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 액트온표현의자유프라이버시

사이버와 인권

By 2010/09/06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장여경

한국 정부에게는 ‘구글 쇼크’라 할 만 했다. 지난 4월 9일 구글이 한국 정부의 실명제 정책을 따르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4월 1일 실명제 적용 대상을 일일 방문자 수 10만 명 이상 모든 사이트로 확대하는 관련 시행령이 발효된 후 모두가 구글의 입을 쳐다보던 시점에서였다. 인터넷 실명제 강화, 사이버 모욕죄 도입 등 이명박 정부가 인터넷 통제를 강화하면서 촛불 쇼크를 극복하려고 부단히 애를 쓰던 시점이기도 했다. 굴지의 다국적 인터넷 기업 구글은 실명제 대신 한국 이용자에게는 게시판 업로드를 제한하는 길을 택했다.

한국 이용자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사건이었다. 4월 24일 검찰이 주경복 전 서울시 교육감 후보의 선거법 위반 사건을 수사하면서 수사 대상자 100여 명의 최장 7년 치 이메일을 압수수색한 사건이 알려져 충격을 준 가운데, 6월에는 쇠고기 광우병 관련 MBC <PD수첩> 보도를 조사 중이던 검찰이 김은희 작가 등 관련자의 7개월 치 이메일을 압수수색하고 그 내용의 일부를 공개한 사건이 큰 파장을 불러왔다. 연이어 7월에는 YTN 노조원 20여 명의 이메일을 압수수색한 사실이 밝혀졌고 8월에는 경찰이 시국선언을 주도한 교사 25명의 이메일을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 사건들 이후 다음, 네이버 등 국내 이메일을 사용하던 이용자들이 구글의 지메일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핫메일로 옮겨가는 ‘사이버 망명’ 러쉬가 일었다. 대중적 지명도가 높은 진중권 교수가 다음에 있던 블로그를 구글의 ‘블로그스팟’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이용자들의 사이버 망명 행렬은 잠시나마 한국 정부를 조소거리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전 세계 네트워크의 네트워크, 인터넷을 국경 내에서 통제하려는 정부의 열망은 시대착오적이며, 이제는 도달 불가능한 미망이라고 암묵적으로 웅변하는 것이다. 비록 가상공간에서이지만 인터넷은 시민들에게 국가의 통제를 비껴갈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것 같았다.

정말 인터넷은 국가로부터 탈출인가. 전통적인 인권 억압 체제로서 국가는 사이버 공간에서 제 효력을 잃고 있는가. 국가의 빈자리에서 이제 인터넷 공간은 자유로운가. 때로는 그 자유도가 너무 지나쳐서 문제가 되는가.

 

초국적 네트워크
인터넷은 대중의 시야에 나타난 시점에서부터 이미 지구적인 네트워크였다. 1969년 미 국방성의 알파넷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서부지역 소재 대학과 연구소들의 네트워크로 시작되었지만, 1977년 인터넷에 연결된 처소가 하와이에서 노르웨이까지 이미 국내외를 아울러 50개소 이상에 달했다. 인터넷의 네트워크 방식은 1972년부터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하여 TCP/IP 프로토콜이 보급된 1982년에는 누구나 현재와 같은 방식의 인터넷 서버를 구축하여 서로 접속할 수 있게 되었고, 미국과학재단 네트워크가 알파넷의 뒤를 이어 인터넷의 백본을 맡게 된 1990년에 한국도 인터넷에 연결되었다.

국가로부터의 자유이건 국가의 사회적 의무이건, 대체로 인권의 문제가 국가라는 화두를 벗어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초국적 네트워크의 등장은 인권의 새로운 지평을 구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존 페리 발로우 같은 사람은 미국 의회가 인터넷을 규제하는 ‘통신 품위법’을 제정한 데 맞서 다음과 같이 외쳤던 것이다.

우리는 인종, 경제력, 군사력, 태어난 곳에 따른 특권과 편견이 없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있다 … 너희가 생각하는 재산, 표현, 정체성, 운동, 맥락에 관한 법적인 개념들은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물질에 기반하는데 사이버스페이스에는 아무런 물질이 없다.
–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 (1996년 2월 8일)

1998년 진보네트워크센터가 설립되던 무렵에는 한국 진보운동에도 이와 같은 희망이 넘쳐났었다. 특히 초국적 신자유주의의 파고가 높아지는 시점에서 초국적 네트워크는 초국적 저항과 연대의 수단으로 주목받았다. 멕시코 치아파스 농민 혁명 사례가 많은 영감을 주었다. 1994년 1월 1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발효에 맞추어 무장봉기를 일으킨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은 치아파스 지역에서 활동하였지만,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퍼뜨렸다. 사파티스타가 인터넷으로 성명을 발표하면, 전 세계 지지자들이 자발적으로 성명을 퍼 나르고, 지지하는 글, 그림, 사진, 오디오, 비디오를 제작하고, 각국 멕시코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는 식이었다. 뉴욕타임스가 ‘최초의 포스트모던 혁명’으로 명명했던 사파티스타와 그 인터넷 지지자들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풀뿌리 국제연대의 모범사례였고,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정치력은, 비트에서 비트로 연결되는 조용한 힘의 축적에 의해 세워졌다(1996년)”고 선언하였다.

사실 이러한 낙관주의는 기술과 인권에 대한 전통적인 비관주의와 사뭇 다른 것이다. 맑스로부터 기술은 지배의 도구였다. 자본주의 발달 속에 기술은 이윤을 내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 이용, 보급되어 왔고, 그 결과 많은 공장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자리를 차가운 기계가 대신하기 시작하였다. 맑스는 이에 대해 “자본가의 노동자 지배는 사물의 인간에 대한 지배이고, 죽은 노동의 산 노동에 대한 지배이며, 생산물의 생산자에 대한 지배이다”라고 비판하였다. 러다이트 운동을 거쳐 후대인 해리 브레이버맨이나 데이비드 노블에 이르러서도 역시 신기술은 지배계급의 요청에 따라 고안되고 배치된 죽은 노동이었다. 특히 인간의 활동을 기록하고 저장하고 재생산하는 정보화 기술은 자본의 소유주나 대리인들을 대신해서 인간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다. 공장 노동자들을 미리 프로그램화된 속도를 좇아가는 종속적인 위치가 되고, 사무직 노동자들은 감시를 받으며 타자를 칠 수 밖에 없다. 허버트 실러는 사회 전체가 기업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위성, 광섬유, 컴퓨터 네트워크로 인한 미디어 폭발 역시 소수의 미디어 기업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프랭크 웹스터와 케빈 로빈스 역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기업을 비롯한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순응적인 소비자로 길들이기 위해 사용된다면서, 이런 흐름에 동의하지 않거나 불만을 가지는 소수자들을 억누르기 위하여 최신 감시기술이 등장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이들에게 있어 정보 기술은 기술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 자본가들의 의도가 구현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닉 다이어-위데포드가 『사이버-맑스』에서 지적하였듯이 저항으로서의 기술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어 왔다. 맑스는 기술에 대한 비관 속에서도 커뮤니케이션 혁명에 대해 긍정적으로 판단하였다. “근대 산업이 창출했고, 각지의 노동자들을 서로 연결시켜줬던 향상된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도움”으로 “끊임없이 확대되는 노동자들의 연합”이 힘을 얻을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이러한 낙관들은 특히 시민들이 직접 다양한 정보를 취합하거나 발신할 수 있는 인터넷의 등장에 이르러 극대화되었다. 지배 권력에 의해 왜곡되기 쉬운 소수의 언론에 의존하지 않고 시민들이 직접 소통하고 직접 행동에 나서면서 다양하게 권력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 아고라 광장에서 실현되었던 직접민주주의의 상징적 실현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기술에 대해서는 이처럼 상반된 전망이 병행하여 존재해 왔다. 한국 진보운동은 인터넷에 대하여 두 가지 전망을 모두 표방해 왔다. 진보네트워크센터는 한편으로는 인터넷을 통해 진보적 사회운동을 지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터넷에 대한 검열과 감시에 맞서 활동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물론 설립 당시에는 인터넷의 자유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좀 더 우세하였던 것이 사실이지만, 행정심의기관인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설립된 것이 1994년이고 전자주민카드가 도입되려던 시기가 1996년이었던 만큼 국가의 검열과 감시에 마냥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기술에 대하여 병행적 전망을 갖는다고 하여 기술을 정치중립적인 활용 대상으로서만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랭던 위너와 같은 사람은 기술 자체에 대한 비관이나 낙관, 혹은 중립적 견해를 모두 떠나, 핵기술과 같은 거대 기술이 일단 도입된 후 결정적인 정치적 효과를 발휘하는 권력 과정에 주목한 바 있다. 분명 기술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 구성되는 사물이며, 다양한 정치세력의 권력 투쟁의 장이다. 그 권력 투쟁의 결과물로서 기술은 권력의 의지를 반영하고, 권력이 의도하는 효과를 낳는다.

오늘의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인터넷은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의 낙관주의에서 멀리 떨어져 국가 권력의 의지가 충실히 반영되는 공간으로 변모해 왔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억압적 국가가 최근 몇 년간 인터넷에 촘촘한 진을 쳐 왔으며 앞으로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넷 통제는 이명박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국가 권력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 국가 권력이 발동하는 방식은 과거와 사뭇 다르다. 사이버 공간에서 국가 권력은 직접적이기 보다 간접적이며, 은밀하면서도 방대하고, 폭압적이기 보다 공익적이다.

 

국가의 개입
이명박 정부의 촛불 네티즌에 대한 온라인 추적과 형사적 처벌, 적극적이고 방대한 이메일 압수수색, 그리고 인터넷 실명제 확대와 사이버 모욕죄의 도입은 그러한 통제적 국가 전략을 실감나게 한다. 그러나 인터넷 실명제나 사이버 명예훼손, 네티즌에 대한 형사적 처벌은 이명박 정부 이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특별히 억압적인 정부임에는 틀림없지만, 인터넷 공간에서의 국가 권력의 문제는 전통적인 억압적 속성에 관한 문제이다. 특히 인터넷 실명제의 사례에서는 서로 성격이 다른 정부를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국가의 인터넷 통제 욕구와, 그 의지를 충실히 반영해 온 인터넷 기술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인터넷에 실명제가 채 도입되기 이전의 시절, ‘노사모’로 대표되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적극적 활동에 힘입어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참여정부는 그 화려한 등장 직후인 2003년 3월부터 인터넷 실명제 정책을 들고 나왔다. 그것은 정부가 이미 오래 전부터 실명제를 준비해 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보통신부는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1998년 12월, PC통신과 인터넷 등 온라인서비스 이용자에 대하여 반드시 실명으로 가입하도록 하고, 기존 가입자도 주민등록번호와 성명이 맞지 않으면 강제 해지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온라인서비스 이용증진방안’을 마련, 발표한 바 있다. 정보통신 서비스에 수요자들이 비실명으로 가입하도록 방임하는 것이 건전치 못한 통신문화를 이끌고, 이용요금의 연체가 사업자들의 채산성을 악화시키는 주요원인이라는 명분이었다. 이를 위해서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의 신용정보공동관리시스템과 행정자치부의 주민전산망, 한국통신의 전화번호 안내시스템, 신용카드조회업자의 신용정보시스템 등을 연결하는 실명확인 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계획도 함께 발표하였다.

국내외적으로 실명제 실시에 대한 전례가 없는 데다 국가가 강제하는 실명제에 대한 반감이 상당한 가운데 실제 실명제가 도입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뚝심은 마침내 2004년 3월 「공직선거법」 개정과 더불어 빛을 보았다. 허위사실 공표나 후보자 비방 등 공정 선거를 해치는 부정 선거운동을 방지하겠다는 명분에서였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선거운동 기간 중 모든 인터넷언론 게시판은 실명확인이 된 이용자에 한하여 글쓰기를 허용해야 하고, 관련된 기술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 처분을 받는다. 본격적으로 의무적 국가 실명제가 도입된 것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 인터넷 실명제가 실시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세계적으로 드문 주민등록번호 제도 덕분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소위 절차적 민주화 시절에도 건재함을 자랑하며 오늘에 이른 주민등록번호 제도는, 모든 국민에게 출생 시 고유번호를 부여하여 사망 시까지 하나의 번호로 관리하는 제도이다. 번호로서 국민 개개인이 어떤 글을 썼는지 파악하고 수사기관이 추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실명제는 등장 시점부터 익명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민주적 정치참여를 위축시키며, 각 인터넷 사이트로 하여금 주민등록번호의 수집과 오남용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특히 당사자인 인터넷 언론이 강하게 반발하고 저항해 왔다. 2006년 5월 지방선거에서는 ‘민중의 소리’가 실명제 시스템을 거부하였다가 과태료 처분을 받았으며, 200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는 ‘참세상’이 과태료 처분을 받고 현재 재판 중이다. 작은 규모의 인터넷 언론사일수록 인터넷 실명제로 인한 독자 여론의 위축이 심각한 문제이지만, 저항에 따른 재정적 타격은 큰 부담이다.

이용자 입장에서 인터넷 실명제는 직접적인 표현의 자유 침해를 낳아 왔다. 2007년 12월은 대통령 선거 시기이기도 하였지만 ‘차별금지법안’을 둘러싼 논란이 커질 때였다. 성별, 연령, 인종, 피부색 등 13개 영역에 대한 차별을 금지했던 본래 법안이 입법 과정에서 병력, 출신국가, 성적지향, 학력, 가족형태, 언어, 범죄경력 등 7개 영역을 삭제한 것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성소수자 등 이 법안의 이해당사자들은 인터넷언론 게시판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참여할 수 없었다. 자신의 정체성이 실명으로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통령 후보자들의 입시 정책에 대해 공개적으로 평가할 계획이었던 한 청소년 단체의 활동이 실명제로 인하여 크게 위축되었다. 이 단체는 자신들의 활동에 호응하는 청소년들이 실명 인증을 하고 인터넷에 글을 쓰는 과정에서 주민등록번호 상 나이가 노출되어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하였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청소년의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직선거법」으로 입법화된 인터넷 실명제는 2007년 일반 포털에도 확대됨으로써 선거 시기를 벗어난 일상적 실명제가 시작되었다. ‘악플’로부터 인권침해를 방지한다는 명분에서였다. 2007년 7월 개정 발효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일일 방문자수 10만 명 이상의 포털, 언론, UCC 사이트들은 상시적으로 실명확인이 된 이용자에 한하여 글쓰기를 허용해야 하고, 관련된 기술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 처분을 받는다.

이명박 정부는 기존의 실명제를 확대하였다. 2009년 4월 실명 확인 대상사이트가 37개에서 153개로 확대되었으며, 이를 더욱 확대하기 위한 정부의 개정법률안이 현재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또한 2009년 개정된 「인터넷 주소자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인터넷 도메인을 사용하려는 자가 실명이 아닐 경우 인터넷주소관리기관은 그 도메인이름을 말소해야 하고, 관련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 처분을 받는다.

이처럼 한국 정부는 수년에 걸쳐 인터넷 실명제 도입을 시도해 왔고, 각각의 명분은 건전한 통신문화와 사업자 채산성, 공정 선거, 악플 방지 등 그때그때 변화해 왔다. 마침내 실명제가 도입된 시점에 국가가 얻을 수 있는 효력은 때마다 달라지는 개별적인 명분 그 이상의 것이다. 시민의 표현의 자유와 전통적으로 긴장 관계를 가져 온 국가의 검열 의지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시민 누구에게나 주어진 강력한 표현매체로서 각국 정부는 이를 효과적으로 규제하기 위한 제도 도입에 골머리를 앓아 왔다.

인터넷에서 강력한 국가 권력의 개입은 한국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잭 골드 스미스와 팀 우는 『인터넷 권력 전쟁』에서 국가 권력은 한동안 인터넷을 관망하였으나 곧 ‘반격을 시작하였다’고 고찰하였다. 한때는 인터넷 루트 권한이 기술자 커뮤니티에 의해 자율적으로 관리운영되었지만 지금은 사실상 미 정부 주도 하에 관리되고 있다. 기술자 집단의 저항은 제압되었다. 냅스터로 대표되는 파일 공유 기술은 한때 국경을 넘어서 활발하게 사용되었지만, 결국 일국적 법 체계 하에 무릎을 꿇었다.

 

신자유주의적 통제
아마도 국가 권력이 한동안 인터넷을 관망하였다면 그것은, 리차드 바브룩과 앤디 카메론이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에서 통찰한 바대로, 신자유주의 이념에 충실하게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는 신좌파와 신자유주의가 인터넷에 대한 기술결정론적 유토피아주의 속에서 영합했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투쟁에 실패한 결과이다. 히피와 흑인시민권 운동은 국가 억압과 문화적 포용에 의해 분쇄되었고, 광장은 사라지고 시장만이 남았다. 인터넷 가상 계급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경제적인 신자유주의와 국가 권력의 규제 완화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해 왔다. 여기서 인터넷 자유주의는 자유 시장으로서 완성되려 한다는 것이다.

비록 ‘가상계급’의 구성원들은 히피가 획득한 문화적 자유를 누리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에코토피아’(히피의 이상)를 건설하는 싸움에 더 이상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체제에 반대하는 공공연한 반역 대신에 이제 이 하이테크 장인들은, 개인의 자유가 기술적 진보와 ‘자유시장’의 제한들 속에서 일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을 뿐이라고 받아들인다.
–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 (1994년)

인터넷 기술결정론에 대해 통렬한 그들의 비판에는 여전히 귀 기울일 필요가 있지만, 사실 인터넷의 발달에 있어 국가는 부재하기는커녕 매우 비중이 큰 행위자였다. FTA와 같은 국가간 협정이나 WTO와 같은 다자적 무역체제 내의 국가 관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 국가는 시장에서 자국의 기업 환경을 유리하게 형성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다만 주거권이나 건강권 같은 전통적인 사회권 영역에서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다하지 않고 방관하는 작은 정부를 표방하고 있을 뿐이다. 이 분야에서 이들의 의무 방기와 예산 축소는, 체계적이고 공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다른 의미로 적극적인 국가 행위이다.

특히 지적재산권을 강화하기 위해 각국 정부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해 왔다. 정보 상품은 7,80년대 축적의 위기를 지나오면서 자본이 새로운 상품으로 발굴한 영역이다. 하지만 디지털화된 정보는 그 속성상 한번 사용된다고 해서 그 가치가 감소하거나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원본이나 사본에 대한 구분 없이 누구나 똑같이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이용자 입장에서는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자본의 입장에서는 정보 상품에 대한 인위적 소모성을 창출하여 교환 가치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각국이 지적재산권 분야의 법률과 규제 강화에 빠르게 나선 이유이다. 한국의 경우 2000년 저작권법 개정으로 인하여 전송권의 개념이 신설되었고, 기존에 비영리적 활동에서 인정되어 온 공정 이용(fair use)조차도 어느 날 갑자기 불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저작물 이용은 불법적일뿐더러 비윤리적인 해적 행위로 비난받고 있다.

무엇보다 인터넷의 발달에 있어 국가의 기능은 인프라 구축 영역에서 빼놓을 수 없다. 1990년대 주요 국가들의 정부들은 앞 다투어 정보통신시장을 개방하는 동시에 ‘정보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는 중장기 정보통신정책을 발표했다. 정보고속도로는 화상, 음성, 자료 등 다양한 형태의 정보들을 디지털 신호로 통일시켜 광케이블을 통해 교환하는 종합적인 정보통신기반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 사회기반시설) 정책이다. 다만 전화망 사업이나 도로/철도 사업과 달리 통신 시장을 개방하고 민간기업의 투자를 적극 유치한 것이 과거와 다른 점이다. 그러나 과거와 다른 형태일지언정, 표준화 정책이나 신성장동력 육성 등 국가의 적극적 기능은 여전히 건재하다. 민영화와 규제 완화로 인하여 일반 시민에 영향을 미치는 요금 규제, 망중립성, 그리고 보편적 서비스 등의 영역에서 소극적일 뿐이다.

특히 국가는 인터넷에 대한 검열과 감시에서 한 번도 적극적인 행위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적이 없다. 국가의 의도는 기술적 형태로 더욱 철두철미하게 관철된다는 점에서 과거보다 더욱 적극적이다. 지금 국가의 존재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 통제 형태가 과거와 다르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위축
과거 ‘검열’이란, 공권력이 사전에 책이나 음반, 영화의 내용을 검사하고 그 발표 여부를 허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매일 수십만, 수백만 건의 내용 등록이 이루어지는 인터넷에 대하여 사전에 검사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적어도 절차적 민주주의가 제도화된 국가에서는 위헌 논란을 비껴갈 수 없다. 그래서 오늘날 정권이 선호하는 것은 위축(chilling effect), 즉 자기 검열이다.

물론 ‘미네르바’의 사례처럼 자신이 올린 글로 인하여 형사 소추 등 직접적인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표현의 자유 침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국가 검열은 앞서 살펴본 ‘실명제’의 형태에 더욱 가깝다. 즉 글을 올리면서 스스로 국가 권력의 시선을 의식하게끔 하는 것이다. 실명제 효과를 둘러싼 핵심적 논란은, 정책 목표인 악플은 줄지 않았지만 정치적 반대 의견이 줄어들었다는 데 있다. 자신의 신원을 다 밝힌 상태에서 글을 써야만 하기 때문에 평범한 개인으로서는 특히 국가 권력에 도전하는 글쓰기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기 검열의 메카니즘이 작동하는 것이다.

자기 검열은 이른바 감시 권력을 내면화하는 규율 권력의 형태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규율 권력이 진정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주먹의 힘이 과시될 필요가 있다. 규율을 따르지 않을 경우 자신에게 닥칠 불이익이 구체적으로 상정되어야 내면화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명박 정부 등장 후 인터넷 표현물을 이유로 수사력을 총동원하여 네티즌을 체포하고 처벌하는 공권력의 발동 과정이 살벌하게 공개된 점은 특히 시사적이다. 미네르바 사건에서의 표현의 자유 침해는 미네르바 개인에 대한 탄압 뿐 아니라 그 과정을 지켜본 전 국민에 대한 위축 효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자신 또한 의견을 표현하는 데 있어 감수해야 할 위험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 검열은 내면의 싸움만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견해를 감시하고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거대 권력의 암묵적인 의사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실제로 미네르바 체포 후 비슷한 비판글을 올리던 네티즌들이 연달아 절필을 선언하였다.

이명박 정부의 인터넷 통제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첫 사례라 할 ‘광우병 괴담’ 사건에서 실제로 경찰대학의 모 교수는 인터넷 여론에 대한 수사권의 신속한 개입이 ‘냉각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강변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축 효과이며 인터넷 시대 검열 방식이다. 수사력을 동원한 체포 가능성 ‘엄포’와 ‘금지글’에 대한 암시는 이 정부 들어 가장 활발하게 동원되는 검열 방식이다.

이명박 정부가 등장하기 전인 대통령 선거 때도 마찬가지였다. 선거는 12월에 있었는데, 네티즌들은 몇 달 전부터 선거법 위반으로 소환당해 왔다. 이듬해 6월 검찰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가 선거사범으로 입건된 네티즌이 504명, 총 선거사범 중 35.2%에 달한다. 놀라운 점은 전체 입건 건수 가운데 93.8%가 선거관리위원회의 개입이나 일반인의 신고가 아닌 수사기관의 ‘인지’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렇게 경찰서에 불려 다닌 네티즌이 1천여 명 이상이었다는 사실이다. 검찰은 이에 대해 “네거티브 선거운동을 선거의 장에서 추방하겠다는 수사기관의 의지에 따른 적극적 인지수사활동 전개”라고 평가하였지만, 이 수사는 정치적인 효과를 발휘하였다. 2002년에 비하여 2007년 대통령 선거가 지나치게 조용하게 치러진 것이다. 제도언론이 입조심을 할 때도 과감한 비판과 후보자 검증을 멈추지 않았던 인터넷이 UCC가 만개하던 시절에 오히려 크게 ‘위축’되었다. 얼어붙은 인터넷은 2008년 총선 때도 풀리지 않았다.

인터넷 게시물에 대한 국가 기관의 대응에서 중요한 수법 중 하나는 개인정보의 수집이다. 촛불 시위가 한창일 무렵, 문화부는 ‘인터넷 조기 대응반’을 설치하고 경찰청은 ‘인터넷 전담 대응팀’을 추진하였다. 이 조직들은 몇 달 후 비판적 네티즌들에 대한 개인정보 수집과 사찰을 위해 활동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지난해 10월 민주당 장세환 의원이 문화부에서 하루 두 차례씩 정부정책에 비판적인 인터넷 댓글을 모니터링해 청와대·대검찰청·경찰청·방통위 등 42개 정부부처에 전달해 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과정에서 사정기관 등에 보고된 누리꾼의 아이디 규모가 7~800개에 이른다고 했다. 또 이즈음 다음 아고라나 네이버 블로그에서 경찰의 눈에 띄는 글을 올린 네티즌들의 신상 정보가 1시간 안에 그 ID, 가입 날짜, 최근 로그인 날짜, 이름(실명), 주민등록번호, 생년월일, 전화번호 등 상세한 사항까지 경찰에 제공되어 왔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지난 9월에는 경찰청 보안과가 실시간 인터넷 감시시스템을 발주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시스템은 경찰이 지정하는 특정 인터넷 사이트의 게시물과 댓글, 아래한글·액셀 등으로 제작된 첨부파일 내용을 실시간으로 검색·수집해 데이터베이스 형태로 저장하고 검색할 수 있게 돼 있다.

이와 같은 감시는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한편 개인정보에 대한 자기결정권의 침해라는 측면에서 전통적인 사생활의 권리에 대한 침해이기도 하다. 최근 사회적 통제를 목적으로 개인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관리하는 경향이 많은 국가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경찰 국가
정보사회에서 개인정보 유출은 필연적인 사건이다. 수기로 기록이 이루어지고 수집되던 과거와 달리 디지털화된 개인정보는 대규모로 수집되고 집적될 수 있다. 디지털 개인정보는 가공하여 이용하기에도, 제3자에게 제공하기에도 훨씬 용이한 형태이며 그에 따른 권리 침해 역시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오늘날 개인정보 유출, 무단이용, 조작이 대규모로 이루어질 수 있는 기술적 환경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또한 원격 거래와 원격 행정의 발달은 개인정보의 이용과 오용을 동시에 유발한다. 최근 온라인화에 따른 비대면 접촉이 늘어나고 원격 거래와 원격 행정이 활발해진 것은 일정하게 국가조직과 기업 업무의 효율적인 수행을 꾀하기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개인정보를 매개로 한 신원확인 요구가 사회적으로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타인의 개인정보에 대한 요구나 그에 대응하는 신원 절도가 과거보다 급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사회경제적 배경은 종합적으로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을 통틀어 사회 전체적으로 개인정보의 방대한 수집과 이용을 독려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에 따른 권리 침해를 유발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개인정보 데이터베이스의 방대한 구축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거래와 행정 서비스는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오기도 하였지만, 정보의 주체인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기도 한다. 실제 자신의 개인정보가 어떠한 경로로 수집되어 어떻게 이용되고 제공되고 있는지 갈수록 정보주체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워지고 있으며, 그 과정에 개입하여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기도 쉽지 않다.

개인정보의 수집과 이용이 늘어나면 개인정보에 기초한 사람의 분류, 낙인, 차별을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개인정보 데이터베이스에 실현되어 있는 한 개인의 정보가 그에 대한 행정서비스와 고객서비스의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개인정보를 축적·처리하는 기관은 개인에 대한 강력한 통제와 감시의 수단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 된다. 개인정보를 토대로 일정 부류의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낙인을 찍는 일(예컨대, 신용불량자나 취업기피인물명단의 작성·유통)이 얼마든지 가능해지게 되고, 그 결과 그들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키거나 선택권을 제한하게 만들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추진이 중지되었지만 천호동에 설치될 뻔한 CCTV가 가져왔을 효과는 성매매 여성들의 영원한 사회적 격리이다. 호주 정부가 1980년대 전자주민카드를 추진했을 때 그들이 내세웠던 명분도 ‘불법 이민’에 대한 철저한 적발과 소탕이었다. 최근 각국의 출입국 관리의 강화와 전자 여권의 도입 역시 테러 방지라는 명목 이면에 국제 노동력 이동을 통제하고자 하는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닿아 있다.

이러한 감시 기술은 매우 공익적인 명분으로 확대되고 있다. 범죄에 맞서기 위해 전국적으로 CCTV를 촘촘하게 확대하고, 24시간 경찰이 모니터링한다. 범죄자는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격리해야 하기 때문에 전자팔찌를 채우고 구속 피의자와 소년범 단계서부터 DNA를 국가가 관리한다. 수사의 효율성을 위해 범죄자 뿐 아니라 피해자와 참고인의 개인정보를 범죄정보관리시스템에 입력하여 관리하고, 현장에서 수습한 피해자와 통행인의 DNA 역시 국가가 보관하여 평생 관리한다. 범죄 수사를 위해 통신사업자가 감청 장비를 구비하도록 의무화하고, 모든 인터넷 이용자의 이용 기록을 보관한다.

국가가 인권을 제한하는 가장 대표적인 논리가 공공의 이익이다. 우리 헌법에서도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제한할 수 있다. 범죄와 테러가 날로 늘어가는 오늘날의 국가는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치안의 행위자를 자임하며 인권을 제한하는 감시 기술을 확대한다. 그러나 공익적인 명분 앞에서 시민은 감시에 저항하기 보다 협조한다.

범죄와 테러가 늘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시장논리와 빈곤의 증대, 공동체의 파괴 때문에 우리 사회는 점점 위험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계수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와 경찰국가의 강화”에서 지적했듯이, 타인의 자유를 제약하고 유린하는 것을 능력의 발휘로 정당화하는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시장논리 때문에 도시에서 ‘일상적’인 범죄와 일탈이 증가한다는 사실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빈곤의 세계화, 경제적 격차의 증대가 가져오는 계층 간의 소통단절, 한 사회를 묶어주는 공통규범의 소멸이 위험과 범죄의 원천이라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범죄로부터 안전한 도시와 사회를 만드는 것이며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얻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일상적인 사회규범을 대신할 법적 규범을 정비하고 강화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경찰의 집행력을 확대·강화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새로운 형태의 경찰국가의 득세로 이어지고 있다.

즉, 치안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감시 권력의 확대를 꾀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치안 위기의 사회 구조적 원인과 해법을 외면한 결과이다. 아니, 때로는 그 구조적 문제를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목숨을 앗아가는 범죄가 횡행하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개인은 불시에 나타날지 모르는 낯선 사람을 매일매일 경계해야 하는 처지이다.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낯선 사람을 경계하도록 하는 풍토는 이주민과 같은 ‘타자’의 범죄에 특별히 주목한다. 이때 CCTV와 같은 감시 기술은 공포스럽고 혐오스런 타인을 주시하여 나의 안전을 지켜주는 고마운 국가 권력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으로 하나둘씩 늘어간 CCTV는, 결국 경찰력의 강화로 귀결된다. 신자유주의적인 경찰국가가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는 신자유주의 수사학이 가장 모순적인 양태를 보이는 분야가 바로 이 경찰력의 강화이다.

과거에는 국가기관에 의한 미행이나 동태파악 등 인적 방식의 감시가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면 오늘날에는 같은 정보가 CCTV 등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을 통해 수집·처리되는 것으로 인하여 달리 문제시되고 있다. 기술적 감시는 인격적 감시와 달리 자신이 감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어렵다. 훨씬 은밀하면서도 훨씬 광범위한 개인정보 수집이 가능한 것이다.

통신수단의 확대와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이에 대한 도감청의 침해성도 과거보다 더욱 큰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지난 11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 밝힌 바에 따르면, 지난 6년간 집과 사무실에 대한 유선전화, 휴대전화 문자와 음성, 팩스, 인터넷 메일, 패킷 감청은 물론 실시간 위치추적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이고 철저한 감시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긴 세월 동안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발달된 통신 기법을 활용하여 대개의 감시가 원격으로 은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큰 충격을 준 것은 인터넷 패킷 감청의 실태이다. 패킷 감청은 인터넷 회선을 오가는 신호 전체에 대한 감청으로서 그 사생활 침해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 패킷 감청을 이용하면 대상자가 인터넷을 통해 접속한 사이트 주소와 접속시간, 대상자가 입력하는 검색어, 전송하거나 수신한 게시물이나 파일의 내용을 모두 볼 수 있다. 이메일과 메신저의 발송 및 수신내역과 그 내용 등 통신내용 일체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국가의 감시로부터 자유롭고자 해외 이메일을 이용하는 것도 국내 인터넷 회선을 거쳐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패킷 감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전자감시의 가장 나쁜 점은 감시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모든 사람이 잠재적인 용의자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무죄추정의 원칙과 달리, 혐의를 벗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용의자가 되어 감시에 협조해야만 한다. 내가 강도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는 길은 일단 혐의자로 CCTV에 찍히는 것이고, DNA 채취에 협조하는 것이며, 나쁜 글을 올릴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일단 실명을 밝히고 인터넷에 글을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때로는 불쾌하지만 감시에 협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선택권의 외피를 쓰고 있는 감시 시스템은 사실 그에 대한 거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는 CCTV에 촬영되기를 거부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CCTV에 촬영되지 않고서 강남이나 서울시를 활보하거나 일할 수 없다. 전자감시 시스템으로의 편입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데 선택권의 진정한 역설이 존재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인권 침해
인터넷에서 국가 권력의 문제는 분명 전통적인 인권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권 문제에 대응하기에 기존의 인권 담론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표현의 자유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위축 효과는 아직까지 인권 침해로서 입증할 수 없다. 국가 검열은 인권 침해로 인정되지만 그것은 주로 사전적인 규제나 당사자에 대한 직접적인 불이익이 있을 경우에서이다.

보이지 않는 경찰 국가 역시 인권 침해로서 입증할 수 없다. 범죄 예방이나 테러 방지와 같은 구체적인 공공의 이익에 비해 감시에 반대한다는 주장은 막연한 사생활 보호론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더구나 개인정보의 주체라 할 지역 주민과 이해당사자들이 기꺼이 감시 기술의 도입을 찬성한다면 그 외의 사람들이 반대할 명분은 상당히 약해진다. 실제로 강남구 주민들의 80%가 CCTV 도입을 찬성했다고 한다. 이들은 CCTV에 촬영되는 대가로 자기 재산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길 원한다. 개인정보는 경제적 거래의 대상인 것이다. 감시는 폭압적이기 보다 자발적인 협조 속에 다가온다.

억압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에 대한 저항도 쉽지 않다. 정보인권에 대한 진보 진영의 관심은 아주 미미하다. 특히 억압적 기술의 도입이 공익적 명분을 띄고 있을 때 대항 논리는 더욱 궁색하다.

해법은 권력의 속성에 대한 통찰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악플 방지나 범죄 예방 등 국가 권력을 호출하는 개별 사건의 중립적 명분을 넘어서서 국가 권력과 그 기술의 경향성을 예민하게 포착할 필요가 있다.

우리보다 먼저 CCTV 논쟁을 겪었던 영국의 경우 ‘범죄 이전’ 효과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분명 CCTV는 특정 지역에서의 범죄율은 저하시켰지만 국가 전체적인 범죄율은 변화가 없었으며 결국 범죄를 다른 지역으로 이전시켰을 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특히 범죄 이전 효과가 ‘청정 구역’과 ‘우범 지역’을 나누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CCTV는 곧 신자유주의 영국 사회에서 사회 계급의 분리와 양극화 현상의 한 지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효과야말로 범죄 예방에 대한 CCTV의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국가 권력의 작동방식이자 그 기술의 기능이다.

다시 사이버 망명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사이버 망명은 국가로부터 탈출했는가.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 보였던 초국적 네트워크가 다양한 법제도와 침해적 장치로 점차 국가에 포섭되고 있는 상황임에 분명하다. 패킷 감청으로 구글 메일까지 다 읽히는 상황에서라면 인터넷 초기 낙관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국경을 넘어선 듯 했던 그 땅은 다국적 인터넷 기업의 영토일 뿐이다. 국가로부터의 탈출이 국제적 상업 자본으로의 포섭인 셈이다. 구글 역시 한국의 소비자에게 그 점을 정확히 의도하였을 것이다.

물론 사이버 망명의 조소 효과는 높이 평가한다. 조소에는 적어도 실명제 확대의 정치성을 폭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조소가 힘을 가지려면 그 이후로도 저항이 계속되어야만 한다. 국가에 이미 포섭되어 있는 포털의 공간을 벗어나, 다국적 자본의 판매대를 벗어나 계속적인 탈출을 꿈꿀 줄 알아야 한다. 악플을 방지한다는 공익적 명분을 넘어 국가 권력이 인터넷 실명제를 통해 꾀하고자 하는 억압적 효과를 통찰하고, 그것을 민주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실천할 때이다.

 

 

진보평론 42호(2009년 겨울호)에 실린 글입니다.

2009-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