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석 칼럼
현대 권력의 통제욕은 크게 두 가지다. ‘코드’와 ‘응시’. 코드가 독점/배제의 논리라면, 응시는 관찰/감시의 논리다. 소수의 권력자는 독점과 관찰 수단을 통해 다수를 겹겹이 배제하고 감시한다. 유무형의 재산과 정보에 대한 독점적 접근은 코드의 논리로 구성되고, 이 코드의 논리를 깨는 불순 행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선 끊임없는 응시가 필요하다.
돈을 찾으려면 암호를 쳐야하고 접속을 위해선 신원이 확실해야 하고 답글 한마디 달려 하면 주민번호가 필요하다. 뭘 하나 쓰려는데 방벽이 쳐져 있고 이를 열심히 뚫어 여럿이 같이 쓰다 엉겁결에 잡혀간다. 코드 권력이 잘 작동하는 예다. 근무 중에 들락거린 웹 페이지를 다 알고 있다며 사장이 내게 경고 편지를 날린다. 알지도 못하는 보험회사가 우리 가족 신상을 들먹인다. 술이 과해 인사동 골목에서 한참 토하는데 어찌 알았는지 종로구청 직원이 튀어나와 인터넷에 생중계 된단다. 도대체 방범 CCTV를 270여대나 어디에 감쪽같이 숨겨놨을까 찾으려 두리번거리다 강남 경찰서에 잡혀갔다. 응시 권력이 잘 작동하는 예다.
응시 방식의 변화는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NEIS에서 보듯, 기술적으로 개별과 분산에서 통합과 재분류가 가능해지면서 통제 능력이 훨씬 신장됐고, 밖으로 드러났던 것들이 은밀해지고 시야에서 사라짐으로써 자신이 권력의 관찰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응시의 이같은 교묘한 변화는 체제 코드의 좀 더 안정적인 재생산에 기여한다.
코드 유지를 위해 권력은 한 노동자의 일터에서, 퇴근 후 공원을 지나다, 백화점에서 카드 결제하면서까지 어디서든 뜨거운 응시의 눈길을 보낸다. 특히 요즘 문제되는 응시는 노동자와 소비자를 관찰하고 감시하려는 자본욕보다 시민에 대한 국가의 통제 욕망이 설쳐대는 특이한 경우다. 무엇보다 광장이라 불리는 공적 공간에서의 ‘원치 않는’ 응시의 범람은 시민에 대한 전근대적 국가 폭력의 새로운 변종으로 자리잡는다.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성숙할수록 이들 시민 영역보다는 노동자와 소비자로 등장하는 개인의 관찰과 감시에 집중하는 법이다. 성숙한 국가들은 시민권의 신장이 폭력적 응시를 참지 못하니 자연히 응시는 주로 자본의 입장에 충실하다.
이에 반해 우리 문민 권력자들은 아직도 군사 폭력의 공백에 허전해 한다. 폭력과 정치사찰 대신 응시를 선택했어도 과하고 서툴고 거칠다. 못된 옛날 버릇이 남아 더욱 그렇다. 이것저것 먼저 저질러보고 시민권의 반발력을 슬그머니 따져본다. 예서 다치는 것은 시민 인권이다. 일례로, 얼마전 미 회계 감사원이 하원에 제출한 워싱턴시 CCTV 운용 보고서 내용만 봐도, 테러범들을 잡겠다며 설치한 CCTV가 테러와 범죄 예방은 고사하고 도시 시민들의 공공 생활을 크게 위축시켰다고 혹평하고 있다. 그런데도 강남의 CCTV는 용감하게 전국을 꿈꾼다. 이래저래 느끼한 권력자들의 닭살스런 응시의 동기나 효과를 따져보면, 지긋이 시민을 향해 쳐다보기는 하는데 영 사팔뜨기인 듯 싶다. 밖에서 그만둔 것 하느라 욕먹고, 실속도 없이 끈질기게 시민의 스토커가 되겠다고 우겨대니 말이다.
2003-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