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월간네트워커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 반대{/}작은 성과, 더 많은 과제

By 2003/10/20 10월 29th, 2016 No Comments

집중분석

박준우

실명제 추진 움직임이 가시화된 이후로, 함께하는 시민행동(이하 시민행동)은 진대제 장관 앞으로 보내는 공개 서한의 형태를 빌어 정보통신부와 논쟁을 진행했다. 시민행동은 모두 세 차례의 서한을 통해 실명제의 문제점들을 지적했고, 정보통신부는 두 차례의 답신에서 실명제 추진의 근거들을 제시했다.

논쟁은 크게 두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첫째, 정보통신부는 몇 가지 통계를 통해 명예훼손으로 인한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는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나 실명제를 도입한 사이트의 경우 명예훼손이나 광고가 급감했음을 주장했다. 반면 시민행동은, 급감한 것이 명예훼손인지 광고인지 불분명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실명제로 인해 게시판의 이용률이 낮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둘째, 정보통신부는 익명의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 등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 수사하기 어렵다는 사후 대응의 문제를 제시한 반면, 시민행동은 사이버 공간에서는 전자적 흔적이 반드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실명제의 도입이 프라이버시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했다. 통계상으로 봤을 때도 명예훼손보다 더 많이 발생하는 피해는 개인정보 침해로 인한 피해이며, 실명제는 이 문제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논쟁을 거치면서 정보통신부의 입장이 조금씩 변화되었다. 실명제 도입 여부는 해당 사이트나 커뮤니티가 자체적으로 판단할 문제라는 시민사회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논쟁만으로 정부의 마음을 돌린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진보네트워크센터가 한국신용정보평가와 정보통신산업협회 등 기존 실명확인 서비스 업체를 고발함으로써 정보통신부의 손발을 묶어버렸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 단체는 대화를, 다른 한 단체는 법적 대응을 시도하는 역할 분담이 정보통신부로 하여금 대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마냥 낙관할 문제만은 아니다. 사실 실명제 논의 과정에서 시민사회 또한 몇 가지 숙제를 떠안게 되었다. 실명제 반대의 논리로 개인정보 침해에 대한 우려와 해당 공동체의 자율적 선택이 강조되면서, 익명권이라는 근본적 권리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지 못했다. 그 결과 중앙선관위가 선거법 개정안에서 또 인터넷 실명제를 언급하는가 하면, 실명제 법제화와 무관하게 지방자치단체나 대형 상업 사이트들의 실명제 도입 추세는 계속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또 하나 인식해야 할 지점은 실명제에 공감한 사람들 중 상당수가 홈페이지나 커뮤니티를 운영하다가 집단 이지매나 스토킹 등의 폭력에 시달려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인터넷에 대해 무지하거나 권리의식이 부재한 사람들, 혹은 음란물 등은 보호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검열주의자들이어서 실명제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표현은 자유와 권리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권력의 자원이기도 하다. 인터넷은 모든 사람에게 표현이라는 권력 수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재산권의 역사가 그랬듯이) 그 권력은 손쉽게 폭력으로 전환될 수 있다. 국가 권력으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것과는 별도로, 개인들의 손에 주어진 권력이 폭력이 되지 않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정보 인권 운동의 숙제로 여전히 남겨져 있다.

2003-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