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네트워커

정보혁명과 노동가치

By 2003/12/26 10월 29th, 2016 No Comments

심층연재

강남훈

오늘날 세계 최대의 부자는 빌 게이츠(Bill Gates)이다. 그의 재산은 주가의 변동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대략 500억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재산을 현금으로 바꿔서 은행에 맡겨놓고 이자만 쓰겠다고 작정한다면 하루에 80억원씩 쓸 수 있다. 그는 물려받은 재산도 없었고, 대학을 제대로 졸업한 것도 아니었으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을 만들지도 않았는데, 억만장자가 되었다. 얼마나 환상적인 일인가?

환상적인 전망들

이러한 현상들을 보고 다니엘 벨(Daniel Bell),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와 같은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오만하게 자본주의에 이르러 역사가 완성되었다고 하면서 ‘역사의 종말’을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산업혁명에 의하여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였듯이, 정보혁명을 통하여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이행하고 있다. 산업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를 의미한다면, 정보사회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든지, 적어도 과거의 모순이 극복된 자본주의 사회일 것이다. 둘째, 과거에는 노동과 자본이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 혹은 부의 원천이었는데, 이제는 지식이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 혹은 부의 원천이 되었다. 따라서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전제로 하면서 부의 원천을 잉여가치라고 규정하고 있는 노동가치론은 타당성을 상실할 것이다. 셋째, 과거의 경제에서는 수확체감의 법칙이 적용되었는데, 지식기반경제에서는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된다. 지식은 많이 사용할수록, 또한 여러 사람이 나누어 쓸수록 가치가 커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기적으로 발생하던 불황도 사라지거나 완화될 것이다. 넷째, 경제 내에서 지식산업의 비중이 커지고, 노동자들은 점점 지식노동자로 바뀌어 간다. 기업은 정보가 풍부해짐에 따라 유연한 형태로 바뀌게 되고, 나아가 사회 전체가 지식의 창출과 보급에 적합한 방식으로 변하게 된다. 다섯째, 정보가 풍부해짐에 따라 세계 경제가 점점 더 통합되어가는 지구화(globalization) 경향이 강화될 것이다. 지식과 정보는 쓴다고 해서 가치가 줄어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확산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구 전체의 부가 증가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소위 ‘신경제’의 거품이 붕괴하였음에도, 구조조정, 민영화,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논의에서 볼 수 있듯이, 현실의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서 한층 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번에 마련한 ‘정보혁명의 정치경제학’이라는 심층연재에서는 앞으로 네 번에 걸쳐서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을 비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첫 번째 주제는 정보혁명은 노동가치론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가치론에 의해서 잘 설명된다는 것이다.

정보혁명의 두 가지 요소

산업혁명이 물건을 만드는 방법에서의 기술혁신을 의미하듯이, 정보혁명은 정보를 처리하는 방법에서의 획기적인 기술혁신을 의미한다. 인간이 정보를 처리하는 기술은 전신,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 과거부터 꾸준하게 발전하여 왔다. 그럼에도 1970년대 이후를 정보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두 가지 핵심적인 발명을 중심으로 정보처리기술이 획기적인 변화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자료를 디지털 형식으로 처리하는 장치이고, 인터넷은 네트워크의 일종이기 때문에, 정보혁명을 디지털 네트워크 혁명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기술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흔히 ‘디지털’이나 ‘네트워크’라는 정보혁명의 두 요소를 신비화시킨다. 조지 길더(George Gilder)는 물질폐기론을 주장하였고, 니콜라스 네그로폰테(Nicholas Negroponte)는 아날로그 원자인 아톰(atom)과 디지털 원자인 비트(bit)를 비교하면서, 비트는 색깔도, 무게도 없지만, 빛의 속도로 여행한다는 식으로 비트를 찬양하였다. 그러나 디지털과 네트워크에는 물질을 대신하거나 노동을 대체할 만한 아무런 신비한 내용이 없다.
디지털(digital)이란 정보를 비트의 묶음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비트란 0 아니면 1의 값을 가지는 단위를 말한다. 따라서 비트로 표현한다는 말은 2진수로 표현한다는 말이다. 모든 숫자는 2진수로 표현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정보는 숫자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 아날로그(analog) 정보들이 많이 있다. 어떻게 그림이나 음악, 냄새 같은 정보를 숫자로 바꿀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약속에 의해서 가능하다. 가상적인 예를 들어보면, 문자 ‘가’는 ‘00001’로 표현하기로 약속하고, 음악의 ‘도’는 ‘10001’로 표현하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약속들은 흔히 표준(standard)이나 형식(format)이라고도 불린다. 이렇게 정보를 약속에 따라 0과 1만을 사용해서 표현한다는 것은 신비스러운 고도의 기술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디지털 혁명을 가능하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이 약속 때문이다. 약속에 의해서 정보를 표현하니까 정보의 크기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보를 두 가지 숫자만으로 표현하기로 약속하였으니까, 인간이 두 가지 상태를 구별하고 조작할 수 있는 모든 물질은 정보를 저장하고 전송하는 재료가 될 수 있다. 구리, 반도체, 전파, 단백질, 탄소 나아가 양자까지도 모두 정보 전달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약속은 여러 가지 약속을 혼합하고, 약속의 약속을 만드는 식으로 얼마든지 압축되고 혼합될 수 있는 것이다.

‘약속’으로 이뤄지는 디지털과 네트워크

정보혁명의 두 번째 요소인 네트워크(network)도 마찬가지이다. 네트워크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정보전달에 관한 약속이 미리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모스 부호와 같이 신호의 의미를 미리 정해둔다든지, 말이 끝나면 ‘오버’ 등의 말을 끝에 덧붙이겠다는 등의 약속이 필요하다. 이러한 약속은 일반적으로 통신규약(protocol)이라고 부른다. 인터넷은 TCP/IP(Transmission Control Protocol/Internet Protocol)라는 프로토콜에 입각해서 전 세계의 컴퓨터들을 연결한 네트워크로 정의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정보혁명의 두 번째 요소인 네트워크의 경우에도 그 기술의 근본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약속이 존재하고 있다.
흔히 네트워크에서는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 혹은 네트워크 외부성(network externality)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것은 흔히 ‘재화의 가치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에 의존할 때’ 발생하는 효과로 정의된다.(1) 이메일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질수록 이메일의 가치가 늘어나는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 네트워크 효과도 무슨 신비한 기술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경로가 많아지고, 네트워크의 콘텐츠가 증가하고, 네트워크 상에서 만들 수 있는 공동체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정보혁명의 두 가지 요소들은 신비한 기술의 등장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변화에서 나타난 것이다. 정보혁명의 창세기가 있다면 ‘태초에 약속이 있었다’라고 적어야 할 것이다. 약속은 사회적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정보혁명은 생산력이 점점 사회화되어간다는 정치경제학의 기본 명제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정보상품의 가치

이제 정보상품의 경우에는 더 이상 노동가치론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런 주장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정보상품 중에서는 첫 단위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지만 다음 단위부터는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다. 소프트웨어라든지 시디에 담겨진 음악이나 디비디에 담겨진 영화가 바로 그런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한 카피를 더 만드는 데에는 노동이 거의 안 들지만, 수십만원씩에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품의 경우에도 상품의 한 카피(copy)를 만드는 데 투하된 노동은 없지만 그 상품의 버전(version)을 만드는 데에는 막대한 노동이 투하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버전을 생산하는 데 투하된 노동가치가 여러 카피에 나누어서 실현된다고 생각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런 계산은 정치경제학자의 머리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시장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픽 소프트웨어와 윈도XP를 비교해 보면, 개발비가 훨씬 적게 들어간 그래픽 소프트웨어가 개발비가 더 많이 들어간 윈도XP보다 더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래픽 소프트웨어의 수요량이 윈도XP보다 작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보상품의 가치는 버전을 단위로 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버전을 단위로 해서 생각하더라도, 어떤 정보상품의 경우에는 버전을 만드는 데 노동이 거의 들지 않는데도 매우 비싼 값에 팔리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는 노동이 아니라 정보나 지식이 가치를 창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노동의 비중보다 정보나 지식의 비중이 점점 커진다면, 노동가치론은 결국 정보가치론으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노동가치론이 정보가치론으로 대체된다?

첫째, 지식과 노동을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적 노동의 특징은 바로 지식을 발휘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거미는 직조공과 유사한 작업을 하고, 꿀벌은 벌집을 지을 때 많은 건축가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그러나 최악의 건축가가 최상의 꿀벌과 다른 점은 건축가는 실제로 집을 짓기 이전에 상상 속에서 그의 구조물을 세운다는 것이다. 노동과정이 끝날 때마다 우리는 노동자가 상상 속에 처음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결과를 얻는다.”(자본론 제1권 제7장) 인간적인 노동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구상과 실행의 통일이다.(2)
지식은 하드웨어(hardware) 형태이든, 소프트웨어(software) 형태이든 인간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웨트웨어(wetware) 형태이든 모두 인간 노동의 결과이거나 인간의 노동 속에서 드러난다. 오늘날 소프트웨어나 컨설팅 같은 형태로 지식 자체가 바로 상품으로 거래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지만, 그 경우에도 상품화된 지식은 인간 노동의 산물이다.
둘째, 사용가치와 가치를 혼동하고 있다. 동일한 노동이 투하되었더라도 더 비싼 값에 팔리는 상품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동일한 노동을 투하해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고 하더라도, 가입자가 더 많은 네트워크는 더 비싼 값에 거래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네트워크 효과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더 일반적으로 정보상품의 경우에는 수확체감의 법칙이 아니라,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지식이나 정보는 한 사람이 소비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소비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며, 한 사람의 지식이 증가하면 다른 사람의 지식도 따라서 증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확체증 현상은 사용가치의 측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가치이다.(3) 사용가치가 늘어나더라도 가치가 늘어나지 않는 경우는 많이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반도체의 연산능력이 18개월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Moore’s law)을 생각해 보면 좋다. 1970년과 1999년 사이에, 연산능력의 가격은 1MHz당 7,601달러에서 0.17달러로 99.99% 하락하였다. 지금도 반도체 생산에서는 수확체증현상이 계속되고 있지만, 수많은 반도체 회사들이 가격폭락으로 문을 닫은 상태이다.
셋째, 독점과 경쟁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독점일 경우에는 소비자가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사용가치라고 느낀다면 얼마든지 노동가치 이상으로 팔릴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사용가치가 많은 상품이라고 하더라도 경쟁이 존재하면 노동가치 이상으로 팔리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논리이다.
현재 시장에서 100시간의 노동을 들여서 만들 수 있는 상품을 120시간의 값에 판매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때 누군가가 100시간의 노동을 들여서 똑같은 상품을 만들고 그것을 110시간의 값에 판매한다면 10시간 값만큼 이득을 보면서도 판매가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경쟁이 계속된다면 100시간의 노동을 들여서 만든 물건은 결국 100시간의 값에 팔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미국에서 1986년 나이넥스라는 회사에서는 전화번호를 일일이 시디에 입력한 다음에 한 카피에 무려 1만달러에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이 아이디어를 보고, 프로시디라는 회사는 다시 전화번호를 일일이 시디에 입력한 다음에 한 카피에 수백달러에 팔았다. 조금 더 지나자 수십 개의 회사가 각각 전화번호를 입력한 뒤 한 카피에 20달러씩을 받고 팔게 되었다.(4)

정보시장에서도 노동가치론은 유효하다

지금까지의 분석으로부터 정보상품의 경우에는 노동가치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동가치론은 연구자가 인간의 노동에 윤리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성립되는 학설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시장에서 경쟁이 존재할 경우, 인간의 노동 이외에는 가치로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성립되는 학설이다. 판매되는 상품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라고 하더라도 시장에서의 평가는 마찬가지이다.

2003-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