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네트워커

컴맹과 길치

By 2003/11/12 10월 29th, 2016 No Comments

사이버 페미니즘

시타

나는 ‘길치’다. ‘증세’는 대강 이렇다 — 우선, 딱 한번 가본 길을 혼자 다시 찾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평균 약 세 번 정도 가본 길이어야 (그것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정표가 될만한 건물이나 표지판 등을 신경 써서 기억하면서 걸을 경우에 한해서) 그나마 꽤 자신을 가지고 찾아갈 수 있다, 모르는 곳을 찾아갈 때는 어떻게든 엄청 자세하게 물어보아야 마음이 놓이고, 그게 안될 상황이면 아예 곧장 파출소를 찾거나 마중 나올 사람을 대기시킨다, 잘 모르는 지역에서 길을 잃으면 패닉상태가 된다, 등등… 한마디로 ‘방향감각’이 없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여야 ‘길치’라고 부르는지에 대한 딱 정해진 기준이야 있겠느냐마는, 이 정도 ‘증세’라면 ‘길치’의 범주에 들고도 남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실 ‘방향감각’이 없어서 사는 데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큰 불만까지는 아니다. 모르면 물어보면 되니까. 다만 얼마 전부터 계속 신기해하고 있는 점이 있다면, 내 주위에 있는 여자들 중에는 ‘길치’가 무척 많은데 남자들 중에 자기가 ‘길치’라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대개 잘 모르는 길도 곧잘 찾아갔고, 개중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지름길’을 발굴해내는 남자들도 있었다(대체 어떻게?!! @_@). 이렇게 뚜렷하게 성별화 된 현상이, 단지 우연일까?

방향감각, 세계와 나의 관계 설정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내 주위의 여자 친구들에게 꽤 많이 물어보았지만, ‘남자 중에서는 길치를 본 적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일까? 이 신기한 현상에 대해 한 친구는 ‘세계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의 문제’라는 설명을 제시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다.
남성은 세계를 ‘조망’한다. 그의 신체는 어떤 구체적인 거리에 서 있지만, 그의 시선과 사고는 그가 발 딛고 선 곳이 아니라 다른 곳 — 그 거리를 내려다보는 어떤 높은 곳에 있다. 굳이 도식화해 보자면, 어떤 거리가 있고, 그 거리에 서 있는 남성이 있고, 그 거리에 서 있는 자신을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남성의 시선·인식이 있어서, 바로 이 ‘조망하는 시선’이 ‘길’을 찾아낸다고나 할까. 인식하는 ‘나’의 위치를 세계 ‘바깥/위’에 두었을 때 그러한 위치(position)가 그 주체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다름 아닌 통제력이다. 남자는 그 거리를 처음 가보지만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그 거리를 ‘알 수 있고’, ‘통제’할 수 있으며, 따라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어떤가?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낯선 거리를 무서워하거나 목적지를 찾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이유 중 하나는 스스로에게 ‘방향감각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물론 또 다른 이유는 실재적인 폭력에 대한 공포다). ‘방향감각’이란 무엇인가? 대강 풀어서 써보면, ‘① 나는 이 거리에 서 있다, ② 이 거리는 이렇게 생겼다, ③ 따라서 나는 이러이러한 길로 가야 한다’… 정도일 것이다. 이 중에서 (실제의 ‘길치 증세’가 얼마나 심각한가와는 무관하게) 많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길치’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② 이 거리는 이렇게 생겼다’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앗,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낯선 거리가 낯선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그렇다면, 대다수 남성들은 길을 잘 찾는데 많은 여성들은 길을 잘 못 찾는 이상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다른 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실제로 길을 잘 찾는가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길 찾기’가 여성과 남성에게 어떻게 다르게 인식되는가, 그리고 그것은 왜 그런가, 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낯선 거리는 여성에게나 남성에게나 낯설지만, 남성은 그것을 ‘알 수 있다’는 ‘조망’의 시선/사유양식 덕분에 불안하지도 두렵지도 않다.

컴맹과 길치의 공통점?
잡지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길치’ 얘기를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길치’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컴맹’과 두 가지 점에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좀 늦었지만 하고싶었던 얘기는 여기부터다.) 첫째, ‘컴맹’도 성별화된 현상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여자들은 대개 ‘컴맹’ 시절을 거쳤고, 컴퓨터에 웬만큼 숙달된 이후에도 여전히 컴퓨터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반면 스스로를 ‘컴맹’이라고 규정하는 남자를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심지어 컴퓨터에 대해 나만큼 모르는 남자도, 스스로를 ‘컴맹’의 범주에 넣기보다는 남들 안보는 곳에서 조용히 — "하드 몇 번 날려보고 윈도우 몇 번 포맷시켜 보면서" "한 달간 삽질해서" 컴퓨터를 연마한다.
둘째, 이러한 차이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는 ‘컴퓨터와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의 차이다. 컴퓨터를 처음 배울 무렵 내가 남자들과 정말 다르다고 느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컴퓨터를 대하는 태도’였다. 컴퓨터는 편리한 ‘도구’의 하나일 뿐이며, 자신은 그 ‘도구’에 대해 통제력을 갖고 있다는 자신감. 혹은 그 도구를 ‘정복’함으로써 곧 통제력을 갖게 될 것이라는 확신. "컴퓨터? 별거 아냐~" — 게임과 인터넷 외의 기능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내 남동생조차 갖고 있는 이런 식의 태도가, 나에게는 없다. 이제는 필요한 기능을 모두 잘 다룰 정도로 숙달되었는 데도 말이다. 처음에는 내가 컴맹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애초에 컴퓨터라는 것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나는 전보다 조금 덜 불안하고 덜 조급해진 기분이다. 여전히 길을 잘 못 찾고 여전히 컴퓨터를 잘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남성들이 길을 잘 찾고 컴퓨터를 잘 다루는 것은 생물학적 특성도, 특별한 재능도 아니다. 세계를 조망하는 초월자적 시선과 세계를 도구로 보는 정복자적 태도 — 그것은 젠더화된 사회가 부여한 남성 권력의 효과다.

2003-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