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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실명제/자료] 인터넷 실명제는 위험한 규제 (이은우)

By 2003/04/23 10월 25th, 2016 No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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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3.04.23(수)

인터넷 실명제는 위험한 규제

정보통신부는 모든 정부부처의 웹사이트 게시판을 실명 확인된 사람만 이용하도록 하고, 나아가 여론을 수렴하여 모든 민간영역에서도 인터넷게시판의 실명운영의 법제화도 검토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정보통신부는 인터넷에서 익명성 때문에 건전한 토론문화가 정착되지 못하고, 명예훼손, 협박 등의 범죄행위가 횡행하고 있다고 여기고 인터넷의 정화와 건전한 토론문화의 정착을 위해 실명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인터넷의 익명성은 보호되어야 할 훌륭한 가치이고, 오히려 인터넷 실명제는 위험하다.

표현의 자유, 그 중에서도 특히 소수자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인터넷에서의 익명성은 보호되어야 한다. ‘익명성’은 표현의 자유의 핵심적인 내용 중 하나다. 우리들은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를 기억한다. 박노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시집 ‘노동의 새벽’은 우리 문학의 찬란한 금자탑이었으며, 우리를 성숙하게 만든 교과서이기도 했다. 동아일보가 언론탄압을 받을 때 독자들은 ‘익명’광고를 했다. 미국의 독립을 가져온 토머스 페인의 그 유명한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책도 ‘한 영국인’이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다. 이처럼 익명은 사회 진보를 향한 소수의 목소리를 담아주는 소중한 표현방식이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익명성은 보호되어야 한다. 유럽의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서 익명을 보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천명했다. 그래서 유럽연합은 회원국에게 인터넷 이용자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인터넷에서의 모든 거래정보나 활동정보를 필요한 기간이 지나면 익명으로 처리하라는 지침을 제정하기도 했다. 인터넷의 프라이버시 보호는 매우 취약하다.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인터넷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축적할 수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인터넷에서는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서 되도록 익명으로 활동하라고 한다. 게시판에 글을 쓰기 위해서 실명확인을 해야 한다면, 우리나라 인터넷망은 실명과 주민등록번호로 넘쳐날 것이다. 아찔한 일이 아닌가

물론 인터넷에서도 익명성이 무한정 보장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업자들의 경우, 거래와 정보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실명을 표시하도록 해야 한다. 이용자들에 대해서도 필요한 경우는 실명확인을 하도록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때도 사업자는 이용자에게 실명이 아닌 아이디(ID)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이용자가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범죄수사를 위해 실명을 확인할 때에도 최소한도로 국한되어야 한다. 혹자는 인터넷에서 익명을 보장하면 범죄행위가 횡행할 것이라고 보는데, 지나친 기우다. 지금도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적법절차에 따라 아이피(IP)주소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인터넷은 이미 실명확인의 과잉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사업자들이 이메일 광고를 하기 위해 이용자들에게 과도하게 실명정보를 요구하고 있다. 지금 한국신용평가정보라는 민간회사는 3500만명의 실명과 주민등록번호를 데이터베이스로 보유하고 있고, 이것은 인터넷의 실명확인의 원천이 되고 있다. 실명확인의 명목으로 수집한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은 부도덕한 사업자의 손에 넘어가 국민들의 프라이버시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한번 유출된 개인정보는 평생 없어지지 않고 주민등록번호를 매개로 하나로 집중된다. 다음, 야후, 네이버에 있는 나의 개인정보가 해킹돼 주민등록번호를 매개로 집중될 경우를 생각해 보았는가 지금도 단돈 10만원만이면 성별, 연령별로 분류된 거의 전국민의 전자우편 주소를 불법적으로 살 수가 있다. 지금의 추세라면 1~2년 뒤 전국민의 주민등록번호, 이름, 전자우편주소, 취미, 직업이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져 단돈 10만원에 판매될 것이다. 지금도 늦은 감이 있다. 실명제를 서두르지 말고, 오히려 실명확인과 주민등록번호의 남용을 막기 위한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인터넷 실명제의 도입으로 기업은 손쉽게 돈벌이를 하고, 정부는 비판에 귀를 막고 속이 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인터넷의 표현의 자유는 위축되고 국민은 프라이버시 침해의 위험 속에 생활하게 될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인터넷에서 규제의 과잉보다는 규제의 결핍을 택하라고 하였다. 인터넷에서의 무책임한 발언과 불법정보의 유통 역시 섣부른 실명제라는 규제보다는, 더디지만 시민사회의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는 자율적 정화능력에 의하여 해결해야 한다.

이은우/변호사·진보네트워크 운영위원

2003-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