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네트워커

이 꼭지, 이상하다

By 2003/12/26 10월 29th, 2016 3 Comments

사이버 페미니즘

시타

지난 10월 10일자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kr)’에는 ‘양성평등의 포털 사이트를 보고 싶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다음(daum), 네이버, 야후, 엠파스 등의 대규모 포털사이트의 메뉴 및 디렉토리 구성이 성차별이라는 비판이 주된 내용을 이룬 글이었다. 많은 분류들은 여성을 가정과 관련된 어떤 것들과 연관짓고 있다. 결혼, 임신, 육아, 요리 같은 것들 말이다. 남성 또한 결혼을 하고, 임신 및 육아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며, 요리 없이 단 며칠도 생존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이것은 모두 여성에게만 관계된 것으로 여겨진다. 근대적 공·사 영역 구분은 애초부터 성별화 된 위계구조를 이루어왔고, ‘여성의 자리는 가정’이라는 관념은 참으로 끈질기게 일상 곳곳에 있다. 그러니 많은 네티즌들이 즐겨 이용하는 포털 사이트의 이러한 분류체계는 어떤 면에서 ‘상식’을 반영·표현한다고도 할 수 있다. 또 ‘여성’이라는 범주가 놓이는 위치와 방식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의미와 위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기사 자체는 짧았지만, 이런 생각들이 주르룩 달려나오게 하는 선명한 실마리를 담은 기사였다. 이렇게 “맞아, 맞아”하면서, 생각의 실마리는 (기사 자체와는 다소 무관하게) 조금 핀트가 다른 어떤 문제로 나를 이끌었다.

분류의 정치학

그것은, ‘그러면 포털사이트의 분류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질문을 던져 놓고 보니, 몇 년 전에 <참세상>에 ‘여성자료실’을 구축하는 과정에 참여하면서 분류체계를 가지고 한참을 고민했던 기억이 새롭다. 막상 자료를 분류하려고 보니 분류의 방식과 명명 자체에 얼마나 복잡한 정치학이 작동하는지를 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령 ‘노동’이라는 하위 디렉토리가 있다고 치자. 거기에 어떤 자료를 등록할 것인가? 전업주부의 노동에 관한 자료는 여기에 포함될까?
우리 사회에서 ‘노동’은 공적 영역으로, 따라서 남성의 것으로 정의되어 왔다. 따라서 여성이 일생동안 해내는 정신·육체·감정 노동은 본성이거나(‘여자는 원래 애들을 좋아한다’), 고귀한 희생이거나(‘어머니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 아니면 놀이로 여겨진다(‘집에서 노는 여자가 애들 공부도 신경 안쓰고 뭐했어?’). 여성들이 전세계 노동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지만 결코 1차적 ‘노동자’가 아니었던 것은 이러한 비가시화와 폄하의 결과다. 급진적 비판과 이용자의 접근성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타협한 결과, 디렉토리의 이름은 ‘노동·가사노동’으로 정해졌다. ‘그러면 그냥 노동은 가사노동을 뺀 범주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될만한 문제 있는 타협이었다(하긴, 타협이 문제이지 않을 때가 있겠는가마는.) 이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성매매’에 분류할 것인가 ‘성폭력’에 분류할 것인가도 고민이었고, 사랑과 폭력이 (정반대의 것이기보다) 연속선을 있는 현실에서 ‘섹슈얼리티’와 ‘성폭력’을 따로 분류하는 것도 뭔가 걸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서서, 혹은 이 모든 것과 항상 함께 제기되는 첫 번째 질문은, 무엇이 ‘여성 자료실’에 올라갈 만한 자료인가 이다.

젠더는 여성에게만 있는가?

여성문제는 ‘여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성에 대한, 나아가 여성과 남성을 구성하고 위계화 하는 가부장제 사회 자체에 대한 것이다. 여성주의 비판은 여성의 경험·지식·해석을 가시화 함으로써 그동안 ‘보편’이자 ‘규범’으로 정의되어 왔던 남성의 경험·지식·해석을 상대화하는 것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여성과 남성의 이러한 차이를 생산해내는 권력구조 자체에 대한 메타 비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여성자료실’에 올라가지 않아야 할 자료는 무엇인가.
그러나 여전히 ‘여성 자료실’은 있고, 거기에는 여전히 특정한 자료들만이 등록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당연하고 불가피하며 또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나의 고민은 여성자료실 자체가 갖고 있는 이러한 모순적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여성 자료실’의 존재는 남성을 보편·규범으로 정의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가시화 하지만, ‘여성 자료실’ 이외의 다른 자료실들과 나란히 놓여 있는 위치는 이상해 보인다. 그럼 다른 자료실에는 젠더 문제가 없단 말인가? 라는 질문이 절로 튀어나올 수밖에.

이 글의 위치를 생각하며

한 여성학자의 통찰대로, 흔히 젠더는 여성만 갖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사실 남성은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는 대개 그의 능력, 관심사, 직업, 사회적 지위, 정치적 입장 등을 통해 인식된다. 그러나 여성은 그녀의 능력, 관심사, 직업, 사회적 지위, 정치적 입장 등보다 먼저, 일단 ‘여성이다’.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스트의 말대로, 여성과 남성은 나란히 놓이거나 비교 혹은 대체될 수 있는 두 개의 범주가 아니다. 여성/남성의 범주가 만들어지고 의미를 갖는 것 자체가 가부장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여성대로, 남성은 남성대로 젠더를 문제화하는 것이 아니다. 젠더라는 문제 자체가, 여성이라는 피억압자의 위치에 섰을 때에야 비로소 ‘문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나의 이 글이 놓이는 위치에 대해 늘 고민하게 된다. 이 글이 놓이는 위치, 즉 ‘사이버 페미니즘’이라는 꼭지 말이다. 여성의 보살핌 노동을 문제화하는 순간 현재의 ‘노동’의 정의부터 ‘노동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젠더 시각에서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사이버 페미니즘’이라는 범주가 의미를 갖는다면, 사이버 공간을 둘러싼 모든 의제와 이슈들은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다시 보일 수 있다. ‘인권’에 대한 여성주의 비판이 그랬던 것처럼, 페미니즘은 정보인권 또한 새롭게 재구성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이버 페미니즘’은 아직, 이 두 페이지 안에 갇혀 있다. 여성주의 시각이 분류체계 자체를 바꾸는 데까지 가지 못하고 ‘여성주의’라는 하위 디렉토리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 꼭지, 이상하다. 아니 이상해야만 한다. 두 페이지 안에 멈추어서는 안 된다.

2003-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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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전 댓글:

    여성이든 남성이든 인간이라는 틀속에 갇혀있고, 특별히 분류한다는 것 자체가 성차별이라는 것을 만들지 않는가?

    남성과 여성을 구별해야할 이유가 굳이 있다면 필요한 것이지. 단지 범주화할 필요가 있는가? 그 범주화가 곧 그들의 전문영역으로 자리잡고 그 전문영역으로 먹을거리를 찾는 사람들때문인가?

  • 죽전 댓글:

    상대적인 분류가 곧 스스로 인정하는 성차별의 시작일뿐이다.

  • 글쎄 댓글:

    차별을 없애려면 차별 이전에 분류가 있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보통 장애인에게 이런 말을 하지. “장애인이고 아니고가 뭐 중요해 능력있으면 성공을 해”. 내가 차별받고 있다고 하면 내가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고 훈수를 둔다. 위 댓글 역시 점쟎은 듯 훈수를 두고 있지만 결국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려 하는군. 장애 때문에, 피부색 때문에, 인종 때문에, 민족 때문에, 종교 때문에, 나이 때문에 서로 분류하고, 분류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불이익을 주는 것을 ‘차별’이라 한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