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네트워커

미리가 보는 ‘2084년’

By 2003/10/05 10월 29th, 2016 No Comments

표지이야기

윤현식

윈스턴 스미스 3세는 업무상 조지 오웰의 "1984년"을 읽은 후, 당국이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있는것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정보국 학술처에 근무하고 있는 윈스턴 스미스 3세는 이 책을 단순한 사회과학서적 정도로 판단했다. 사상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있는 현 정부는 오직 개인의 인성을 말살하고 국가의 체제에 심각한 위협을 줄 수 있는 책만을 금서로 지정하고 있었다. 윈스턴 스미스 3세는 정부의 그러한 조처가 일정정도 타당하다고 여기고 있었고, 그 기준으로 보았을 때 "1984년"이라는 책은 단지 통제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부각한 소설로서 현 상황에는 전혀 적용되는 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인공의 이름이 자신과 같은 "윈스턴 스미스"라는 것 이외에 이 소설이 윈스턴 스미스 3세의 흥미를 끌만한 매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금서기준에 대한 심사업무를 맡고 있던 윈스턴 스미스 3세는 이 소설이 금서목록에서 빠져도 될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소견서를 작성한 후 인터넷을 통해 결재파일을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퇴근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ID No. 27893215 윈스턴 스미스, 오후 5시 58분에 퇴근"이라는 명랑한 음성의 메시지가 흐르면서 사무실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컴퓨터의 전원이 자동적으로 꺼지고 사무실의 조명이 자동으로 소등되었다. 윈스턴 스미스 3세는 자신이 화장실을 가려는지 퇴근을 하려는지 까지 명확하게 확인하는 자동인식시스템에 무한한 경의를 표하면서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모든 국민은 출생과 동시에 후두부 근처에 영구적으로 "스마트 RFID 태그"가 이식된다. 가로 세로 5mm, 두께 0.2mm의 초박막 칩인 이 태그는 출생에서부터 사망할 때까지의 모든 기록을 자체 주파수를 통해 국가정보처 중앙 데이터베이스에 저장시킬 수 있다. 중앙 데이터베이스는 초단위 까지도 행동상황을 분류하여 기록할 수 있고,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돌발상황에 대하여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비상신호기를 통해 본인에게 통보할 수 있다. 집 안에서, 사무실 안에서, 상점에서, 자동차 안에서, 거리에서, 언제 어느 곳에서든 전 국민은 이 시스템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고 복지를 향유할 것이다.

다음 날, 건물 입구에서 홍체인식장치와 지문감식장치를 통과하면서 태그의 바이러스 감염여부를 확인한 후 사무실로 들어온 윈스턴 스미스 3세는, 책상 앞에 다가가자마자 저절로 켜지는 컴퓨터와 모니터를 보면서 뭔가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모니터는 몇 번의 로딩을 거친 후, 매우 건조한 문체로 구성되어 있는 공문서 한 장을 띄워 주었다. "윈스턴 스미스 3세, 평균인이 8시간이면 볼 수 있는 ‘1984년’을 17시간 34분 56초에 거쳐 읽음. 최근 3개월 동안 정시보다 2분 이상 일찍 퇴근한 일자가 25일에 달함. 최근 하위직 공무원들과 사적 자리에서 만나는 횟수가 평균치의 배 이상에 달함. 알콜 섭취 횟수와 양이 상대적으로 증가. 금서 해금 소견서를 부실하게 작성. 당국이 금서로 지정한 이유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음. 따라서 본 정보국은 윈스턴 스미스에게 3일간 교양국에서의 재교육을 명령함. 명령 수행은 익일 오전 7시부터 실시. 출생기록과 지역주민등록정보, 학습능력정보와 개인신상정보, 건강정보, 복지수급현황, 근태기록일체, 금융거래내역, 카드결재내역과 소비성향분석표 등 일체의 신상파일은 중앙데이터베이스에서 교양국으로 일괄 전송."

윈스턴 스미스 3세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해 재교육이라는 선처를 내려 준 당국에 감사했다. 적어도 이 사회에 ‘애정성’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사랑해야할 빅 브라더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윈스턴 스미스 3세가 아직까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의 몸에 이식된 작은 칩은 원래부터 그의 기억이었고 원래부터 그의 뇌였음을. 교양국의 재교육은 그 칩의 매트릭스 오류를 재구성하는 작업이었음을 그는 지금도 모르고 있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일주일 후 윈스턴 스미스는 조지 오웰과 ‘1984년’은 물론, 자신의 이름과 똑같았던 윈스턴 스미스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게 될 것이다.

2003-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