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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누가 음란을 두려워하랴―성 복지와 숭고의 미학을 위해 (문화과학)

By 2002/05/15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진보네트워크센터

문화과학 2001년 겨울호

누가 음란을 두려워하랴―성 복지와 숭고의 미학을 위해
{문화과학} 편집위원회

이 글은 {문화과학} 편집위원회가 28호 특집 주제로 잡은 ‘영화’와 관련하여 최근 자주 사회적 논란을 빚고 있는 ‘표현의 자유’ 문제를 점검할 필요를 느껴서 가진 네 번의 토론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은 네 번의 {문화과학} 편집회의에서 교환된 의견과 토론을 정리한 것이다. 논의 과정에는 윤건차, 강내희, 심광현, 손자희, 이득재, 고길섶, 이동연 등의 편집위원들과 영상원 교환교수로 와있는 앙뚜완느 코폴라와 그의 부인 이문재, 이번 호 필자로 참여하는 노명우 등이 각기 1회 이상 참석했고, 여국현, 김상우가 참석자들의 발언을 채록한 것을 강내희가 최종 정리하였다.
}} 원래는 제목을 "한국 영화(산업)와 표현의 자유" 정도로 하여 여기서 정리한 것 것보다는 좀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자 했으나 논의 과정에서 음란물 문제 쪽으로 초점이 모아졌다. 표현의 자유 문제를 음란물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최근 한국영화에서 성 표현의 문제가 자주 쟁점으로 부각된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 성욕, 성애와 이것들의 표출, 표현 문제야말로 오늘날 ‘사회 진보’를 사고함에 있어서 핵심적인 쟁점이라는 사실을 논의 과정에서 확인한 때문이기도 하다.

사상의 통제에서 표현의 통제로?

{문화과학}은 최근 인구통제와 관련하여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판단한다. 그 동안 한국에서 주로 통제를 받아온 것은 아무래도 사상의 자유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난 뒤로도 우리 사회가 동서냉전과 좌우대립의 세계질서 속에서 남북분단의 불운을 겪게 된 탓이다. 하지만 사회변혁운동이 거세게 몰아치던 1980년대와 비교하면 이데올로기 문제가 사회적 쟁점이 되거나 진보 혹은 좌경 사상으로 체포, 입건, 구금되는 경우는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보다는 그 동안 사람들을 옥죄어온 국가보안법이 진보세력의 줄기찬 철폐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온존되고 있고, 아직도 가끔 조직 사건이 불거지는 것을 보면 사상의 통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끔 일어나는 조직 사건도 주로 북한과 관계되는 사건으로 축소되고 있고, 맑스주의 등에 대한 논의는 거의 완전히 자유가 허용되고 있는 것 등을 미루어보면 사상 통제는 과거에 비해 비중이 작아진 반면 표현 문제는 갈수록 더 큰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서 최근에 일어난 변화로 주목할 것 가운데 하나는 1997년 7월(?) 청소년보호법이 새로 제정되어 통과되었다는 사실이다. 청보법은 과거의 국가 검열기구로 악명이 높던 간행물윤리위원회(간윤)가 위헌 판결을 받아 해체될 수밖에 없게 되자, 이로 인해 생겨난 통제상의 공백을 새롭게 메울 청소년보호위원회를 설치할 근거를 제공한 법이다. 우리는 이런 법의 제정에는 중요한 정세상의 변화가 작용한 것으로 본다. 간윤 대신 청소년보호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변화 내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간윤과 청보위는 둘 다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기 위한 조직이지만, 통제의 초점에서 차이가 난다. 박정히 시대의 공보처에 의해 만들어진 간윤이 "불온사상"의 표현을 탄압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었다면, 청소년보호위는 그런 사상의 문제보다는 표현상의 문제, 특히 음란폭력의 표현에 통제의 관심을 집중한다. 청보법 제정이 중요한 변화를 시사한다는 것은 이 때를 전후하여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사건들, 특히 음란물의 제작과 배포를 문제삼아 갖가지 시비를 걸어오는 사례가 늘어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음란성" 때문에 표현물이 논란을 빚은 것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을 열거해보면, 소설가 마광수가 {가자 장미 여관으로}를 집필한 이유로, 장정일이 {내게 거짓말을 해봐} 때문에 재판을 받고 실형을 살았고, {천국의 신화}로 만화가 이현세가 기소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고, <빨간 마후라>라는 청소년 제작 비디오 작품, 영화 <노랑머리>가 나와 물의를 빚기도 했고, 이런 표현물이 나오는 것은 {천국의 신화} 따위를 스포츠신문들이 게재한 탓이라는 언론의 비난이 일자 이를 빌미로 음란폭력물공동대책위원회라는 보수적 시민단체가 결성되기도 했고, 2000년 초 장선우의 영화 <거짓말>이 출시되자 이 단체가 들고일어나 검찰에 고발하는 사건이 생긴 적이 있고, 최근에는 교사화가 김인규가 부인과 함께 찍은 나체사진작품으로 고발을 당해 재판을 받고 있다. 시민사회나 경찰, 사법당국이 표현물을 가지고 시비를 건 것은 이처럼 주로 음란성 문제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1997년―분수령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들 사건이 대개 청보법이 통과된 1997년을 전후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왜 하필 1997년인가? 이 해 초 사상 초유의 노동자 총파업이 있었으며, 말에는 외환위기가 닥쳐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하는 "국난"이 일어난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1997년은 김영삼 정권이 안기부법과 함께 노동관계법을 개악시켜 통과시킨 데 분노한 노동자들이 일으킨 사상초유의 총파업으로 시작되었다. 1996년 OECD에 개입한 것을 치적으로 삼고, "단군이래 최대 호황"을 자랑하던 김영삼 정권의 위세는 총파업으로 여지없이 무너졌으며, WTO 출범과 OECD 가입으로 시장개방 압박을 받아 어려워진 경쟁조건을 개선한다며 정리해고 등 노동유연화 정책을 도입하려던 자본과 국가는 노동자의 총공세 앞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세에 처한 총자본과 국가에게 외환위기와 "IMF 사태"는 어쩌면 반가운 손님이었는지도 모른다. 노동자들을 위협하여 노동유연화 정책을 다시 밀어붙일 "국가 도산의 위기"라는 국면 전환용 카드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왜 이 시점에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사건들, 특히 성적 표현을 둘러싼 사건이 문제가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무렵에 문화생산물의 성적 표현의 음란성을 문제삼는 일이 자주 생기고, 과거에 비해 이런 문제제기가 사법 처리로 이어지는 경향도 높아졌다. 성 표현 문제 때문에 실제 사법 처벌을 받은 경우가 꼭 많았던 것은 아니다. 쟁점으로 떠오른 사안들 가운데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는 마광수, 장정일 등 소수에 불과했고, <노랑머리>, <거짓말> 등의 경우 무난하게 극장 상영을 마칠 수가 있었으며, {천국의 신화}도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고, 독립영화제작자가 만든 <하나 둘 섹스>의 경우에는 상영보류 결정이 검열이라며 정식소송을 제기한 결과 위헌 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사법기관의 최종 판결과는 별도로 표현 문제가 사회적 입장의 대립을 드러내는 전선이 되는 경우가 부쩍 늘어났으며, 이에 따라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이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진보진영 내부에서 사회변혁의 노선을 둘러싸고 첨예한 사상논쟁이 벌어지고, 다른 한편 진보세력과 이들의 사상을 불온시한 국가권력 및 보수세력 사이에 일어난 저항과 탄압이 전선을 형성하던 1980년대 말 혹은 1990년대 초까지의 상황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어떤 정세가 형성되었기에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음란물을 중심으로 한 표현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떠오른 것일까?
다시 1997년을 전후한 시점을 살필 필요가 있다. 이 시점과 그 이전의 차이는 1980년대 말 이후에 만들어진 사회변동에 대한 평가 또는 의식 수준에서의 차이가 아닐까? 알다시피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 이르러 "혁명의 80년대"는 크게 후퇴를 겪게 된다. 현실 사회주의의 약화 및 붕괴, 1987년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의 도입과 함께 일어난 운동권의 이탈현상 속에서 진보세력은 전망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1986-88년의 "3저 호황"이 끝나고, 1988년 올림픽대회를 치른 뒤 한국 자본주의는 과잉생산 문제를 겪으면서 소비자본주의를 급속도로 강화했다. 1987년의 6월 항쟁으로 분출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지배블록이 관리하기 위해 대중매체, 대중문화 및 문화산업을 확대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이다. 1990년대 초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신세대 담론, 문화담론 등이 확산한 데에는 이런 급작스런 사회적, 문화적 변동 속에 생겨난 일종의 인식론적 혼란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80년대의 변혁운동 세대가 지니고 있던 "혁명적 금욕주의" 대신 "욕망의 표현"이라는 신세대의 새로운 태도가 나타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중대한 변화는 당시 형성되고 있던 소비문화에 신세대가 소비자로 편입되는 과정이기도 했고, 이 점은 90년대 세대가 지닌 탈정치 성향이 증명한다. 따라서 1990년대 초반은 1980년대에 분출한 이데올로기적, 사상적 도전이 일정하게 후퇴하는 가운데, "욕망"이 새로운 사회적 요구로서 등장했지만 이 욕망이 잠시 소비자본주의 시장에 견인되어 제어되고 있던 시점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1997년의 급박한 상황은 시장에 의한 욕망 관리가 순탄치 않음을 상기시켰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변혁운동의 퇴조, 소비자본주의의 강화, 신세대의 등장, 대중매체-대중문화-문화산업의 확산이라는 새로운 지형 속에서, 한편으로 이데올로기 문제가 과거의 중요성을 어느 정도 상실하고, 다른 한편 욕망이 새로운 사회적 요구로 등장하였지만 이 욕망의 분출을 더 이상 시장이 통제하기 어려운 시점이 된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표현의 자유 문제가 자꾸 불거지고 있는 것은 이미 커져버린 욕망에 대한 요구가 시장의 충족 범위를 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 때문이 아닐까? 욕망을 분출하고 표현하려는 요구와 그에 대한 통제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빈번해진 때문이 아닐까? 1997년이 이 맥락에서 분수령이 된 것은 노동자 총파업과 IMF 사태로 세력들간의 입장 차이가 더 선명하게 부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세와 욕망전선

사회적 대립과 갈등, 적대가 부각된 것은 이 시점에 신자유주의의 정체가 좀더 분명해진 것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사회운동단체, 지식인사회 등이 1980년대 말 이후 발생한 여러 사회적 문제들을 "신자유주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였던 것 같다. 김영삼 정권 시기 우루과이라운드가 체결되고 WTO가 출범하고, 한국이 1996년 OECD에 가입하면서 세계화, 개방화, 정보화, 지방화 등의 구호가 남발될 때 이 일련의 흐름을 신자유주의로 파악하여 대처하려는 노력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신자유주의가 문제라는 인식은 1996년 말의 노동관계법 통과에 대해 노동계가 총파업으로 맞서면서 국제연대가 활발해지는 과정에서 좀더 명확해진 것 같으며, 신자유주의 관련한 진보진영의 공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1997년에 와서이다.{{) 이 공부는 당시 ‘민주와진보를위한 지식인연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지금의 사회진보연대가 주최한 강좌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준비된 강의록은 {자본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문화과학사, 1998)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국내 문화운동 단체, 사회운동 단체들이 모여 신자유주의 정세 속에서 표현의 자유 문제를 점검한 것도 이때였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와진보를위한지식인연대 등이 1997년 9월 10일 기독교회관에서 ‘우리사회 표현의 자유는 있는가’라는 주제로 문화예술 검열 철폐를 위한 토론회를 가진 바 있다. 강내희, [표현의 자유 탄압과 신자유주의](자료집 6-20)({신자유주의와 문화} 문화과학사, 2000에 재수록)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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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국면에서는 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보다 표현이나 욕망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가? 1980년대 말 이후 한국사회는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덜 위험하지만 욕망 통제의 관점에서 보면 더 위험한 주체형태가 대거 등장한 셈이다. 이 시기에 성년이 되기 시작한 신세대는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나 소비자본주의가 강화되는 시점에 10대 말을 보낸 탓에 "혁명의 80년대"에 참여한 "386세대"에 비하면 절제와 금욕보다는 쾌락과 욕망을 훨씬 더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386세대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면서 사회변혁을 위한 헌신에 골몰했다면 이 신세대는 그래서 이데올로기보다는 자신의 욕망 실현에 더 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욕망은 이데올로기, 사상에 비해 표층 표현의 문제와 더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멋대로 하자"는 신세대가 랩, 레게, 힙합 등을 하며 박자, 리듬, 의상, 스타일 등에 관심을 가진 것도 그들의 욕망이 표현 층위에서 물질성을 드러내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80년대 운동권 문화가 나름의 표현방식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 표현은 내용의 종속물에 가까웠던 반면, 90년대 신세대 문화는 스타일의 기호적 측면을 특히 강조하는 등 표층 표현의 전략을 구사한다. 물론 여기에는 소비자본주의의 강화 속에서 청소년을 소비자로 겨냥한 문화시장의 유혹이 작용했지만, 새로운 세대가 특히 자신의 욕망 표현을 중시한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국면에서는 이런 욕망이 제대로 충족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민중과 대중을 더욱더 착취하려는 전략이다. 이윤의 증대와 착취의 효율화에 도움이 되는 선에서는 신세대, 나아가 대중 일반의 욕망을 부풀리겠지만 이 욕망의 감당하기 어려워질 때는 그에 대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신자유주의의 문화적 모순이 발생한다. 신자유주의는 자본 축적을 위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활용한다. 교육, 환경, 교도, 의료 등의 분야에 시장논리를 도입하는 것이나, 문화산업을 확대하고, 소비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문제는 이때 대중의 욕망이 더욱 확대되고 욕망 충족에 대한 요구도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갈수록 착취의 강도를 높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을 빈곤과 궁핍의 나락으로 몰아넣으면서 문화시장 안에서 욕망의 소비자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문화과학}은 음란물을 둘러싼 표현의 자유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라고 본다. 신자유주의 세력은 이데올로기 전선에서는 이미 승리를 확인하고 욕망 전선에서 공세를 취한다. 이데올로기 전선에서의 "승리"는 신자유주의가 세계적으로 등장한 1980년대에 자본주의와 대립해오던 현실 사회주의가 이미 위기에 빠져 더 이상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데올로기 전선에서 대립 구도를 격화시킬 필요가 없게 되자, 이제 가상의 적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양산된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린 사람들과 그들이 야기할 것 같은 문제들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는 신보수주의와 연대를 하게 된다.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경제적 공세로 일어난 대량 실업과 삶의 질 저하, 그리고 그에 따른 비인간적 삶의 영위라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도덕적 책임의 문제로 호도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소중함, 신앙심, 개인적 책무, 의지 등의 "미국적 가치"를 강조하며, 사회적 희생과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게이나 레즈비언 등의 성 정체성은 도덕적 타락으로 몰아붙이는 신보수주의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 한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음란물을 중심으로 한 표현의 자유가 사회적 쟁점이 된 가운데,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가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려는 세력을 압박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누가 음란물을 반대하는가?

오늘 한국에서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어떤 세력 구도가 형성되어 있는 것일까? 크게 보면 진보와 보수가 대결하겠지만 진보세력이든 보수세력이든 그 안에 다양한 견해의 스펙트럼이 있는 것 같다. {문화과학}은 지형의 복잡성을 인정하고 예의 주시해야만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진보의 연대’를 구축할 수 있는 지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여기서 "지형의 복잡성"은 진보든 보수든 단일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우선 진보진영을 생각해보자. 노동, 생태환경, 문화, 여성 부문의 다양한 운동세력은 서로 혹은 내부에서 다양한 입장의 분할선에 따라 표현의 자유, 특히 음란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 보인다. 2000년 초 장선우의 <거짓말>을 음대협이 음란물이라며 고발하여 검찰 조사가 진행되었을 때 여러 단체들이 보여준 반응들을 보면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당시 사회진보연대나 현 사회당의 전신 청년진보당(?) 등 민중운동 좌파 세력은 즉각 검찰 조사를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국가권력의 탄압으로 보고 반대한 반면, 여성단체나 학부모단체 등은 음대협과 입장을 같이 하는 편이 많았다. 문화운동 영역에서도 문화개혁을위한시민연대(문화연대)나 영화인회의 등이 "표현의 자유 수호"를 주장하며 음대협의 고발 행위와 국가의 개입을 비판했지만, 1980년대 진보적 문화운동을 주도해온 민족예술인총연합이나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으며, 그 중에는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비판하는 신문 기고를 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이런 다양한 반응을 통해 우리는 진보라는 것이 결코 일괴암으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고, 표현의 자유, 특히 음란폭력물, 그 중에서도 음란물에 대한 반응에서는 과거 식의 진보라는 관점으로는 포괄되지 않는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대립되는 입장들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런 차이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해야 한다는 일반원칙에는 동의하면서도 음란물에 대해서는 별도의 입장을 갖기 때문에 생길 것이다.
{문화과학}의 입장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면 당연히 음란물의 제작과 유포도 기본적 권리로 인정해야 하고 법적으로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을 펼치기 이전에 음란물을 반대하는 이유를 좀더 상세하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음란 표현을 반대해온 개인이나 단체는 이호철과 같이 과거에 넓은 의미의 진보적 예술인으로 통하던 사람, 강지원 검사나 김성희 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장과 같은 국가권력에 소속된 사람들, 손봉호 권장희 류의 보수적 도덕주의자, 양애경 최경애 등 여성단체 인사들, 그리고 참교육학부모회와 같은 학부모 단체 등이 있다. 이제 이들의 입장과 그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손봉호나 권장희와 같은 보수적 도덕주의자의 경우는 음란물을 체질적으로 혐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관련 좀더 자세히 명확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음) 이들은 기본적으로 타자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성적 취향에 대해 자신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간섭하려 든다. 음란물을 도덕적으로 매도하는 이런 사람들과의 연대의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이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도덕주의가 사실은 파시즘의 경향까지도 포함한 사회적 억압을 조장하는 태도이며, 사실은 인류의 평화와 진보에 어긋나는 입장임을 공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둘째, 강지원이나 김성희 등으로 대변되는 검찰이나 청소년보호위원회, 나아가서 최근에 앞으로 표현의 자유를 크게 위축시킬 인터넷내용등급제를 도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정보통신위원회의 경우가 있다. 이들의 경우는 국가기구를 활용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입장은 손봉호나 권장희 등과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 좀더 분명히 할 것) 이것은 이들이 도덕적 판단을 통해서 음란물을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사회적 필요성을 내세우며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입장은 대체로 음란물이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사실이므로 사회적으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이 실질적으로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국면에 따라서 입장을 바꿀 수가 있으며, 사회적 권력관계의 정세 변화에 따라 다른 성향을 지닌 개인들로 교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들을 비판하는 것 못지 않게 이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여기에는 음란물과 관련된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여론을 조직하고 유리한 담론정세를 만들어내는 노력이 포함될 것이다.
셋째, 양애경, 최경애(이름 정확?) 등으로 대변되는 여성 단체의 경우, 어떤 주장을 한다(정확하게 말할 것). 이들이 주로 지적하는 것은 음란물이 야기하는 사회적 문제의 심각성이다. 이들은 음란물이 사회에 버젓이 유통될 경우 여성들이 성적 폭력에 노출되며, 그로 인해 실질적인 피해를 입는다는 이유로 음란 표현물 제작과 유통을 반대하고 있다. 우리는 여성 개인과 단체가 포르노그라피와 같은 음란물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유를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재 포르노그라피는 분명히 남성적 성애를 중심으로 한 성행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가부장적 질서가 지배하는 구도에서 이로 인해 포르노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성폭행, 성추행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문화과학}은 이 결과 여성의 인권이 짓밟히는 데 대해 당연하 반대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남성중심의 성문화 비판이 성에 대한 거부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왜곡된 남성의 성 지배를 반대하기 위해 남성의, 그리로 물론 여성 자신의 성애를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여성 비하적’ 표현의 문제 때문에 성적으로 명백한 표현물을 무조건 억압하는 보수주의적 세력과 연대하는 일은 장기적으로 여성주의적 표현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일"이라고 하는 입장에 동의한다. 포르노 혹은 음란물은 남성과 여성이 모두 가진 성욕과 성애를 표현하는 매체이며, 음란은 인간 존재의 외침을 드러내는 중요한 방식이다. "성적으로 노골적이지만 대안적인 여성주의적 시각과 의제를 다룬 표현물, 이성애, 동성애 여성, 성적 소수자의 쾌락을 위한 그러나 성차별적이지 않은 포르노, 그리고 좀더 ‘기이’하고 ‘변태적’인 성적 행위까지를 능동적으로 행하는 여성 주체적 표현물까지 꿈꾸고 상상하고 만들어내야 한다."{{) 권은선, [표현의 자유와 여성주의적 시각], {문화연대} 2001년 11월 1일.
}} 여성적 음란의 자유가 남성적 음란의 자유만큼이나 인정받아야 하고 보호받아야 한다면 <거짓말> 사태와 관련하여 여성단체들이 음란물을 거부한 태도는 여성 자신의 욕망마저 외면한 것으로 보인다.
넷째, 학부모단체들의 입장을 살펴보자. 최근 표현의 자유 옹호를 주요 목적의 하나로 결성되어 활동을 벌여온 청소년보호법폐지공동대책위에 참여해오던 ***학부모연대가 이 공대위가 <박진영 앨범>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탈퇴한 일이 있었다. <박진영 앨범>이 노골적인 성 표현을 담고 있어서 학부모연대로서는 청소년에 위해한 성 표현을 지지하는 공대위와 입장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다. 학부모연대의 이런 선택은 음란물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많은 오해를 극복하고 난관을 거쳐가야 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단체는 참교육학부모회와는 달리 "청소년의 보호" 이전에 그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단체인데도 결국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학부모"의 관점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이 단체가 공대위에서 탈퇴한 것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화 관점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이 단체가 결국 음란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 성 의식 일반에 비춰볼 때 음란물 표현 지지의 태도는 너무 급진적으로 보이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여성들의 포르노 혐오감 혹은 공포감과 마찬가지로 음란물이 청소년에게 미칠 영향력에 대한 학부모의 공포감도 근거 없는 반응이라 치부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반응을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학부모들이 우려하는 것은 "내 아이"의 포르노 접촉이 가져올 영향과 결과에 대한 우려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우려를 표현의 자유 확대의 요구로 전환시킬 수는 없을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는 아래에서 따로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마지막으로, 예술적 가치 때문에 음란물을 비판하고 음란물 표현의 자유에 적극 나서지 않거나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영화 <거짓말>에 대해 예술적 가치가 없는 음란물이라며 신문기고를 통해 비판을 가한 소설가 이호철이 그 대표적 경우이며, 민예총이나 작가회의에 속한 상당수 작가들이 비슷한 생각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입장에는 음란물과 예술작품은 같지 않다라는 판단이 들어가 있으며, 혹시 음란성을 띤 것이라도 예술적 승화가 이루어졌다면 예술로 인정되기 때문에 그럴 경우는 예술로서 보호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음란물일 뿐이므로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우리도 예술적 가치를 중시하며 작품을 수준 높은 것으로 만드는 것은 중요한 예술적 의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술적 가치가 없는 음란물은 만들면 안 되는 것인가? 음란물의 제작과 유통은 표현의 자유와는 관계가 없는 것인가?
지금까지 음란 표현과 관련하여 다섯 가지 정도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쟁점을 추출해보고자 한다. 첫째, 음란물을 만드는 것은 오늘의 진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과거 진보를 표방하던 예술인 혹은 예술단체가 음란물에 대해 드러내는 혐오의 태도가 지닌 정치적 의미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 아이들의 음란물 접촉에 대한 학부모들의 우려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점이 있다. 이 쟁점은 성의 자유에 관련된 것이며 진정한 의미의 사회복지와 관련해서 생각해야만 풀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셋째, 음란물에 대한 공포 또는 혐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보수주의는 음란물을, 혹은 성적으로 명백한 표현을 혐오하거나 공포로 여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제 이런 문제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신자유주의와 문화 보수주의의 협력

<거짓말> 사태와 관련하여 이호철과 같은 문인 개인, 민예총이나 작가회의 같은 예술단체가 보여준 음란물에 대한 거부 반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들은 <거짓말>은 예술성이 없는 음란물이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변호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셈이지만, 우리는 음란물도 표현물인 이상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호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음란물이 넘쳐나도 좋단 말이냐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문제제기일 뿐이다. 음란물의 제작과 유통을 법적으로 허용하는 것과 그것의 사회적 관리는 별도의 문제이고, 표현의 자유에 의해 음란물을 허용하더라도 관리는 사회적으로 다시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 우리의 이런 입장은 <거짓말>을 음란물이라며 예술적 창작의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은 물론이고, 이 영화를 음란물로 몰아붙이는 보수적 시민단체들의 비난을 피해 어쨌거나 극장상영을 성사시켜 이윤을 내고자 베를린 영화제에서의 본선진출을 이유로 문제의 영화가 높은 예술성을 가진 작품이라고 변명한 영화제작사의 입장과도 다르다. 우리는 <거짓말>이 설령 음란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허구적 표현물인 한 제작과 유통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보며, 음란물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현행법이 오히려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작품이 예술작품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음란물의 제작과 유통은 불법인가 아닌가라는 것이며, 음란물의 제작을 허용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적 권리에 합당한 것인가 아닌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표현물의 예술성을 중시하면서 음란성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 어떤 정세적 효과를 가져오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이호철이나, 비슷한 입장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민예총과 작가회의의 경우 넓은 의미의 진보 세력에 속한다. {문화과학}은 오늘 시점에 진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더 깊이 알기 위해서는 "음란성"을 둘러싼 입장을 따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 단계에서 진보세력이 싸워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은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이다. 이 신자유주의와 관련해서 음란 표현물을 비난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신자유주의는 신보수주의와 협력 관계에 있다. 양자가 협력 ‘관계’에 있다는 것은 둘이 똑 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선호하는 주체의 형태와 신보수주의가 선호하는 주체의 형태도 다르다. 미국에서 신자유주의 정세가 형성되던 시기인 1980년대에 등장한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은 당시 급증하던 기업합병에 참여하면서 고임금을 받던 경영학석사출신을 포함한 "여피"(yuppies)들이었다. 이들은 도시에서 소비생활을 즐기며 새로운 문화소비자로 부상하는 등 미국의 "전통"과 "가족적 가치", 신앙심 등을 귀하게 여기던 신보수주의자들과는 개인의 성향이 많이 달랐다.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새로운 주체(형태)들이 만들어졌다. 구조조정, 정리해고의 희생자보다는 오히려 그 과정을 기획하고 더 적은 노동자로 수익을 올리는 기업 모델을 개발하는 고급인력, 평생고용의 안정적 직업이 갈수록 귀한 시대에 빈번한 직업 전환에 적응할 수 있는 다기능 혹은 이전가능 기능 소유자 등이 그런 주체들이며, 여기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인 김대중정권이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이라며 선전한 "신지식인"도 포함된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신자유주의 정세는 생산성과 경쟁력을 가진 이런 유형들보다는 실패자, 희생자를 더 많이 양산해내는 법이다. 구조조정을 당해 일자리에서 쫓겨난 사람들과 그 가족, 지금까지 문화시장에서 욕망의 소비자로서 역할을 해왔지만 주머니 사정이 나빠진 청소년, 주부는 이제 갈수록 "생산적 소비"에 참여할 수가 없다. 미국에서처럼 이들은 사회 주변으로, 마약, 매춘, 범죄 등으로 내몰리기 쉽다.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가 협력을 한다는 것은 이들 신자유주의의 희생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신보수주의가 도덕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신자유주의의 허물을 덮고 책임을 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보수주의가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개인 도덕의 문제로 환원한다면 문화적 보수주의는 예술적 가치를 내세우며 음란성, 퇴폐성, 폭력성을 담은 문화적 표현물을 비난한다. 하지만 음란성, 퇴폐성, 폭력성을 묘사하지 않고 어떻게 신자유주의를 공격할 수 있을까? 지금은 신자유주의의 정치공세와 경제정책으로 엄청난 사회적 불평등이 생겨나고 있고, 당연히 사회적 불만도 높아지고 있는 국면이다. 음란과 폭력의 표현을 비난하는 것은 이런 불만을 잠재우려는 노력, "성공시대"를 구가하는 "신지식인"의 변명이 아닐까? 마약, 폭력은 물론이고 이성애적 성애와는 다른 성애 표현을 죄악시하고, 자유로운 성적 표현을 방종으로 모는 것은 계속 주변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통제하려는 것이 아닌가? {문화과학}은 굳이 비난받을 음란성이 있다면 이런 통제야말로 음란성 자체라고 본다. 오늘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음란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반대해야 한다.

성 복지를 위하여

앞에서 아이들의 음란물 접촉에 대한 학부모들의 우려와 관련하여 이 우려를 표현의 자유 확대의 요구로 전환시킬 수는 없을까 하는 질문을 제기했었다. 우리는 이 질문과 관련하여 학부모 가운데 아이들의 공부는 우리가 관리하겠으니 성 표현 부분만큼은 국가가 대신 책임져달라는 사람이 제법 많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공교육이 철저하게 무너져버린 한국사회에서 학부모는 지금 국가 대신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다. 개별 학부모가 교육내용에 대한 전문성을 갖출 수는 없겠기 때문에 자녀들의 교육내용을 일일이 챙기는 것은 못한다고 하더라도 교육비만큼은 학부모가 거의 다 부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자녀들의 성욕에 관한 한 한국의 학부모는 완전히 무장 해제된 상태이며, 이 결과 거의 공포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녀들의 성 문제는 국가가 맡아서 책임져주기를 바라는 것은 학부모들의 성에 대한 무지, 특히 성교육에 대한 두려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청소년의 성과 관련하여 "국가 개입을 요청"하는 이유를 좀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이 성 표현의 자유에 무방비로 노출되면 안되겠는데, 자신들은 대처방안이 없으니 국가가 제도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일면 학부모의 책임회피로도 보이지만 사실 상당히 진보적인 문제제기로 읽히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여기서 질문은 청소년이나 청년들에 대한 사회적 관리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는 것이다. 혹시 학부모들은 자신도 모르게 아이들의 복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아닐까? 청소년의 교육도 국가의 책임이라는 사실―사회복지가 터를 잡은 나라에서라면 너무나 당연한―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의 학부모들인데, "내 아이"의 성 문제를 국가가 책임지면 좋겠다는 발상은 사실 뜻밖이다. 하지만 성 문제는 그만큼 학부모 개인의 차원에서 해결할 방도가 없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일단 여기서 학부모의 문제제기가 명확하게 설정되거나 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짚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학부모들이 국가더러 청소년 성 문제의 책임을 져달라는 것은 청소년의 성적 활동이 왕성해지는 데 대해 부담과 두려움을 가진 때문이 아닐까? 어른들이 흔히 하는 말은 그래서 옛날에는 그래도 성행위의 사회적 규범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학부모의 공포에는 또 최근 들어와서 확산된 인터넷과 같은 신종 매체에 대한 자신의 정보 및 이해 부족에서도 나올 것이다. 이런 사실은 청소년 음란물 접촉에 대한 학부모의 거부는 오히려 학부모 자신의 문제, 즉 성인으로서 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바로 무지와 편견으로 차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신도 모르는 것을 "내 아이"가 접촉하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 학부모로 하여금 손사래를 치며 국가가 성 문제를 책임지라고 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 문제제기에는 학부모로서는 확실한 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사회적 조건에 대한 지식이다. 그것은 조숙한 성 활동은 아직도 혼전 순결이 강조되는 이데올로기적 조건에서 자녀의 인생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실질적인 학부모의 자녀 성 활동 억제 이유는 한국에서는 성 활동을 지원하거나 관리하는 사회적 제도의 미비가 전혀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성 활동은 자녀의 삶에 바로 손해를 끼치기 때문일 것이다. 단적으로 한국에는 미혼모가 아이를 길러 키울 수 있는 지원 대책이 전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학부의 문제제기가 지닌 의미는 사실 우리 사회에 성 복지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아닐까? 성욕은 우리가 인간 존재로서 가지고 있는 기본적 역능이며, 어떤 경우에도 부정할 수 없는 인간 에너지의 원천이다. 성욕은 어린아이에게도 있다지만 대개 사춘기인 10대 초중반에 분출할 정도로 활발해진다. 성욕을 무조건 방출할 경우 개인의 삶을 통제할 수 없는 어려움도 있으므로 성욕을 무조건 표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겠으나 지금 한국처럼 10대 말은 물론이고 2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성욕을 부모의 관리하에 두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일로 이해해야 한다. 쥴리엣이 로미오와 사랑에 빠졌을 때는 겨우 14세이고, 춘향이와 이도령이 사랑놀음을 벌인 것도 "이팔청춘" 16세로 나온다. 이런 조숙한 성 활동을 문학작품에만 나오는 현상으로 볼 것은 아니다. 지금 자녀들의 성 활동을 공포에 차서 보는 부모들의 부모들 시대에도 10대에 결혼을 시키는 조혼 관행이 있었고, "업어서 신랑을 키웠다"는 옛말에서 보듯 이성애의 능력이 생기기도 전에 결혼을 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금처럼 20대 후반에 가서야 겨우 결혼 등을 통해 안정적인 성 파트너를 찾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형성과 함께 노동력에 관한 통제를 하게 되면서, 대중교육이 점차 대학교육에까지 확산되면서 생겨난 역사적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미국, 스웨덴, 노르웨이, 일본 등의 경우 국민국가 차원의 노동력 확보를 위해 한편으로는 학비 지원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이가 10대말이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주택은 아니더라도 주거 자금은 지원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지원은 한편으로 보면 사회복지의 일환이지만 이 사회복지에는 젊은 세대의 성 복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지금 한국에는 노래방 수보다 더 많은 2만5천여(?) 채의 러브호텔이 영업중이다. 러브호텔이 이렇게 많은 것은 성욕의 관점에서 보면 어디서건 인간이 지닌 기본 성욕은 어떤 형태로든 분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성 표현은 어떤 방식으로든 일어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국에서 젊은 남녀가 연애를 할 때 영화관이든 러브호텔이든 밖으로 나도는 것은 한국적 핵가족 제도에서 젊은이들이 정식 결혼으로 분가하기까지는 부모 슬하에서, 정확히 말해 부모 소유의 주택에서 거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표현의 자유, 특히 성 표현의 자유에 대해 학부모나 다른 사람들이 갖는 두려움은 성적 복지를 포함한 사회 복지가 한국에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만혼이 정상인 상황에서 성적 에너지를 표출할 수 있는 정상적 통로가 없을 경우 성 표현은 비정상적인 통로를 갖게 된다. 한국에는 러브호텔 이외에 엄청난 규모의 유흥업과 매춘업이 성업중이다. 학부모가 두려운 것은 성 표현의 자유 추구가 바로 유흥가와 매춘소굴로 이어진다고 보기 때문인지도 모르며, 이런 두려움이 유감스럽게도 사실인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며, 특히 성 복지로서의 사회복지가 보장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생겼다고 해야 한다. 학부모가 자녀의 성 관리 문제를 국가가 책임을 지면 좋겠다는 것은 사회가 복지를 제대로 하라는 요구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음란물공포증, 무엇이 문제인가?

다른 한편 우리는 포르노 등 음란물에 대한 혐오가 지닌 문제점도 지적하고자 한다. 표현의 자유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지닌 학부모단체나 여성단체는 음란물의 단속은 성폭행 등의 문제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예방의 논리는 실제로 성추행이나 성폭행이 빈번한 현 상황에 대한 우려의 표현으로서 이해할 구석이 없지는 않으나 방금 말한 복지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으며, 지나치게 소극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혹시 이 예방 담론이야말로 성 공포증, 혹은 성도착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성은 건강하고 아름다워야 한다"고 한다. 이런 구호로 구성애라는 청소년 성 전문가가 스타로 떴다. 언뜻 들으면 타당한 말 같지만, "아우성"(아름다운 우리 아이들의 성)의 논리는 성도착을 죄악시하면서 성을 위생, 예방, 안전, 치안의 범주에 여전히 포획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포르노에 탐닉하고, 음란물을 만드는 일은 당연히 성도착으로 보일 것이다. <거짓말>을 둘러싼 논쟁에서 이 영화를 음란물로 보는 관점에도 이런 성도착 공포가 작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공포야말로 편집증(paranoia)이 아닐까? 성을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으로만 보려는 것이야말로 생명에 넘치는 성의 미학을 선병질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거짓말>을 음란물로 보는 것은 음란물공포증(porno-phobia)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런 태도는 이질적인 것, 더러운 것, 추한 것, 위험한 것에 대한 공포나 혐오와 통한다. 포르노공포증은 타자공포증이며, 우상공포증이다. 그것은 타자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자아 중심적이며, 동일성의 원리에 포박되어 있는 심리상태이다. 포르노공포증이 성의 미학을 선병질로 만든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선병질의 인간은 자신의 신체에 이질적인 것들이 틈입하는 것을 참아낼 능력이 없는 허약한 체질의 인간이다. 사실 건강한 신체라야 내부에 더러운 것, 위험한 것, 추한 것, 악취나는 것, 불쾌한 것을 속에 포함하거나 참아내는 능력을 가질 것이다. 자신의 깨끗한 피만 허용하고, 콧물, 침, 고름, 오줌, 똥, 땀, 정책, 비듬, 떼, 등의 영락물(零落物, the abject)을 한사코 신체 밖으로 내치려는 것은 좋다고만 여길 것인가? 영락의 존재는 "우리"에게, 동일성의 원리에 포괄되지 않는 존재이다. 사회적으로 볼 때 영락의 존재들은 외국인 노동자, 나라를 잃어 떠도는 사람들, 부랑자처럼 정처를 잃은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한국에서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 한국의 문화적 코드에 따라 잘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사람, 혹은 한국의 정통 혹은 지배 문화에 귀속하지 못하는 사람, "정상적" 삶을 오히려 거부하는 사람, 사회규범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사회의 "사이에 낀" 존재, 지배 사회에 틈입한 존재로 보이며, 따라서 쉽게 배척과 업신여김과 증오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런 존재와의 공존을 거부할 때 그 사회는 편협한 자기 중심적 사회, 파시즘이 횡행하는 사회가 된다. 한 사회에 사회생태적 차원이 있다면 서로 차이를 지닌 영락의 존재들,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인 존재들을 더 많이 포괄할 수 있을 때가 가장 바람직한 상태일 것이다.
미학적으로 볼 때 영락의 존재를 타자로,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속해서는 안 되는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동일성의 논리 안에 포박되어 있는 옹졸한 선병질의 미학이다. 더러움, 못생김, 위험함 등을 배척하는 것은 숭고미를 외면하는 것이다. 숭고의 상태는 상상까지 초월하는 상태이다. 작든 크든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의 크기, 비위를 뒤집는 역겨움, 눈을 뜨고 보지 못할 정도의 더럽고 추한 모습들과 직면하려는 자세, 통념을 깨는 개념적 실험 등이 숭고미를 찾는 노력이다. 알다시피 현대예술의 기획은 이런 숭고의 미학을 예술 속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기존 예술 개념을 뛰어넘으려는 실험이자 노력이었다. 변기를 예술이라 명명하며 제도예술의 예술 개념을 깨부순 뒤샹의 실험 없이 현대예술의 역사가 가능했겠는가? 음란물은 예술이 아니라는 견해는 예술 안에 예술이 다룰 수 없는, 예술을 초과하는 것은 들여놓지 않으려는 선병질의 미학을 추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숭고의 미학을 금지한 예술활동이 어떻게 상상을 초월하는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음란 표현을 배척함으로써 한국의 미학은 숭고미를 아예 사라지게 할 것인가?

음란은 숭고하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진보의 상을 새롭게 만들 필요가 있다. 현재 국면에서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사상의 정치에서 표현의 정치, 성의 정치로 전선을 옮기자는 주장은 아니다. 사상 대 표현, 이데올로기 대 욕망의 대당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표현으로 사상을 대체하는 데 있지 않고, 사상을 성화된(sexualized) 사상으로, 탈육(脫肉)과 탈성(脫性)의 사상이 아니라 신체와 성욕을 가진 사상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우리는 부르주아 질서에 의해 관리되는 일탈을 수용하자는 소극적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안전장치를 만들자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를 새롭게 만들자는 제안이다. ‘우리’는 ‘내’가 버텨내기 어려운 ‘남’과 공존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정체성이다. 이때의 아름다움은 나만 허용할 수 있는 것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이 미학은 안전한 아름다움의 미학이 아니라 위험한 미학, 숭고의 미학이어야 한다. ‘우리’의 사상은 이때 불온한 것들만이 아니라 음란한 욕망의 표현도 담지 않으면 안 된다. 표현도 ‘심오한’ 사상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하겠지만 이때 이 심오한 사상은 욕망과 신체에서 나온 성화된 사상일 것이다.
이제 진보를 새롭게 규정하자. 문화적 진보를 외치며 정치적 진보를 외면하는 것을 용납해서도 안되겠지만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문화적으로 보수적 태도를 취하는 것도 용납해선 안 된다. 예술적 가치를 말하며 숭고미를 축출하려는 보수적 태도도 용납할 수 없다. 음란물을 저질로 보는 것은 대중을 저질로 만들어 거세하려는 신자유주의 세력과 협력하는 것임을 인식하자. 더러움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각종 청결주의는 경계의 불분명함을 참지 못하는 편집증이며, 바흐친이 말한 웃음의 여유를 상실한 생명혐오 증상이다. 정치적 보수도 보수이지만 문화적 보수도 보수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우리는 문화에서 진보란 예술적 가치를 주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표현의 실험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믿고 있다. 사회 진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사회복지만이 아니라 성의 자유 실현을 위해 복지 개념을 확장해야 한다. 청소년도 자율적 성 권리가 있고, 여성도 자신의 성애를 추구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에 음란물 제작의 권리가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기이하고 음란한 표현을 허용하라! 성행위에는 도착이 없다. 표현에도 도착은 없다. 음란은 숭고하다!
정리: 강내희

2002-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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