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버시

[프라이버시/칼럼] 위험 징후

By 2003/02/27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진보네트워크센터

* 민주사회와 변론 2003년 3/4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위험 징후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정책국장)

대구 지하철 참사. 그 끔찍한 사고는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이 빚어낸 참사라는 데 이견이 없는 것 같다. 안전불감증이란, 성과주의의 이면에 있는 것이다.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형 참사는 ‘짓는 데에만 급급했던’ 한국 사회가 자초한 것이었고 이번 대구 참사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형식적으로만 갖춰져 있었던 소방 설비, 화재에 약한 구조와 자재들, 그리고 한 차량에 딱 한 명씩, 그것도 비상시 대응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기관사를 배치한 1인 승무제가 총체적으로 작동하여 참사 규모를 키웠다. 작은 화재라도 날 수 있다는 것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발상이 부른, 예견된 사고였던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대형 참사가 나기 전에 이 위험한 징후들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 사회 뿐 아니라, 조급하게 규모를 키우는 20세기 근대주의 전체가 ‘위험사회’의 징후라는 한 사회학자의 경고가 생각난다. 가장 위험한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근대사회가 고도화할수록 사고는 대형화하며 시스템화한 사회에서 사고 여파는 연쇄적이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찰’이다. 근대사회 전체와 과학기술에 대한 성찰 말이다. 그래서 어떤 나라들은 ‘기술영향평가'(Technology Assessment)라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기술을 도입하기 전에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성찰하고 평가한 후에 해당 기술의 도입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의 환경영향평가 같은 것이 이런 제도이다. 그런데 이 제도가 최근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사고,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문제, 즉 기술의 ‘잠재적인 문제’에 대해 평가하다 보니 평가의 대상이 된 건물, 도로, 기계의 도입을 주장하는 쪽에서 언제나 강력히 반발한다. 그러다보니 일단 사업을 추진하고 평가는 사후에 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사후 평가가 안 좋다 하더라도 대규모 사업은 일단 추진한 후에는 중단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위험 징후들은 그렇게 무시된다.

이번 대구 지하철 참사를 둘러싼 여러 논란 속에서 나는 또 다른 위험 징후들을 감지한다. 각종 첨단 감시 시스템에 대한 지나친 기대들이 그것이다.

서울지하철공사는 서울시내 1~4호선 지하철에 전 승객을 대상으로 한 엑스레이 검색대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실종자에 대한 핸드폰 위치추적과 유전자 감식에 대한 주목 또한 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진작부터 감시 시스템에 집착해 왔다. 우리의 거리와 직장, 그리고 지하철에는 세계 어느 나라 못지 않게 CCTV가 촘촘히 설치되어 있다. 정보통신부는 향후 생산되는 모든 핸드폰 단말기에 본인 동의 없이도 위치를 추적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안을 마련하였으며 검찰은 범죄자를 대상으로 한 유전자 정보은행을 제안한 바 있다. 지난 대통령 선거때 ‘민주당 살생부’로부터 일기 시작한 논란은 인터넷을 모두 실명화하자는 ‘인터넷 실명제’ 논의로 이어지고 있으며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은 모든 교사, 학부모, 학생의 민감할 수도 있는 개인정보를 본인들의 동의 없이 수집·저장하겠다고 한다. 이런 추세들은 충분한 검증 없는 전자정부의 추진과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추적·감시 기술을 주력 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정보통신부의 지침 속에서 가속화되고 있다. 정보통신부는 손수 국민 일만명의 얼굴과 지문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해 업계에 테스트용으로 제공한 바 있다. 이런 첨단 추적·감시 기술들이 이번 지하철 참사로 주목받으면서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기술들이 도입되면 우리 사회가 정말로 투명해지고 안전해질 것인가? 일정한 기술적 소방 시스템은 갖추어져야 하겠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한 촘촘한 감시는 이 사회의 사고와 문제를 막을 수 없다. 대구 지하철 참사는 지하철 승객의 배낭 속을 충분히 검색하지 못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지하철에서 이 승객의 탑승을 막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 참사는 다른 다중공간에서 발생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에 있어 기술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회피하는 것이자 또 다른 문제를 키울 뿐이다.

또한 기술은 언제나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촘촘했던 CCTV는 이번 사고에서 자욱한 연기로, 그리고 인원 부족으로 사고 방지엔 무용지물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열의 화재 속에서 유전자 감식 또한 매우 부분적일 것이라는 발표도 있었다. 기술적인 한계를 또 다른 기술로 극복하면 될까? 아니, 오히려 여러 가지 기술이 고도화할수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범죄나 사고는 더욱 파괴적이고 악독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국민이 이제 어디를 가던지 CCTV에 찍히고, 핸드폰을 추적당하고, 유전자를 기록당하고, 검색대를 통과해야 하는 사태야말로 대형 참사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또다른 참사를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국민을 감시하는 시스템이 곳곳에 설치된다면 이는 실종자의 작은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가족들의 애타는 심정을 유린하는 것이자 국민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행위이다.
이것이야말로 ‘전자감시사회’의 도래가 아니겠는가. 오늘날의 빅브라더는 기술 그 자체이다. 기술이 독재하는 사회야말로 전자감시사회인 것이다. 전자감시사회란, 스스로가 무죄라는 것을 입증하기 전까지는 누구나 유죄로 간주되는 상태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일단 모든 국민이 잠재적으로 범죄자이기 때문에 검색대를 통과하고 CCTV에 촬영되고 핸드폰을 추적당하고 유전자를 의탁해야 하며 이를 거부하는 국민은 준범죄자나 다름이 없다. 자신에 대한 모든 사실에서 먼지 하나 떨어지지 않는 국민만이 가던 길을 갈 수 있다. 이런 감시의 증대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합의해 온 인류의 인권적 발전을 후퇴시키는 것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좋지 않은 징후들이 보이고 있다. 이 징후들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위험사회에 대한 논의는 기술에 대한 맹신이야말로 위험한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사회구조적인 성찰과 대책이 없는 기술적 해법은 향후 더 큰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감시와 추적은 대책이 될 수 없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대하게 위협할 뿐이다. 감시와 추적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특히 민주주의와 국민의 인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성찰하고 평가해야 한다. 나중에는 때늦은 후회만이 남을 것이다.

2003-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