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네트워커

스팸메일 음모론

By 2003/12/18 10월 29th, 2016 No Comments

사이버 페미니즘

시타

매일 서너 가지 메일박스를 열어 확인할 때마다 하루 평균 50개 정도의 ‘스팸 메일’을 지운다. 이제 이것은 별로 아무렇지도 않다. 스팸 메일 중 3-40%는 포르노 사이트를 선전하는 내용이다. 이것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제목과 발신자를 보면 대강 ‘포르노 스팸 메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니, 이제는 공공장소에서 멋모르고 메일을 열었다가 황당해지는 일은 거의 피해갈 수 있다. 거봐, 너도 안 보고 말잖아. 그렇게 안 보면 그만인데 뭐가 문제니? 뭐 대충 이런 소리가 벌써 귓가에 들리는 듯 하다.

포르노를 선전하는 메일, 메일 형태의 포르노
일단 이거 하나는 짚고 넘어가자. 그것은 정말로 에누리없이 ‘포르노 스팸 메일’이다. ‘포르노 사이트를 광고하는’ 스팸 메일일 뿐만 아니라, 스팸 메일 그 자체가 작은 ‘포르노’이기도 하다는 뜻에서 그렇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근대 이후 등장한 산업화된 형태의 포르노그라피 생산·유통이 인터넷을 만나 좀더 개별화·일상화된 포르노 소비를 가능케 하는 방식으로 변형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포르노그라피가 남성의 욕망을 위해 남성의 시선으로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지며, 제작 과정에서 실제로 여성들을 착취·감금·고문·학대·폭력·강간·살해할 뿐 아니라, 그 내용이 사회 전체의 여성억압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와 운동들이 있었다.

서구 사회에서는 포르노그라피가 ‘표현의 자유(=포르노 찬성)냐, 포르노 반대(=검열 찬성)냐’ 라는 기묘한 구도로 논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 구도는 그 자체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양자 택일일 수 없는 것을 양자 택일처럼 보이게 만든 사회 구조를 문제삼지 않은 채 (포르노의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남성이 아니라) 여성만을 양자택일의 딜레마로 몰아 넣기 때문이다.

‘안 보면 그만’이냐?
여하간에 ‘포르노 스팸 메일’은 이미 인터넷 이용자들의 ‘일상’이다. 지워도지워도 지칠 줄 모르고 날아오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포르노 스팸 메일’에 대처하는 생활의 지혜는 ‘안 보면 그만’일 것이다. (물론 이 대처법의 의미는 성별에 따라 다르다. 포르노가 일상 문화인 남성들에게 ‘안 보는 것’은 칭찬할 만한 결단이지만, 포르노가 일상 폭력인 여성들에게 ‘안 보는 것’은 너무 거대한 어떤 것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이자 회피다.) 그런데 ‘안 보면 그만’이 대중적인 대처법이 되려면 우선 ‘안 볼 수 있어야’ 한다. 즉, 제목이나 발신자만 보고서도 ‘포르노 스팸 메일’인지 여부를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사실 이건 매우 쉽다. ‘포르노 스팸 메일’은 대개 제목만 ‘척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거 좀 이상한 거 아닌가? 요즘엔 너도나도 어떻게든 ‘열어보게’ 하려고 스팸이 ‘아닌 척’하는 메일 광고 수법이 하루가 다르게 계속 개발되고 있는 와중인데, 유독 ‘포르노 스팸 메일’은 늘 이렇게 당당하고 늠름하다니 말이다. 그렇다. 이 쾌청한 가을날, 기분 된통 잡치도록 신경을 긁는 것은 바로 이 당당함과 늠름함이었던 것이다. 니네는 도대체 뭘 믿고 이다지도 천연덕스러운 거냐.

스팸메일 음모론
내 생각에 그들은 포르노 메일이 ‘아닌 척’ 할 필요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포르노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최대한 드러내고 어필할수록 독자는 더욱 확실하게 확보되고 장사는 더욱 번창할 것이다. 이 간단하지만 놀라운 차이점을 그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 대량의 ‘포르노 스팸 메일’을 발송하는 전국적 지하조직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조직은 가부장적 성(性) 문화를 재생산하는 중추라고 할만한 포르노그라피를 널리 퍼뜨리고 활성화하기 위해 밤낮 없이 활동한다. 대다수 남성들이 그 조직의 비밀 회원이라는 점에서 이 조직은 진정 ‘자발적’인 ‘풀뿌리’ 조직이고, 회원 가입 연령을 점점 낮추어 누구나 포르노 사이트 운영에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민주화’되고 있다. 또한 ‘여성 연예인 비디오’가 떴다 하면 하룻밤만에 수천 수만의 회원이 이를 돌려볼 정도로 강력한 ‘전국적’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있으며, 자유게시판이라면 어디든 찾아내서 포르노 사이트 광고글을 올려대는 ‘게릴라전’ 담당 특별 요원도 있다. 포르노 스팸 메일 발송을 위한 소프트 개발부가 따로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 조직의 이름은 ‘남성 포르노 네트워크’다.

포르노 스팸의 ‘디폴트 값’, 사회의 ‘디폴트 값’
비유하자면 이렇다. 돈 벌 수 있다는 내용의 광고가 마구 뿌려지는 것은 모두가 돈을 벌고 싶어하리라는 전제 위에 고안된 마케팅이다. 다이어트 광고가 주로 여성들에게 뿌려지는 것은 모든 여성들이 날씬해지려 한다는 전제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포르노 스팸 메일’은? 쉴새 없이 무차별적으로 살포되는 ‘포르노 스팸 메일’은, 모두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포르노를 보고싶어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치 ‘일단 건드려 본’ 다음에 “싫으면 내가 알아듣게 거부의사를 표현하라”고 요구하는 성폭력의 각본처럼, 이들은 ‘일단 포르노 스팸 메일을 보낸’ 다음에 “싫으면 안 보면 되잖아” 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일단 보내는’ 행위야말로 포르노 스팸 메일이 전제하는 ‘디폴트 값(default value, 기본값)’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게 아닌지. 자, 니들도 좋아하잖아? 즐겨. 싫다고? 어, 당신 여자였어? 그건 생각 안 해봤군. 어쨌든 싫으면 안 보면 되잖아! — 이것이 포르노 스팸 메일이 가정하고 있는 ‘디폴트 값’이요, 우리 사회의 ‘디폴트 값’이다. ‘남성 포르노 네트워크’는 바로 이 ‘디폴트 값’이 있기에 무럭무럭 성장해 왔고, 은혜를 잊지 않고 ‘디폴트 값’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가을 날씨 쾌청한데 웬 ‘음모론’이냐고? 자, 자, 너무 화내지 마시길. 웃자고 한 소리다. 하지만 모두들 알다시피 농담이 사람들을 (쓴/비)웃음 짓게 만들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어떤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므로, 나의 음모론이 완전히 농담은 아닐 것이다.

2003-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