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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 ‘생명’이 아니라 ‘이윤’에 손들다!

By 2003/12/19 10월 29th, 2016 No Comments

기획

오병일

9월 10일 멕시코 칸쿤에서 막을 올린 WTO 각료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WTO 반대 칸쿤 투쟁단’이 출발하기 이전, 이미 한국에서는 칸쿤 투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9월 5일, 전국민중연대, 자유무역협정·WTO 반대국민행동 활동가들은 외교통상부 정문 앞에서 ‘TRIPS(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 합의안 타결을 반대하는 WTO반대투쟁단 기자회견’을 열어, 다국적 기업의 이윤을 위해 공중 보건을 희생시킨 WTO와 한국정부를 규탄하였다. 이는 지난 8월 30일 WTO 회원국들이 합의한 ‘도하선언 6항’에 대한 결정에 대한 것이었다.

TRIPS 협상의 쟁점-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

농산물 협상과 함께 ‘TRIPS 협정과 건강권’ 문제는 이번 도하개발의제(이하 DDA) 협상의 주요 쟁점 중의 하나였다. (자세한 내용은 <네트워커> 3호 심층연재 참고) TRIPS 협정은 WTO 내 지적재산권에 관한 협정으로 저작권, 특허, 상표 등 주요 지적재산권에 대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협정이 만들어진 것 자체가 선진국의 일방적인 주도에 의한 것이었다.
이번 협상의 쟁점은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 문제이다. 강제실시란 ‘국가 위급 상황이나 공공의 목적 등 특수한 조건 하에, 특허권자의 허락이 없이도 특허 발명을 제3자가 실시할 수 있도록 국가가 허용하는 것’으로 특허 제도 내에서 공공성을 보장하기 위한 부분이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특허 의약품의 경우, 다국적 제약회사가 특허에 근거한 독점력을 바탕으로 의약품 가격을 높게 책정하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제3세계의 민중들은 약이 있어도 먹을 수 없는 상황인데, 정부가 강제실시를 허용하면 특허권자가 아닌 제약사들도 약을 생산·공급할 수 있기 때문에 약을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는 에이즈가 국가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만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이즈 치료약을 복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인 상황이다. 하지만, 다국적 제약회사와 선진국 정부들은 제3세계 정부들이 강제실시를 허용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압력을 행사해왔다.
결국 이에 대한 제3세계 정부와 NGO의 문제제기에 의해 지난 2001년 도하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에서 ‘TRIPS와 공중 건강에 관한 선언’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이 선언은 TRIPS 협정 자체를 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TRIPS 협정은 공공의 건강을 보호하고, 특히 의약품에 대한 접근성을 증진시키기 위한 각 회원국의 권리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해석되고, 구현되어야 한다’고 선언(4항)함으로써 공중 건강을 위해 강제실시를 하고자 하는 제3세계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TRIPS 협정은 강제실시를 국내 수요에 한정해야한다는 단서를 두고 있기 때문에 ‘자체적인 의약품 생산 능력이 없거나 불충분한 개도국이나 최빈국’의 경우에는 강제실시 조항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자체적인 생산 능력이 없는 나라들은 다른 나라로부터 수입을 해야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수출하는 국가에서도 강제실시가 돼야 한다는 것이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 문제라고 한다. 도하 선언문 제6항은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마련할 것을 WTO 이사회에 부과하였고, 지난 8월 30일 이와 관련한 합의안이 도출된 것이다.

8·30 합의, 사실상 강제실시 무력화

그러나, 개발도상국과 NGO들은 이번 합의문이 ‘사실상 강제실시를 시행하지 못하게 하는 해법’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번 결정문은 1) 에이즈와 말라리아, 결핵등 심각한 질병의 치료를 위한 의약품의 특허권을 인정하되, 2) 인도적 차원에서 자체 의약품 생산시설을 갖추지 못한 최빈국들에 한해 이를 저가에 공급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 이때 ‘수입을 위한 강제실시는 인도적 차원에서 공중보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일 것이며, 산업·상업적 목적으로 쓰일 수 없다고’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인도적 차원은 국제적 원조단체 등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산업·상업적 목적’이 아닌 방법으로 복제약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공공제약회사가 생산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러한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회사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수출된 복제약이 선진국에 역수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까다로운 조건을 부여하고 있다. 수입국이 무슨 약을 얼마만큼 수입할 것인지 일일이 TRIPS 이사회에 보고해야 하며, 수출을 할 회사도 무슨 약을 얼마만큼 어느 국가에 얼마동안 수출할 것인지 미리 알려야하고, 특별한 색, 모양, 라벨, 포장을 하도록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까다로운 절차들은 강제실시 시행을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자국의 결정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WTO 합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도 쏟아지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21 개국 정부가 ‘국가적 비상사태나 극히 긴급한 상황하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수입을 위한 강제실시권을 포기하였기 때문이다. 외교통상부는 ‘우리나라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으므로 한쪽으로 확고하게 입장이 있는 것은 아니며, 의약품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남아 DDA타결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원만한 합의를 촉구’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여기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은 한국의 의약품 공급 상황은 불충분하며, 국가적 비상사태 등으로 강제실시의 조건을 제한함으로써 한국 민중들의 건강권을 포기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미 지난 2002년 1월에 청구된 글리벡에 대한 강제실시 청구에 대해 한국 정부는 2003년 3월에 기각하기로 결정한 적이 있다.

이번 칸쿤 각료회의는 결렬되었지만, DDA 협상 자체가 궁극적으로 폐기된 것은 아니므로, 8·30 결정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강제실시에 대한 각 국의 자율성과 의약품에 대한 접근을 확대하기 위한 개발도상국과 NGO들의 요구와 투쟁은 계속될 전망이다.

2003-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