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네트워커

맑스는 어떻게 앉아 있었나

By 2003/12/19 10월 29th, 2016 No Comments

박석준의 컴퓨터 앞의 건강

박석준

나는 솔직히 맑스의 사생활에 대해 잘 모른다. 그의 전기가 여러 종류 나와 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읽은 것도 없다. 그런 처지에 무슨 맑스의 앉는 자세 운운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이 있다.’맑스라는 유령’이 출몰하던 80년대의 은밀한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다. 내 운명을 바꾸어 놓은(!)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가면 맑스가 앉아서 책을 읽던 책상이 있는데 책상 밑바닥에 발자국이 찍혀 있다.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으면 바닥이 닳아서 발자국이 남았을까.”
한 선배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 있던 우리는 모두 결연한 자세로 학습에 전념할 각오를 다졌었다. 그런데 나 자신이 영국에 간 적도 없고 지금까지 영국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모두 금시초문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

어쨌든 아무도 확인할 길 없는 이야기로 후배들의 학습에 불을 지핀 것을 보면 그 선배는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로서는 그때 공부했던 학습량이, 한의학이라는 전공분야를 제외하면,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지금까지 읽은 양과 거의 맞먹을 정도였다는 사실을 돌이켜 보면 그 선배에게 불만은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따로 있다. 과연 어떻게 앉아 있어야 발자국을 새길 수 있을까. 최소한 다음과 같은 조건이 필요할 것이다.

1) 방바닥이 대리석이어서는 곤란하다. 무른 나무 바닥이 좋다.
2) 역시 오래 앉아 있어야 한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다.
3) 때때로 발바닥을 가볍게 구르거나 비벼준다.
불면 날아갈 듯한 천으로 둘레 40리 되는 바위를 3년에 한번씩 스쳐 먼지를 만드는 비법은 석가가 이미 제시한 바도 있지만, 가만히 발바닥만 대고 앉아 있어서는 그야말로 하세월이다. 가볍게 발을 구르거나 비비면 발바닥, 나아가 뇌를 자극하기 때문에 일석이조다.
4) 발을 꼬고 앉거나 삐딱하게 앉으면 안된다. 발바닥이 방바닥에 닿지 않기 때문에
불리하다.
5) 발을 11자로 해서 가지런하게 해야 같은 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
6) 발바닥 전체를 방바닥에 붙이고 있되 적당한 힘이 들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똑바로 앉아야 한다. 허리를 구부리거나 등받이에 기대면 힘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불리하다.
7) 의자가 높으면 발이 떠서 발바닥에 힘을 받지 못하므로 역시 불리하다. 반대로 너무 낮으면 무릎이 힘을 받아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

다소 장황해졌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자세가 오래 앉아 작업을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세라는 사실이다. 바르게 앉으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아는 거지만 정작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건강은 실천이다. 한두 번 폼(form)을 잡아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늘, 언제나, 항상, 변함없이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영국에 한번 가기는 가야 할까보다. 글을 쓰고 있자니 또 궁금해진다. 정말 대영박물관에 맑스의 발자국이 있기는 있는 걸까.

2003-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