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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칼럼] 소리바다, 도둑놈 심보?

By 2002/09/16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진보네트워크센터

소리바다, 도둑놈 심보?

장여경 ( 진보네트워크센터 정책국장 | della@jinbo.net )

피투피(P2P, Peer to Peer) 서비스 <소리바다>가 폐쇄되었다. 음반업계는 소리바다 폐쇄에 반대하는 네티즌들의 주장이 ‘음악을 공짜로 들으려는 도둑놈 심보’라며 깎아 내렸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단순한 것은 아니다.
피투피 기술은, 이를테면 영희가 자신의 컴퓨터로 철수의 컴퓨터에 직접 접속해서 파일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서비스 중개자의 역할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미미하다. 그래서 피투피 기술로 파일을 주고받는 것은 영희가 철수에게 개인적으로 음반이나 책을 빌려주는 것과 같다. 물론 피투피 기술이 일대일 방식은 아니다. ‘다대다’ 방식의 피투피에서는 여러명의 이용자가 동시에 서로에게 접속하여 파일을 주고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류가 가져본 적이 없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피투피 기술로 인류 역사상 그 어느때보다 혁명적이고 풍요로운 문화 공유를 경험해본 네티즌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한다.
‘영희가 철수에게 개인적으로 음반을 빌려주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 당연한 공유의 권리라는 것이다.

저작권자들은 여기에 대해 토론보다는 물리력으로 응수했다. 소리바다를 폐쇄시킨 것이다. 그러나 피투피 서비스가 자신들의 저작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음반업계의 주장은, 개인들 간의 비영리적이고 사적인 이용에도 무조건 저작권을 적용해야 한다는 어거지로 비약될 위험이 있다. 그들이 이런 성급함은 그들 또한 자신들의 권리가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나왔다. 네티즌들의 권리가 저작권자들의 또다른 권리, 즉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권은 때때로 다른 모든 인권을 압도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둘 점은 공유를 주장하는 네티즌 어느 누구도 저작권자들이 굶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작권자들이 보상을 받으면서도 문화 공유 또한 계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세계인권선언 제27조의 1항에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사회의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관여하며 예술을 감상하고 과학의 발전과 그 혜택을 향수할 권리를 가진다"고 되어 있다. 2항에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제작한 과학상 문학상 흑은 예술상 작품으로부터 발생하는 정신적 물질적 이익에 대하여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조항은 조화될 수 없는 것일까? 모순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모순은 가장 먼저 저작권 스스로가 자초하였다. 저작권이 초심에서 너무 멀어진 것이다. 이제 저작권은 과거와 달리 실제 저작물을 창작한 사람들의 것이라기보다는 음반업계를 비롯한 저작인접권자들의 것이다. 저작권을 보장받는 기간은 저작권자가 죽은 후에도 계속 늘어만 간다. 그래서 최근의 지적재산권에서는 "인류가 문화예술을 널리 향유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창작자에게 적절한 보상을 한다"는 초기의 소박한 출발 취지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인류의 노동이 주체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의 생존을 책임지던 본래의 의미로부터 완전히 멀어져, 이제 하나의 상품으로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게 된 것처럼 말이다.

다른 한편에는 문화 상품화의 가속화 경향이 존재한다. 나는 소리바다 문제를 두고 청소년들과 토론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 많은 청소년들이 문화 행위를 ‘소비’와 구분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이제 문화는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사는 행위를 의미하며 우리는 시장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소리바다를 통해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엠피쓰리(MP3) 파일을 교환하는 것은 공유가 아니라 일종의 부도덕한 상행위로 보일 수 밖에 없겠다. 친구에게 음반이나 책을 빌려주는 것도 시장의 규범으로 평가되고 우리가 문화를 창작하고 공유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아집으로 여겨지는 시대인 것이다.

여기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디지털에 있어서 ‘복사’의 개념이다. 저작권은 그야말로 ‘복사(copy)할 수 있는 권리(right)’를 뜻한다. 그런데 컴퓨터 네트워크에서 기본적인 ‘보고 듣는’ 행위는 임시로라도 내 컴퓨터에 일단 파일이 전송되어 복사되는 과정 없이 불가능하다. 즉, 컴퓨터 네트워크에서는 무언가를 보고 들을 때마다 복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저작권이 보고 듣는, 기본적인 문화 행위에까지 개입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가장 큰 모순은 디지털재의 새로운 생산/소비 양식에서 유래한다. 디지털재는 일단 원본이 만들어진 후에는 완벽한 사본을 재생산하면서도 그 노력과 비용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따라서 이용자는 ‘공짜로’ 그리고 ‘무한대로’ 저작물을 재생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디지털재의 생산/소비 양식으로 더 큰 혜택을 받는 쪽은 자본이다. 이제는 전혀 추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재생산할 수 있는 상품이 생긴 것이다. 이 생산 과정은, 자본이 비용을 거의 들이지 않으면서도 무한대로 독점적인 잉여가치를 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은 저작권을 계속, 더욱, 강화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인터넷은 더 이상 우리에게 복음이 아니다. 오히려 재앙에 가깝다. 디지털과 네트워크는 창작물이 무한대로 복사되고 교환될 수 있는 물적 환경을 제공했지만 이제 이것이 상품화된 생산/소비 과정에 철저하게 포섭됨으로써 과거에는 당연하게 누릴 수 있었던 기본적인 문화 행위조차 구속하는 빌미가 된 것이다.

타협책이 나오고 있다. 소리바다가 음반업계와 이해를 조정하면서 유료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유료화로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그나마 지금의 소리바다에는, 미약하더라도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서비스 중개자라는 존재가 있다. 그러나 그조차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 피투피 기술들이 있다. 한편으론 고소하다. 피투피 기술은 어쩌면 지금의 저작권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모순들에 도전하기 위한 운명으로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술은 결코 사회를 압도할 수 없다. 우리의 미래는 피투피 기술 자체를 금지하는 방향으로 갈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소리바다의 폐쇄는 무척 우울한 소식이다. 그 뒤를 이어 지금 국회에 계류되어 있는 저작권법이 디지털 도서관의 기능을 제한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 왔다. 도서들이 디지털화되고 네트워크화되면 이것을 보고 듣는 행위 자체가 저작권 위반이라는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 아니 바로 인터넷이라는 이유로, 장애인이, 소외 지역의 주민들이, 도서관에 접속을 할 수 없다니,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닌가?

나는 감히 주장한다. 진정한 도둑놈 심보는 네티즌에게 돌아갈 비난이 아니다. 도둑놈 심보라면, 인류의 기본적인 문화 행위를 억압하면서 무한대의 독점 이윤을 얻겠다는 자본의 저작권 이상 가는 것이 있을까.

2002-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