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네트워커지문날인

어느 지문날인 거부의 경과보고서

By 2004/02/06 10월 29th, 2016 No Comments

김칠준의 정보인권

김칠준

늦은 밤 A 경찰서의 형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때까지 조사를 받았던 S 건설노조의 조합원이 ‘조사를 마친 후 지문날인을 거부하고 있는데 이러면 곤란하지 않느냐’는 항의였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그 동안 S 건설노조는 건설현장의 일용노동자들로 조직된 노동조합으로서 건설회사와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단협에 따라 노조 전임비를 받아왔다. 그런데 노조가 산업안전시설미비에 대해 고발하겠다고 위협한 후 단협을 체결하고 노조 전임비를 받았다는 혐의로 노조관계자 20명이 A경찰서로부터 소환장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이날 오전 1차로 2명이 경찰서에 자진출석해서 조사를 받게 되었고, 나는 변호사로서 수사과정에 입회를 했다.
담당 경찰관은 경찰경력이 15년 되었지만 변호사가 입회한 것은 처음이라며 껄끄러워 하면서도, 요즘 경찰이 피의자의 인권보장을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지에 대해 한참 너스레를 떨더니 입회를 허용했다. 나는 얼마동안 조사과정을 지켜보다가 조사를 받는 조합원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이야기 해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사가 끝난 후에는 반드시 조서를 꼼꼼히 읽어보고 서명날인을 하라. 그리고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지문날인을 요구하는 것은 헌법상 보장된 신체의 자유나 사생활의 자유에 대한 인권침해이자, 영장 없이 신체에 대한 검증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거부해도 된다.’는 당부를 남겼다. 그래서 그 조합원은 수사자료카드에 지문날인을 하라는 경찰관의 요구를 거부했던 것이다.

나는 전화한 경찰관에게 지문날인을 강요할 법적 근거도 없고, 본인이 원치 않을 경우 지문날인을 거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경찰관은 ‘조서에는 지문날인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수사자료표에는 지문날인을 해야한다.’고 계속 우기더니 ‘만약 계속 거부하면 경범죄처벌법에 따라 즉결심판에 회부되어 구류를 살수 있다’는 엄포까지 놓았다. 이에 경찰관에게 지문날인에는 절대 응할 수 없으니 다시 한번 알아보고 처리하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큰소리를 쳤지만 내심 불안했다. 경찰의 부당한 노조탄압에 초점을 맞추고 싸워야하는데 굳이 지문날인 문제로 경찰과 갈등을 빚을 필요가 있을까. 그러다 덜컥 즉결심판에 회부해버리면 괜히 문제만 복잡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일단 진보네트워크센터로 전화를 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요즘 수사자료표에 지문날인을 거부한 선례가 있는지, 그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하는지. 정말 구류를 살게 하고 있는지를 문의했다.
그러자 진보네트워크센터의 활동가는 ‘현재 2건이 계류중이다. 모두 경찰에서 집시법위반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수사자료에 십지지문을 찍는 것을 거부했다가 경범죄처벌법에 의해 즉결심판에 회부된 사건인데, 그 중 1건은 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후 경찰서장이 정식재판을 청구하였고, 다른 1건은 법원이 구류 3일을 선고해서 당사자가 정식재판을 청구하였다. 정식재판과정에서 법원은 경범죄처벌법 제1조 42호가 영장주의에 반할 뿐만 아니라 형사소송법상 과잉금지의 원칙에 반하기 때문에 위헌의 의심이 있다며 모두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을 신청한 상태이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설사 경범죄처벌법이 합헌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경찰공무원이나 검사가 지문조사 외의 방법으로 그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피의자에 대해서만 해당되는 것이지, 이미 수사 과정에서 신분증을 제시함으로써 신원이 확인된 피의자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차 싶어 급히 법전을 뒤져보니까 정말 그렇게 되어 있었다.

갑자기 지문날인거부에 철저하지 않았던 나 자신이 민망해졌다. 이제 확신을 가지고 지문날인을 거부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해주기 위해 다시 A경찰서로 전화를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 조합원은 이미 지문날인 문제를 가지고는 경찰과 싸우고 싶지 않다며 수사자료표에 지문날인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지문날인거부를 실천함에 있어서 많은 장애를 만난다. 개인의 지문이 이미 전산입력되어 있는 그 많은 개인정보와 결합되기 때문에 개인의 사생활은 지문감식기 앞에서 모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지문날인을 강요하는 것은 개인의 사생활과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것. 지문날인을 모든 국민에게 강요하는 것은 온 국민을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며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 등. 그 부당성을 열심히 알리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것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경찰관의 회유에 대해 굳이 싸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설사 느낀다고 하더라도 행여 사건처리에서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웬만큼 대찬 사람이 아니면 단호하게 거부하지 못한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경찰이 구류 운운하면 지문날인을 거부할 용사는 거의 없어지고 만다.

결국 제도를 뜯어 고쳐야 한다. 지문날인 자체를 폐지하고, 수사과정에서 영장 없이 지문을 채취할 수 있도록 규정한 여러 규정과 관행을 폐지해야 한다. 이를 게을리 하는 행정당국에 대해 법원과 헌법재판소는 단호하게 위헌임을 선언해야 한다. 그제서야 보통시민들도 인권침해로부터 실질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지 않은가. 헌법재판소의 조속한 위헌 결정을 기대한다.

2003-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