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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실명제/자료] 사이버 익명성에 대한 칼럼 (KISDI 최항섭 연구원)

By 2003/09/08 10월 25th, 2016 No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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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DI 칼럼에서 퍼왔습니다. 아래 글의 원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로 존재하지 않는다
조회수 : 313   작성일 : 2003.09.08

 

최항섭
미래한국연구실
책임연구원
2000년도에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귀국해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 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적이 있었다. 학생으로만 있다가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갑자기 강의실에서 출석을 부르고 시험채점을 해서 학점을 주는 선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집에 가면 선생의 모습 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였다. 어두운 방 안에서 컴퓨터를 키고 그 안의 세계에 몰입을 하였다. 집에서는 도대체 선생이라는 작자가 공부는 안하고 맨날 컴퓨터하고만 논다고 걱정을 하였다. 주말에는 놀던 버릇을 고치지 못해 밤마다 H대 레이브 파티에 참석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레이브 파티에서 내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을 만났다. 숨을려고 했지만 그 학생이 날 먼저 발견했다. 나에게 그가 던진 말 ‘선생님 넘 웃겨요. 이래도 되요? 후후’.

IT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그 기술이 가져다주는 혜택에 열광하고 있다. 나 역시 그 기술에 지나치게 열광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기술이 나에게는 유토피아를 느끼게 해준다고 믿고 있으니. 하지만 기술은 언제나 우리 인간에게 디스토피아에 대한 두려움 또한 갖게 해주었다. IT기술 역시 예외는 아니다. 최근 NEIS를 둘러싼 사회 집단간의 첨예한 갈등, 개인정보누출과 도용과 같은 문제를 비롯하여, 얼마 전까지 사이버공간에서의 엽기적이고도 비정상적 행위로 비판받은 자살사이트, 채팅을 통한 가정파괴 등과 같은 IT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이 생기는 것에 대해서는 사이버공간의 익명성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익명의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이러한 인식 하에 일탈적 행위를 서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다중자아는 바로 이러한 논의의 핵심에 있다. 과연 나의 본 모습과 다른 모습은 지킬과 하이드와 같이 양과 음의 모습의 공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특히 한국사회는 자아의 통합과 일관성을 강조하는 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의 자아, 즉 사회규범을 어느 정도 체화한 자아와는 다른 자아의 등장에 대해 언제나 긴장한다. 그리고 종종 다중자아를 병리적 현상으로 취급한다.

그렇다면 다중자아의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먼저, 다중자아는 사이버공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현실공간에서도 우리는 다중자아를 목격하고 체험한다. 인생은 무대이고, 우리는 각자의 역할에 맞추어서 연기를 하는 배우라는 고프만의 이론은 다시 말하면 무대에 따라 그리고 상대방의 역할에 따라 우리는 다양한 가면을 쓰고 다른 자아의 모습을 연기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점잖은 신사로, 때로는 광기어린 추종자로, 때로는 치밀한 상인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다중자아는 분명히 익명성에 기초를 한다. 익명성이 전제되지 않으며, 다중자아는 그 확장에 있어서 엄청난 한계를 갖는다. 사이버공간에서건 현실공간에서건 마찬가지이다. 다만 사이버공간이 그 존재적 특성상 익명성의 확보가 용이하기 때문에 다중자아가 더 쉽게 발견되는 것뿐이다. 사이버공간이라 할지라도 익명성이 확보되지 않는 공간에서 다중자아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실용적 측면에서 익명성을 규제하는 사이버공간에서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익명성 논의의 장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사이버커뮤니티에서 조차 익명성을 규제하고 있는데,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상대방이 알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일상적 자신과 다른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데에 적극적일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다중자아는 그 자체로 병리적, 혹은 규범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대상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 문제가 다중자아와 관련된 핵심적 사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탈, 광기, 중독, 비이성. 이러한 단어들은 어떻게 정의 내려져야 하는가? 모두 단순히 정상과 이성의 반대급부로서 나타난 것들은 아닌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근대의 이성은 스스로를 규정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비이성을 만들어 냈다고 하였다. 이성과 비이성,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설정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과 정상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것이라며, 우리는 이 경계 설정 과정에서의 권력 작동 양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고등학교 때 국어교과서에 ‘일관성에 관하여’라는 에세이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 글은 바로 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자아만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으며, 입시에 바쁜 우리들은 이 글의 주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 주장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답만을 자동적으로 찾았다. 그리고 이런 교육을 받아가며,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과는 다른 나의 모습을 보이는 데 당황해 하며 부끄러워하기 까지 했다. ‘나는 학생이니까..’, ‘나는 여자니까..’, 하지만 사회화 과정을 통해 규범에 맞추어 만들어지는 자아와는 또 다른 원초적 자아가 분명히 우리에게 숨어 있다고 믿는다. 이 원초적 자아가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갈지, 아니면 해방의 탈출구로 데려갈 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원초적 자아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갖지 말자는 것이다. 원초적 자아는 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 약 력 *————————-

+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학사

+ 프랑스 파리5대학 사회학부 석사

+ 프랑스 파리 5대학 사회학부 박사

+ 미래한국연구실 연구책임자

+ E-mail : jesuishs@kisdi.re.kr

2003-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