우가 많죠. 그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주로 대기업 등으로 창작자의 이름을 무기로 삼아 권리를 남용하고 있습니다…(중략)…제 생각에는 저작권이 창작자에 대한 보상에 있어서 오히려 가장 좋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요"(주1)

지난 10월 18일 한국을 방한한 스웨덴 해적당 소속 유럽의회 의원인 아멜리아 앤더스도터(Amelia Andersdotter)의 주장이다. 미국에서 P2P 서비스인 냅스터(Napster)와 그록스터(Grokster)의 연이은 패소와 폐쇄, 선진국을 중심으로 비공개적으로 협상이 진행중인 ‘위조 및 불법복제 방지협정'(주2) 등 갈수록 저작권이 강화되어 가는 경향을 보면, ‘저작권은 이미 죽었다’는 그녀의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냅스터의 등장으로 디지털 저작권 논쟁이 촉발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저작권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대립과 갈등은 저작권의 적절한 ‘조정’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아니면 해적당의 주장과 같이, 저작권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 혹은 폐지까지 요구하는 것인가?

저작권은 문화, 지식에 대한 ‘통제권’이다

새로운 복제기술이나 미디어의 출현이 기존 저작권자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지금은 저작권의 강력한 수호자인 음반사 역시 처음 등장할 때는 저작권자로부터 ‘해적’이라 비난받았으며, 케이블 TV 방송국오 기존 공중파 방송을 해적질하였다. 그러나 디지털 정보통신 기술의 등장이 지식과 문화의 생산-유통-향유의 과정에 미친, 혹은 잠재적으로 미치게 될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최근 ‘가디언’지는 BBC의 라디오와 TV 프로그램 아카이브에 공중이 접근하도록 하는 데에 저작권이 질곡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주3)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기 위해 800명의 상근 직원이 3년 동안 필요할 정도로 많은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다. 물론 법을 조금 바꾸면, 이러한 행정 비용의 낭비를 해결할 수 있다. 영국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국내 도서관들도 90년대 말부터 ‘디지털 도서관’ 사업을 추진해왔는데, 안타깝게도 원격 열람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원격 열람을 할 수 없는 ‘디지털’ 도서관이라니!) 심지어 도서관 내에서 열람할 경우에도 허락받은 부수 이상 동시에 열람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원격 열람이 가능해지면, 극단적으로 책이 1권밖에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출판계의 반발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우려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절판된 도서나 비영리적 논문 등까지 원격 열람이 제한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디지털 네트워크의 발전으로 인한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소비자(이용자)가 지식, 문화의 배포자, 나아가 생산자의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해본 사람치고, 소위 ‘해적질’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당연히 기존에 저작물 유통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던 문화-유통 자본의 입장에서는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일련의 저작권 강화 경향은 자신의 통제력을 회복하기 위한 문화-유통 자본의 반격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들이 역으로 이용자의 표현의 자유와 상호 소통을 제약하고, 이용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난 2009년 6월, 딸 아이가 손담비의 ‘미쳤어’ 음악에 맞춰 율동을 하는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가, 저작권 침해로 삭제를 요구당한 사례가 큰 이슈가 된 바 있다. 다행히 1심 법원은 이를 공정이용으로 인정했고, 피고인 한국음악저작권협회는 현재 항소한 상태이다. 그러나 게시물 삭제에 대해 용감하게(?) 소송을 제기한 이 블로거와 달리, 권리자단체의 묻지마 삭제 요구에 울며겨자먹기로 삭제당한 글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황당한 사례는 이 뿐만이 아니다. 지난 2005년에는 KBS의 인기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팬 카페에 올려진 동영상이나 사진에 대해 KBS가 삭제 요구를 한 바 있다. 올해 3월부터는 SBS의 요구로 방송프로그램 캡쳐화면이 포함된 블로그 포스팅이 사라졌다.

문화는 소비가 아니라 표현과 소통이다.

이것들은 저작권이 ‘남용’되는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라, 우리 누구나 겪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다. 청소년들의 비영리 라디오 방송, 사회단체들의 뉴스 아카이브 서비스, 재기발랄한 네티즌의 패러디 동영상, 전문가 뺨치는 문화 비평 블로거 등 시민들의 문화적인 표현과 상호 소통은 공개된 저작물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친구와 드라마에 대한 수다를 떨기 위해 방송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황당한 일일 것이다. 온라인이라고 달라질까? 과거에 저작권 침해에 대한 단속은 용산 전자상가의 불법CD나 길거리의 불법 음악테이프와 같이 주로 ‘영리를 목적으로 타인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디지털 환경에서는 그 규제 대상이 ‘모든’ 시민들의, ‘비영리적 표현이나 상호 소통’으로 확대된다.
현재는 여러 유료 음악 서비스의 하나가 되었지만, 2000년대 초반 ‘소리바다’는 (사실상 당시 인터넷 이용자 전체라고 할 수 있는) 2000만 명의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소리바다는 단지 음반 구매 비용을 아끼려는 이기적인 소비자들의 해적질을 도와주는 도구였을 뿐일까?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시장성이 없어 더 이상 유통되지 않는 오래된 음악, 국내에 수입되지 않는 해외 음악, 그리고 인디 음악 등을 접할 수 있는 음악의 보고(寶庫)였으며,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음악에 대해 나누는 커뮤니티였다. 비록 소리바다를 통해 유통되는 음악의 주류가 당시의 히트 음반이었다 할지라도,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문화-유통 자본은 자신들이 제공하는 ‘문화 상품’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소비’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주어진 틀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는다. 문화-유통 자본은 시장성이 없으면 판매하지 않지만, 라틴 음악을 듣고 싶은 사람도 있고 인도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욕구를 쉽게, 상호간의 협력을 통해 충족시켜줄 수 있는 기술과 서비스가 존재한다. 나아가 사람들은 스스로 만지고 싶어한다. 영화 ‘스타워즈’의 편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신만의 편집본을 만들 수 있다. 마음에 드는 음악과 함께 라디오 방송을 할 수도 있고, 그것들을 섞어서 새로운 음악을 창작할 수도 있다. 단지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비틀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 진정한 문화 아니던가? 이런 의미에서 현재 저작권을 둘러싼 갈등을 ‘정보 민주주의’의 문제로 이해하는 해적당의 문제 의식은 타당하다.

저작권은 창작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체계인가?

최근 일인 밴드인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 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새삼 음원 수익의 불공정한 배분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불법복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음악 시장의 규모는 일정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음반 시장은 축소되고 있는 반면, 디지털 음악시장의 증가세가 그것을 대체하고 있을 뿐이다.(주4) 그러나 실제 창작자인 작곡가나 실연자에게 가는 수익은 얼마 되지 않는다. 멜론, 엠넷 등 음원 사이트나 벨소리나 통화연결음을 제공하는 이동통신사가 수익의 50% 이상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실제 창작자들에게 돌아가는 수익은 10%가 채 되지 않는다. 애플 아이튠스가 권리자에게 지불하는 수익이 70%라는 것과 비교하면 국내보다는 상황이 나은 것 같지만, 기존의 음악 시장이 대부분의 창작자에게 큰 도움이 안되는 것은 해외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대안적 수익모델로 주목받고 있는 미국의 음악 서비스 업체인 매그나튠(magnatune.com)(주5)의 설립자는 현재의 음악 산업의 구조에 대해, 라디오는 팝이나 락 등 주요 쟝르만 다루고 있어 지루하고, CD는 비싼 반면에 창작자에게 돌아오는 수익은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금방 절판이 되고, 음반사는 지나치게 오래 동안 창작자를 법적 계약으로 구속시켜 놓는다고 비판하고 있다.(주6)
이러한 상황이 음악 산업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문화 산업에서 실제 창작자들은 유통 자본에 종속된 소규모 창작자이거나 고용된 문화 노동자들이다. 일부 스타 창작자들은 엄청난 고수익을 올리는 반면, 대부분의 소규모 창작자나 노동자들은 적정한 수익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문화 시장이 세계화될수록 이와 같은 승자독식의 구조는 심화된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 자본의 세계화와 소수 거대 문화 자본의 시장 장악, 창작자에게 불리한 수익구조, 저작권의 세계화, 문화적 다양성의 훼손 등이 동떨어진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물론 저작권에 기반하지 않는 대안적 사업 모델이 아직 미약한 상황에서, 그리고 저작권에 기반한 산업 구조에 종속된 문화 창작자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쉽사리 저작권 폐지를 얘기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현재의 저작권 제도가 이용자의 표현과 소통을 제약하는 한편, 대다수 창작자에게도 적절한 보상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면, 뭔가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해야할 때가 아닐까.

주1) 고대강연 정리 – 누구를 위한 저작권인가?, http://pirateparty.kr/blog/?p=225
주2) ‘위조 및 불법복제 방지협정'(Anti-Counterfeiting Trade Agreement, ACTA)는 위조 상품(상표 침해품)과 저작권 침해품이 국제적으로 대량 유통되는 문제를 해결하자는 취지로 제안된, ‘다자간 무역협정’이다.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국제기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적재산권 집행의 강화를 위해 일부 국가들이 비민주적으로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 시민사회의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http://ipleft.or.kr/node/2616 참고)
주3) http://www.guardian.co.uk/law/2010/nov/25/bbc-archive-online-access-law?cat=law&type=article
주4) 2007년 디지털 음악시장은 약 3700억 원, 음반 시장은 600~700억 규모라고 한다. 2001년에는 음반시장 규모가 약 3730억 원이었고 디지털 음원시장은 911억 원이었다. (한겨레21, 한국 음악시장을 죽이는 자들, http://www.hani.co.kr/section-021153000/2007/12/021153000200712200690012.html)
주5) 매그나튠은 양질의 스트리밍 서비스는 무료로 오픈하고, 유료 가입자에게는 무제한 다운로드를 허용하며, 창작자와 직접 계약하여 수익의 50%를 제공한다. 매그나튠의 음악은 모두 크리에이티브커먼스 라이선스(Creative Commons License)를 채택하여, 비영리적 이용은 자유롭게 허용하고 있다.
주6) http://magnatune.com/info/why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7호에 실린 글입니다.
 

2011-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