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네트워커전자신분증

감시로 건강보험 재정을 투명하게 만들 수 있을까?

By 2003/12/19 10월 29th, 2016 No Comments

집중분석

곽경호

9월 초, KAIST ‘전자정부 지식기반연구센터’라는 단체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전자건강카드를 다시 도입하는 데 대한 의견을 묻겠다는 것이었다. 원래 전자건강카드는 지난 2001년 시민사회단체들의 반대로 도입이 중단된 바 있다. 내가 소속한 단체인 평등사회를위한민중의료연합도 당시 전자건강카드를 반대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때 우리가 전자건강카드를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전자건강카드가 사실상 국가신분증이 되면서 전자주민카드가 부활할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전자건강카드의 도입이 중단된 까닭은 그 주요 목적 중 하나였던 허위·부당·과장 청구를 전자카드가 방지할 수 있을지 의문시되었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허위·부당·과장 청구는 병원이 확보한 개인정보를 이용하거나 담합을 통한 가짜환자 만들기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기술로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만난 KAIST측 인사는 기업, 정부측과 스마트카드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전자건강카드를 재도입하는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컨소시엄은 전자주민카드와 전자건강카드 도입에 있어 두 번 다시 좌절(?)을 겪지 않기 위해 사전에 시민사회단체와의 대화 자리를 만드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는 여전히 설득력이 부족했다.
먼저 이들이 전자건강카드가 재도입 되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로 제시하고 있는 건강보험 재정의 투명성 문제를 보자. 건강보험 재정의 위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고질적인 사회문제를 스마트카드의 도입으로 해결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황당하기 그지없다. KAIST의 설명으로는 이렇다. 건강보험 적자가 2002년 말 2조 6천억 원에 달하고 있고 적자의 주요원인은 의료기관의 허위·부당·과장 청구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마트카드로 건강보험 수급 과정을 투명화 하면 적자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단순한 생각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건강보험 재정의 적자의 구조적 원인을 간과한 채 허위·부당·과장 청구에만 주목하는 것부터가 일차원적인 진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허위·부당·과장 청구 문제에만 집중하더라도 스마트카드가 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은 근거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소리다. 이들은 환자의 스마트카드를 통해 모든 의료기관에서 실시간으로 건강보험관리공단에 진료내역을 전송하고, 곧바로 보험청구가 이루어지면 건강보험 재정이 투명해진다고 주장한다.
물론 유령환자나 유령병원으로 진료비를 청구하는 등 허위로 진료내역을 만들어내는 것은 스마트카드로 어느 정도 차단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료내역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도 얼마든지 부당·과장 청구가 가능하다. 의사가 컴퓨터를 통해 현장에서 직접 내역을 작성하는데 환자는 대부분 이 내역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료비 내역을 입력하는 일 자체가 의료기관에 일임되어 있는 상태에서 스마트카드가 어떻게 진료비 부풀리기를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허위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의료기관에서 직원이나 친인척 등과 담합하여 공단에 청구한다면 허위 환자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스마트카드는 의료의 공공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데서 커다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KAIST는 건강보험 재정 악화의 요인으로 허위·부당·과장 청구와 더불어 ‘체납’을 들었다. 그날 찾아온 사람들 중 한 사람은 “내가 낸 세금으로 왜 체납자가 진료를 받아야 하느냐”며 분개하였다. 하지만 나는 전자건강카드 도입으로 체납자를 즉시 분별하여 진료를 받지 못하게 하겠다는 이들의 발상에 섬뜩함을 느꼈다. 이것은 기술적인 성과일 뿐, 공공의료의 본래 취지를 왜곡하는 짓이다. 건강보험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현재 빈곤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보험재정이든 정부예산이든 예산을 확보하고 혜택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스마트카드의 기본 발상은 ‘재정 안정화’라는 명분으로 이를 줄이고 통제하겠다는 것이니 거꾸로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부는 이미 보험업법 개정을 통해 민간보험이 환자의 병력이나 개인정보를 취할 수 있도록 공개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논란을 빚은 바 있다. 환자 개인의 정보가 전산화되어 상업적 목적으로 쓰일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에서, 전자건강카드의 도입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하기가 두렵다. 결국 명분으로나, 실리적으로나 전자건강카드에는 어떠한 설득력도 없다. 그런데도 계속 이를 도입하겠다고 주장한다면 그 목적은 건강보험 재정 투명화가 아니라 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전자건강카드는 스마트카드 시장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업계와 공공성 해체에만 급급한 신자유주의적 발상의 합작품일 것이다.

2003-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