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월간네트워커

인터넷 혐오와 익명성

By 2003/10/06 10월 29th, 2016 No Comments

인터넷트렌드

노경윤

게시판 순례 중에 얼굴을 찡그리게 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의 독자 게시판은 무성의한 반대로 일관하는 댓글들로 오염되어 아수라장이 된 지 오래다. 그보다 규모가 작고 덜 대중적인 곳의 상황은 그나마 낫지만, 지켜보기 위태롭다는 느낌은 여전하다.

사실 이런 일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오래전부터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왔으며, 비슷한 정치적 지형에 속하더라도 심각한 의견 충돌이 있을 수 있음을 망각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로울지도 모르겠다. 기어이 반대하는 곳에 찾아와서 악담을 늘어놓고 유유히 사라지는 사람들–종종 XX알바나 작전세력으로 지칭되는–이 존재하는 현실은 얼마나 암담한가. 반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고, 어쩌다 한 두 번 자기의사를 간결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면 뭔 걱정이랴(우리는 이정도 포용력을 가질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다!).

혼란의 배후(?)

지난 대선을 전후하여 우리 사회에 정치토론이 양적으로 급팽창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가운데 앞서 언급한 부정적인 현상이 더욱 가시화되고 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입증하기는 힘들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명제처럼 무리없이 받아들여진다. 여기에 대선 이후 보수언론의 집요한 세대갈등 조장, 악의적 곡해까지 가세하면서 인터넷에 대한 혐오조장이 나름대로 성공하고 있는 듯 하다.

조작극에 놀아나서는 안되겠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실제로 사람들을 인터넷으로부터 등 돌리게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닌가 자문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과거 BBS 시절에도 플라자란의 뜨거움은 지금보다 못할 바 없었으나 그것이 혐오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금의 이 혐오는 빠르게 변화해 온 인터넷 환경에서 결여된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는 듯 하다. 과연 무엇이 오늘의 이 혐오, 혼란을 부추키고 있는 것일까.

상호작용의 천국과 지옥

인터넷 붐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웹에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할 때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제 이것은 옛날 일이 되었다. 게시판 제작기술의 발전으로 동적인 페이지를 손쉽게 만들고 연결할 수 있게 되면서 HTML의 의미는 급격히 축소되었고, 최근에는 아예 게시판만으로 홈페이지가 구성되는 경우도 쉽게 눈에 띈다. 웹싸이트와 게시판의 구별이 사라지고, 세스코의 해프닝에서 볼 수 있듯 바야흐로 현대적인 웹싸이트는 웹마스터와 네티즌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다!

상호작용이 어쨌다는 말인가. 평등한 대화, 직접 소통, 이것은 우리 모두가 인터넷에서 바라던 바가 아닌가.

상호작용은 여전히 인터넷의 핵심적인 가치다. 그러나 개인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인원은 제한되어 있는 반면 만인이 만인에 대해 상호작용하는 웹 공간에서 익명의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해야 한다는 것은 문제의 근원이 된다. 하나의 고정된 이름을 사용하며 자기 터전을 지키고 있을 사람과 잠시 정거장을 지나듯 스쳐가는 사람과의 상호작용은 애초에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웹싸이트 혹은 커뮤니티는 사용자 등록 시스템을 도입하고자 할 것이다. 공개성, 익명 보장에 대한 가치와의 대립으로 진통이 있을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사용자명(ID)과 이메일 기입과 같은 간단한 절차를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 즉 익명성의 남용으로 인해 발생하는 부정적 사태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것이다. 이 안도감은 역으로 그동안 지키고자 노력했던 익명성의 가치를 회의적으로 다시 보게 만들 것이다.

익명성의 퇴조

과거에 비해 많은 웹 커뮤니티/게시판들이 별다른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음에도 점차 회원가입을 요구하는 추세로 가고 있다. 주민등록번호나 핸드폰 번호와 같은 개인신상정보를 묻는 것은 반드시 지적되어야 하겠지만(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 그런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익명의 남용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막을 갖출 것을 스스로 원하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실명제’와는 상관없이 개인이 스스로 자기정보를 등록하고 자기 이름에 책임을 지게 하는 정도의 느슨한 실명제라면 굳이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명을 숨기고 다른 사람인 척 하고 싶다면, 일관되게 그렇게 행동하면 그만이다. 즉 원한다면 여전히 익명으로도 남을 수 있는–그러나 익명인 탓에 그 발언의 중요성이 평가절하될 것을 감수해야 하는– 구조여야 한다는 말이다.

익명성이란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한 권리로서 큰 의미가 있지만, 사회성과 양립하는 상황에서 버려지는 일도 많다. 구두를 사는데 주민등록증을 요구하는 것은 나쁘지만, 최소한 구두를 가져간 사람과 돈을 지불한 사람이 동일인임을 입증할 수 있는 정도의 확인 장치는 필요한 것이다.

이제는 신뢰를 생각하자

인터넷의 등장 이후, 많은 공개된 게시판들이 익명성과 관련한 크고작은 진통들을 겪어왔다–언어폭력, 인신매도, 욕설, 허위사실유포, 명예훼손 등등. 때로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약자의 마지막 저항이 익명성의 폐해로 빛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만일 익명성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 있다면, 익명 보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와 위에서 말한 ‘선택적 실명제’–느슨한 형태의 자발적 자기정보 등록제도라고 할 수도 있는–를 도입했을 때의 이점을 곰곰히 비교해보라.

익명성이 인터넷의 모든 문제는 아니며, 선택적으로 실명제를 도입한다고 해서 당장 익명성으로부터 발생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익명성은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발생하는 무대의 중요한 배경이므로 문제해결의 실마리로써는 적절할 것 같다. ‘네티즌이…’로 시작하는 주류언론의 부정적이고 익명적인 수사야말로 믿을 수 없고 혐오스럽지 아니하던가.

2003-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