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월간네트워커

유보된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 이제 논쟁을 시작하자{/}끝나지 않은 논쟁

By 2003/10/20 10월 29th, 2016 No Comments

집중분석

장여경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에 대한 논쟁은 지난 대통령 선거 직후 격렬한 토론 와중에 시작되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때에 ‘민주당 살생부’와 ‘개표 조작설’과 같은 창작성 게시물들이 사실로 받아들여지면서 큰 파문을 낳았기 때문이다.

정보통신부의 실명제 계획 일단 유보

이 논쟁에 가장 신속하게 반응한 것은 정보통신부이다. 정보통신부는 새 정부 들어 첫 장관을 맞으면서, 장관의 재산과 가족 병역 문제로 게시판상의 홍역을 직접 겪은 터였다. 정보통신부는 지난 3월 28일 청와대 업무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공공·민간의 모든 인터넷 게시판에 의무적으로 실명제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보통신부의 실명제 계획은 곧 시민?사회단체의 반대에 부딪쳤다. 실명제를 국가적으로 실시한다는 점에서 검열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특히 실명을 사용할 수 없는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 그리고 내부 고발자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또 현재 시중에서 사용되고 있는 실명 데이터베이스들이 당사자들의 동의 없이 남용되고 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국민의 프라이버시권을 위협하고 실정법도 위반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실명을 이용해 글쓴이를 임의로 추적하는 행위는, 국민을 수색할 때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해야 한다는 헌법 조항에 위배된다는 지적도 있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정보통신부와 공개적으로 논쟁을 전개하는 한편 법적 대응에도 나섰다. 결국 정보통신부는 공공 기관의 인터넷 게시판에 대해서만 실명제를 실시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가 7월 들어서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 계획 자체를 모두 유보한다고 발표하였다.

게시판의 문제는 익명성의 문제가 아니다

네티즌 사이에서 찬반 양론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실명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실명을 밝히고 인터넷을 이용하면 책임성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객관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 문제가 된 글을 올린 사람들의 신원은 곧 밝혀졌고 특히 ‘개표조작설’의 경우, 지난 4월 법정에서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이 글들로 인한 파문은 인터넷 익명성 때문이라기 보다는 흔히 일어나는 정치적 소문에 대한 소동에 가깝다. 한편 인터넷 이용자가 늘면서 명예훼손과 같은 사적 분쟁도 늘어나고 있고, 인터넷 문화의 남성 중심성으로 인한 사이버 성폭력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익명성의 문제가 아니라 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불법 행위로서 최근 무리 없이 사법 처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결국 네티즌들의 실명제 논란은 인터넷의 익명성 자체나 불법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터넷 게시판 문화에 대한 불만에서 기인한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실명제를 찬성하는 보다 큰 이유는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한 혐오이다. 과거 언론과 출판 환경 하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권위 있는 편집자들에 의해 선택되는 엄격한 사실 정보와 투철한 예술 행위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 이후 대중은 직접 표현물을 생산하고 유통시키기 시작했고, 이러한 직접 표현 가운데 일부는 다른 사람에게 유쾌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결국 인터넷은 불유쾌한 표현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문화적 수용성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가늠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실명제 논란은 커뮤니케이션을 둘러싼 문화적 갈등이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토론의 문화,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지 않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논쟁은 이제 겨우 시작된 것이고 더 깊어져야 한다. 인터넷 강국이란 이름이 부끄럽게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해결책을 찾아본 적이 없다. 늘상 우리 정부가 실명제와 같은 강제적인 방식으로 토론할 기회를 박탈해 왔기 때문이다.

2003-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