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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힘 ‘경영정보시스템’

By 2003/12/19 10월 29th, 2016 No Comments

표지이야기

장여경

노동자와 소비자의 프라이버시가 사라지고 있다. 프라이버시 학자들에 따르면 이는 최근의 기업 정보화와 무관하지 않다. 기업 내적으로는 작은 물자 하나, 사람 손끝 하나가 통제되기 시작했고 외적으로는 소비자의 방문과 구매 기록, 그리고 취향까지 세밀하게 관리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태동이래 모든 기업이 꿈꿔 오던 일이다. 인간의 모든 것을 계량화하여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합리화와 최적화로 낭비를 최소화하는 것. 정보화로 인해 기업의 꿈이 현실이 되었다면 그 치사는 경영정보시스템이라는 기술에 돌아가야 한다.

경영정보시스템은 대기업 제조업을 중심으로 도입되었지만, 최근 들어 중소기업과 일반업종에까지 확산되고 있다. 산업자원부 통계에 따르면 최근 기업에 도입되는 경영정보시스템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기업 내적으로는 ‘전사적 자원관리’(이하 ERP, 23.5%)이고 기업외적으로는 ‘고객관계관리’(이하 CRM,4.0%)
이다. 특히 ERP 도입 비율은 1998년 이전 11.2%, 1998년 7.3%, 1999년 15.1%, 2000년 22.1%, 2001년 24.9%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거래소 상장기업 및 코스닥 등록기업 중에는 총 1,494개 중 43.9%에 달하는 656개 기업이 ERP를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영정보시스템이 최근 들어 크게 확산된 직접적인 이유는 기업용 소프트웨어가 수십 억 원대에 육박했던 과거에 비해 매우 저렴해졌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도 진화했다. 소위 ‘확장형 ERP’가 등장한 것이다.

기업 내 시스템에 그쳤던 초기 ERP가 인터넷과 연계되고 CRM까지 통합하면서 경영정보시스템의 대명사가 됐다. 기업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앉아서 버튼 하나로 자원부터 생산과 고객까지 관리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ERP 시장이 커지면서 국내 업체도 많아지고 적극적인 영업도 시작되었다. 제조업 중심의 ERP가 유통·서비스·금융 등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여기에는 정부의 지원도 한 몫을 했다. 산업자원부의 ‘3만개 중소기업 IT화 지원사업’과 정보통신부의 ‘소기업 네트워크화 사업’ 등 2001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중소기업 정보화 지원은 상당부분 ERP 구축에 역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경영정보시스템의 확산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시장 환경 때문이다. 남들 하는 만큼 해서 경쟁력을 제고하겠다는 보편적 이유 외에도, 아웃소싱이 특징적인 최근 기업환경에서 흩어져 있는 자원을 관리하려면 경영정보시스템의 도입이 필수적인 요소가 된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명분은 ‘투명성 제고’이다. 임춘성 기업정보화지원센터장은 한 기고글에서 ERP는 논리적으로 결과물과 자본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일치시키기 때문에 추적이 가능하다고 소개했다. 여러 단계를 거쳐 검증되다 보니 기록된 내역을 수정하거나 조작하기 어렵다고 한다. ERP는 기업지배구조와 재무회계상 투명성을 보장하는 도덕적 명분까지 획득하게 된 것이다.

노동자와 소비자도 완벽하게 투명한 시스템 안으로!

문제는 이 투명성과 경직성이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위 기고글에서 필자는 회계와 생산 공정 뿐 아니라 고객과 노동자와의 관계에도 똑같은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ERP의 강점이 여기에 있다고 주장한다. “기업의 판매, 인사, 영업 … 투명성의 빈틈이 보이는 길목 길목의 업무에 걸쳐 투명경영이 구현되도록 하는 데는 정보시스템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사람에 대한 투명성 확보는 개인정보에 대한 철저한 수집과 관리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노동자와 소비자의 프라이버시 문제가 부상하게 되었다.

강남훈 교수(한신대)는 경영 정보화의 보다 거시적인 측면에 주목한다. 지난 7월 8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서 주최한 한 토론회에서 강 교수는 이와 같은 정보화가 신자유주의 유연생산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유연생산이 가능해지려면 노동자를 ‘지식노동자’화(化)해야 하는데 모든 노동자를 지식노동자로 만드는 데는 높은 비용이 든다. 그래서 일부 지식노동자에게만 더 높은 보수를 주면서 전문적이고 복잡한 업무를 맡기고 나머지 노동자들에게 단순한 업무를 맡기게 되었다. 정보화는 당연하게도 이런 추세를 지원한다. 기계는 점점 복잡해지고 이를 다루는 노동은 점점 더 고도의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노동은 점점 더 단순해지게 된다. 똑똑해진 기계장치와 소프트웨어는 일반적으로 노동강도를 증가시킨다. 무엇보다 기업경영정보시스템은 세계화된 생산체제를 위해 필요하다. 실시간으로 기업의 업무를 원격으로 통제하고 조정하는 것이 가능해지면 원료가 싼 곳에서 물자를 조달하고 임금이 싼 곳에서 생산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가장 후진적인 지역을 기준으로 한 세계경제 차원에서 경쟁해야 하므로 고용이 불안정해지고 노동조건의 악화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최근 경영정보시스템의 확산은 원성이 자자한 신자유주의적 해악과 동전의 양면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강 교수는 발표에서 “이런 흐름을 러다이트처럼 거부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노동자·민중 등 다수 인구가 정보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경영정보시스템이 미치는 영향은 단지 기업내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이 경영정보시스템의 확산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3-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