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네트워커

유리돔에 갇혀버린 교육현장

By 2003/12/19 10월 29th, 2016 No Comments

김칠준의 정보인권

김칠준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구한테 맞아본 적이 거의 없다. 초등학교때 선생님한테 단체로 손바닥을 맞아 본 것이 전부다. 그것은 나를 심약한 사람으로 만든 단점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늘 폭력앞에서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공포를 느낀다. 허우대가 멀쩡한데도 으슥한 골목길을 가다가 낯선 사람과 마주치기만 해도 순간 뒷덜미가 송연해지곤 한다. 아직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정말 폭력 앞에서는 어떤 것도 지켜낼 자신이 없다.
과거 수사기관의 혹독한 고문을 받았던 사람들을 변론한 적이 있었다. 고문에 못 이겨 자해행위를 한 민주인사도 있었고, 물고문과 잠안재우기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살인피의자도 있었다. 그런 사안을 접할 때마다, 과연 나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아마 5분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 대신 나는 폭력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력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사안을 접할 때마다, 끝까지 폭력의 실체를 밝히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가해자의 책임을 추궁하려고 노력했다.
이는 나만의 정서가 아닐 것이다. 폭력과 고문이 헌법상 보장된 인권(신체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논리적인 판단 이전에 시민들은 본능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인권침해라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 폭력과 고문수사를 당했다고 외치면 온 나라가 들불처럼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에 의한 정보인권의 침해는 어떤가. 우리는 한 개인의 성장기록을 국가가 일괄해서 관리함으로써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한다고 말한다. 개인의 자기정보통제권을 침해하고, 교육의 자주성을 침해하며, 인간을 차별하는 근거로 기능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심각한 인권침해라고 이야기한다. 나아가 개인의 정보가 유출될 위험성과 국가와 자본이 언제든지 악용할 소지가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나의 신상정보를 누군가가 관리하는 것이 기분 나쁘고, 그래서 NEIS를 없앴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폭력이나 고문처럼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인권침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신상정보가 다양하게 수집되고 활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수집과 활용의 목적이 효율적인 교육과 행정, 복지의 증진을 위한 것이라면 극렬하게 반대만 할 일은 아니지 않느냐는 항변 앞에서 자신 있게 노라고 말할 수 있는가.

NEIS가 왜 용납될 수 없은 인권침해인가

NEIS는 교육의 현장을 투명한 유리돔 안에 가두는 것이다. 온갖 다양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유리돔 밖에서 지켜보고, 몇가지 잣대로 분류하며, 결국은 인간을 디지털부호로 전환시켜 통계와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ERP(전사적 자원관리)은 일터를 유리돔안에 가두는 것이고, 거리마다 설치되어 있는 CCTV는 우리의 일상을 가두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전자정부가 완성되고 개인에 대한 정보가 통합되는 날, 분야별로 존재하던 유리돔은 하나의 거대한 유리돔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그 목적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때 나는 현실속에서 펄펄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 ‘나’와 정부의 거대한 컴퓨터시스템속에서 나에 대한 온갖정보의 집적체로서 디지털부호화 된 ‘나’로 분리되어 존재하게 된다. 정부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현실의 나에게는 묻지도 않은 채 컴퓨터 속에 존재하는 ‘나’를 분석하고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행정을 펼치고 교육과 복지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결국은 현실 속의 ‘나’의 삶은 정보의 집적체이자 자의적으로 분류된 컴퓨터 속의 ‘나’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끔찍하지 않은가. 유리돔안에 갖힌 채 규제 받는 대가로 효율적인 교육을 받고, 범죄로부터 안전한 생활을 누리며, 풍요로운 복지서비스를 제공받는다 한들 용납될 수 있는 일인가.

‘우연한 사고’도 ‘예외적인 위험’도 아니다.

이쯤 되면 턱없는 과장이자 비약이라는 반박이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인구가 5천만인데 누가 무엇 때문에 할 일없이 그 많은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겠느냐. 나쁜 사람에 의해 정보가 유출되고 악용될 여지는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예외적인 위험일 뿐이며, 그러한 위험조차도 법제도를 보완하고 발전된 기술을 이용해서 최대한 억제할 수 있다고 항변할 것이다.
경찰관들을 상대로 인권교육을 할 때 흔히 들었던 항변과 유사하다. 그들은 우리도 인권이 소중한 줄 알고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수사과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몰지각한 소수에 불과한데 왜 수사과정에서의 인권을 이야기할 때는 모든 수사기관이 폭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불신하느냐고 말한다. 또 범죄의 피해로부터 엄청난 고통을 받는 사람을 생각해본다면 진범을 잡기 위해 불가피하게 무리한 수사를 한 것에 대해 너무 심하게 문책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수사관이 고문수사를 하는 것은 ‘본질적인 유혹’이지, 결코 예외적인 위험성이 아니다. 용의자가 자백하면 사건의 진상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죄의 증거도 쉽게 확보할 수 있다. 반면에 자백하지 않으면 수사관은 진범을 찾아내기 위해 수십 배의 시간과 노력을 투여해야 하고, 사건이 미궁에 빠질 위험성도 있다. 그래서 누가 수사관이 되든 용의자로부터 자백을 얻어내려는 유혹을 갖게 되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용의자에 대해 폭력행사라는 ‘본질적인 유혹’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인권운동의 금자탑이라는 ‘미란다 원칙’은 모든 수사관들이 잠시 후면 피의자에게 자백을 요구할 것이 뻔하다고 전제하고, 그 직전에 ‘범행을 자백하지 않아도 된다’고 고지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NEIS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집적된 개인정보를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고, 자본이 이윤을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국가와 자본의 ‘본질적인 유혹’이다. 개인정보가 유출되거나 악용되는 것은 우연한 사고나 예외적인 위험이 아니라 바로 국가와 자본의 본질적인 유혹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더구나 NEIS는 집적된 개인정보를 국가에게 쥐어주고 관리하도록 함으로써 성적 욕망에 몸을 떠는 사람에게 내 몸을 맡기는 셈이 된다. 누가 어떻게 저들의 욕망을 제어할 것인가.
그래서 과거 전통적인 인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그랬듯이 모든 시민들이 새로운 정보인권을 지켜내기 위해 들불처럼 일어나 항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003-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