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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버시/칼럼] 전자감시사회론,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By 2002/11/15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진보네트워크센터

* 시민과학에 기고한 서평입니다.

전자감시사회론,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장여경 | 진보네트워크센터 정책국장
* Lyon, David. 1994, 『전자감시사회』, 한국전자통신연구소.
* 홍성욱. 2002, 『파놉티콘 – 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

최근 감시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크게 증가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우려의 수준을 넘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별로 보여줄 생각이 없었던 사생활이 뜻하지 않게 노출된다. 우편이나 이메일로 갑작스런 방문을 받는 경우가 늘었고 거리를 걸어가거나 게시판에 글을 쓸 때 내가 나라는 것이 기록되지는 않는지 신경쓰게 되었다. 무심코 저지른 행위가 여지없이 디지털 장비에 기록되어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상황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 정도면 공포에 가깝다. 이런 현상을 사회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바로 ‘전자감시사회론’이다.

전자감시사회론에 대한 국내 출판 서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데이빗 라이온의 『전자감시사회』(한국전자통신연구소 발행, 1994년)와 홍성욱의 『파놉티콘 – 정보사회 정보감옥』(책세상, 2002년)이다. 『전자감시사회』의 번역이 매우 불만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 두 책을 모두 고맙고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나는 이들이 최근 급증하고 있는 ‘노동 감시’를 설명하는 방식에 대해 주목했다.

라이온은 전자감시사회가 도래했으며 점증하는 노동 감시 역시 그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전자감시사회는 어떻게 도래한 것일까. 그는 컴퓨터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의 발달로 인해 노동자와 시민이 보다 강화된 감시를 받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정보의 디지털화는 정보 처리 능력, 정확도, 보존성, 변환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전자감시능력을 극대화하였다. 특히 감시에 활용되는 정보처리기술이 발달하여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환경으로 사소한 움직임조차도 시공간을 초월하여 데이터베이스에 수집, 기록된다는 점에서 전자감시사회는 더욱 중앙집중화된 사회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흔히 조지오웰의 소설 『1984년』에 등장하는 ‘빅브라더’의 국가가 연상된다. 물론 컴퓨터 감시는 이 소설의 감시보다 더 근대적이다. 감시를 일상화시키고, 확장시키며, 심화시킨 것이다. 그래서 전자감시사회의 또 다른 전형은 푸코가 벤담의 판옵티콘을 차용하여 제시한 ‘원형감옥’이다. 원형감옥 안에서 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 간의 시선과 권력의 비대칭은 결국 주체가 규율 권력을 내면화하도록 만든다. 원형 감옥은 과거의 직접적인 감시와 달리 ‘벨벳으로 된 장갑’ 속에 철권을 숨긴다. 그러나 감시 권력은 이로써 더욱 막강해진다.

라이온에 따르면 작업장에 감시가 강화된 것도 컴퓨터 기술이 발달한 데 따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작업장의 기술은 분명 자본주의의 적대적 노자 관계의 맥락에서 도입되지만 최근 노동 현장을 비롯해 이 사회 전반에 감시가 증가하는 것은 기술의 발달에 의한 ‘보편적 현상’이다. 포디즘이 위기를 맞자 등장한 토요티즘은 다기능 작업과 적기 생산을 위해 작업과정을 고도로 통제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는데 컴퓨터 기술이 그 실현을 가능하게 했다. 이에 따라 애초 물(物)을 통제하기 위해 도입된 기술이 사람도 감시하면서 최근 새로운 노동 감시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CCTV, 키보드 입력 감시, 운송 기록, 스마트 카드, 생체 인식, 위치 추적, 전자메일 감시 등 첨단 감시 기술의 권능이 노동자를 ‘완벽한 감시체계’ 하에 처하게 했다는 말이다. 물론 라이온은 기술결정론에 대한 비판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사회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STS 연구의 성과를 언급하며 감시 기술은 우연하게 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라이온이 보기에 노동 감시는 시장확보와 서비스 개선, JIT 시스템 속에서 비의도적으로 발생한 측면이 강하다. 그는 "노동자 감시는 효율성, 생산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에서 나온 의도되지 않은 결과"라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노동 감시를 ‘비조직화된 감시'(dosorganized Surveillance)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비조직적 감시가 기존 테일러리즘의 감시와 가장 다른 점은 규율 권력의 효과가 크다는 데 있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일초의 오차도 없이 면밀히 관찰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순응한다.

나는 이러한 전자감사사회론에 우리가 매우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사회를 몇 년간 풍미했던 정보사회론의 장밋빛 기술 결정론과 대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전자감시사회론이 전제하고 있는 ‘전자감시사회’에 대해 미심쩍은 마음을 거둘 수 없다. 감시 기술이 어떻게 출현했고 어떻게 발달되어 왔는지에 대한 전자감시사회론의 입장이 아무래도 불분명한 것이다. 라이온은 ‘우연적 선택’을 강조하지만 이것을 면밀하게 증명해낸 것은 아니다. 그는 한 대목에서 "새로운 기술의 채택은 자본주의 사업장에서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애써 말했지만 ‘의식적인 선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고 있다. 아무튼 그에게는 전자감시사회가 도래했다는 진단이 가장 중요하며, 전자감시사회를 초래한 것이 컴퓨터 기술의 발달이라는 것만이 확실하다.

결국 전자감시사회론은 조심스럽게 기술 결정론을 피하고자 했지만 기술 결정론의 혐의를 완전히 벗을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감시사회론은 감시 기술이 사회적 관계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출현하여 발달한 것으로 본다. 그러면서도 그 기술의 발달은 필연적인 진화의 결과로 간주한다. 무엇보다 전자감시사회론은 감시 기술이 사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전자감시사회는 필연적으로 도래한 것이며 이에 대응하기 위한 실천은 매우 부실한 것일 수밖에 없다(실제로 라이온의 이 책은 과감한 진단에 비해 실천적 제언이 매우 무력하다). 라이온은, 아예 ‘새로운’ 분석틀로 ‘감시사회’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감시사회의 개념은 현대성의 이러한 핵심적인 특징의 광범위한 추이로 주의를 돌리는데 유용할 것이다. ‘감시사회’를 검토하는 것은 감시의 측면으로 오늘날의 사회관계를 검토하는 것이며, 이것은 자본주의, 가부장제 등의 측면으로 검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이온, 앞의 책, 333쪽.) 이런 관점에서 한 단계 진전한 것이 홍성욱의 연구이다. 홍성욱은 기술의 우연성과 중립성에서 오히려 감시를 극복하는 실천적인 함의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홍성욱은 역사적으로 판옵티콘으로서의 작업장이 형성되고 이것이 ‘전자·정보 판옵티콘’과 ‘수퍼판옵티콘’으로 발달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노동 감시의 문제를 고찰한다. 홍성욱에 따르면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의 본질은 그의 동생 새뮤얼 벤담의 공장에서 더 잘 드러난다. 판옵티콘은 노동을 통해 죄수 혹은 노동자의 영혼에 규율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공장이건 감옥이건 판옵티콘이라는 점에서 그 본질이 같다. 판옵티콘은 그 자체로 거대한 공장이며 기계이다. 벤담은 스스로 판옵티콘을 감시의 원리가 내재된 자동기계로 불렀다고 한다. 이 거대한 기계의 궁극적인 목적이 감시를 내면화해서 규율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공장에 도입되는 기계 역시 그 부속품으로써 판옵티콘의 기능을 구현한다. 기계는 숙련 노동을 무력화시키고 육체적·정신적인 규율을 강제한다.

그런데 홍성욱이 주목하는 것은 최근의 감시가 벤담의 판옵티콘 이상이라는 점이다. 20세기 중엽 이후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정보 판옵티콘(information panopticon)’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작업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이 정보를 관리에게 집중시키고, 작업자 개개인에 대한 실시간 정보 관리를 강화하면서 등장한 정보 판옵티콘은 사람에 대한 정보 수집, 직접적 통제와 규율을 하나로 합쳤다. 특히 정보 판옵티콘에서 정보는 벤담의 판옵티콘에서의 시선을 대신하여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이들에게 규율을 강제한다. 판옵티콘에 갇힌 죄수가 자신이 감시를 당하는지 아닌지를 모르듯이, 전자 판옵티콘의 정보망에 노출된 사람들 또한 자신의 행동이 국가나 직장의 상사에게 언제 어떻게 열람되는지 아닌지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나 작업에 주의를 기울이곤 한다.

그러나 전자 감시는 판옵티콘의 감시 능력을 전 사회로 확장했다. 시선에는 한계가 있지만 컴퓨터를 통한 정보 수집은 국가적이고 전 지구적이기 때문이다. 감시가 범사회적이고 일상적인 것이 되면서, 간수가 ‘중앙’탑에 숨어서 주변의 감방을 감시했던 판옵티콘과 달리, 전자 판옵티콘에는 ‘중앙’이 뚜렷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또 전자 감시는 피감시자의 자발적인 협조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로 인하여 전자 판옵티콘은 ‘수퍼 판옵티콘’으로 확장된다. 이런 경향은 특히 기업이 소비자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받기 위해 기업의 정보 수집에 자발적으로 협조한다. 그러나 이런 편리함의 이면에서 기업은 소비자의 상세한 소비 성향에 대한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고 이 정보를 광고 회사나 기타 기관으로 넘기기도 한다. 우리는 보여짐으로써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발적인 참가로 인해 감시의 네트워크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벤담의 판옵티콘을 전자 판옵티콘으로, 다시 수퍼 판옵티콘으로 발달시킨 동력은 무엇일까. 기술의 발달이다. 홍성욱은 이것은 기술이 정치적으로 중립적으로, 우연히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기술의 역사를 통해 어떤 기술이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사회·문화적 영향을 낳는 경우를 종종 본다. 기술의 궤적은, 기술이 새롭게 열어주고 힘을 부여하는 사회 세력들과 동시에 그 기술 때문에 힘을 잃게 되는 사회 세력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때 그때 형성되는 불안정한 균형에 따라 불규칙하고 가지치기 식의 경로를 따른다"는 것이다. (홍성욱, 앞의 책, 139쪽.)

그렇다면 동일한 감시 기술이, 역으로 피감시자가 권력을 감시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 이에 홍성욱은 실천적 전략으로서 시놉티콘(synopticon)이나 역감시 판옵티콘을 제시한다. 작업장에서는 정보 공개를 이용해 판옵티콘을 역판옵티콘으로 바꿀 수 있다. 홍성욱이 인용한 주보프의 연구에 의하면 두 개의 회사가 갖고 있었던 비슷한 성능의 노동자 관리 데이터베이스가 노동자에 대한 공개와 참여 허용 정도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았다. 노동자 관리 데이터베이스가 노동자와 관리자 모두에게 공개되었던 회사에서는, 관리자의 수직적인 감시 외에도 작업 단위 간 수평적인 감시와 노동자들이 관리자를 감시하는 역감시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을 볼 수 있는 집합주의적 감시가 한 사람만이 다른 모든 사람을 감시하는 전자 판옵티콘에 대한 해독제로 작용해 감시가 ‘투명’해졌다는 것이다. 반면에 데이터베이스가 관리자들에게만 공개되었던 회사에서는, 노동자들이 이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은밀하게 태업했다고 한다.
결국 정보의 공개 여부에 따라 비슷한 정보 기술이 하나는 시놉티콘으로, 다른 하나는 판옵티콘으로 기능했다는 것이었다.

홍성욱이 지적한바대로 ‘역감시’는 매우 실천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 특히 현대의 만연한 감시를 파편화한 개인이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국민이 자신을 감시하는 권력을 역으로 감시하는 집단적인 권리는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시민정치적 영역에서 인터넷을 이용한 역감시가 최근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노동 감시 기술은 역감시로 극복될 수 없다. 노동 감시는 일차적으로 생산관계라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가 규정한 관리방식으로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보프의 연구는 작업장이 ‘누구를 위해’ 투명해졌는지를 묻지 않으며, 그렇게 투명해진 작업장이 ‘누구에게’ 좋았다는 것인지도 묻지 않는다. 무엇보다 최근의 노동과정 연구들은 포디즘 이후 ‘상호 감시’가 하나의 전략적 관리 방식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감시의 해체가 아니라, 과거 팀제를 기본으로 이루어지던 노동 통제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공정에까지 미치기 위해서 도입된 ‘고도의’ 관리 기법으로서, 오히려 감시의 ‘강화’에 가깝다는 것이다. 즉 주보프가 보여주는 것은 감시 기술이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정보 공개와 경영 참가와 같은 작업장 민주화는 물론 매우 중요한 실천이다. 그러나 노동 감시에 대한 사회과학적 대응이 생산 관계와 권력 관계에 대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방만이다. 홍성욱도 이런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모든 정보의 공평한 공개가 투명한 사회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로 인한 차별이 없어야 하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직 이런 세상이 되기에는 요원하다. 우리는 정보의 공개가 차별을 없애는 세상이 아니라 정보의 공개가 더 은밀한 차별을 만들어내는 세상에 살고 있다 (홍성욱, 앞의 책, 136쪽).

결국 이 부분이 전자감시사회론의 가장 큰 한계이다. 전자감시사회론은 기술의 사회적 관계를 암흑 상자(black box)로 간주하고 기술을 중립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이런 관점 하에서 감시는, 비록 차후 역감시로 대응한다 하더라도, 기술의 발달에 따라 확장되는 피할 수 없는 사태이다. 그러나 기술은 그 사회적 관계에 대해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위너(Langdon Winner)가 말했듯이 기술은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발명되며 그 목적과 효용을 다하는 데서 기술의 결과는 어느 정도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술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유형의 정치 사회적 구조 변화를 조건짓거나(condition) 조장(encourage)한다. 이미 고전적인 노동과정 연구자인 해리 브레이버맨은 "특히 자본의 의도에 따라 공장에 도입되는 기계들은 다소 선결적"이라고 지적했다.({노동과 독점자본}) 노동 감시 기술은 일차적으로 생산 관계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노동과정에서 노동 통제와 감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고 최근 등장한 첨단 노동 감시 기술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최근 우리 사회의 감시에 대한 공포는 인격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 기술이 필연적으로 초래할 어떤 상태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감시는 어디까지나 누군가 보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 반대쪽에 보여지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보는 사람’이 다양해지고 다층화했다 하더라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 인격 – 즉 사회적 관계의 문제를 불문에 붙이는 순간, 대응의 폭은 좁아진다. 누구에게 따지거나 누군가를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면 감시는 피할 수 없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전자감시사회론은 감시 기술이 ‘어디서 온 것인지’, 즉 무엇이 그 감시 기술을 형성했는지 묻지 않는다. 그러나 오웰의 빅브라더는 전체주의 권력이 만들어 냈으며 푸코의 판옵티콘은 근대주의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들의 원형에는 이미 극복의 대상이 명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실천적이었다. 반면 최근의 전자감시사회론은 .오로지 기술적인 감시 능력의 확대만을 걱정한다.

감시 기술과 감시 사회를 불러오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해명이 없다는 점, 이것이 내가 전자감시사회론에 대해 갖고 있는 불만이자 우려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자감시사회론은 정보사회론이 범했던 기술 결정론의 우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다. 기술의 발생을 묻지 않은 채 감시 기술에 대해 두려워한다. 이는 분명 무언가 불균형한 문제 인식이다.

2002-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