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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자유/칼럼] 자살사이트와 인터넷책임

By 2002/01/17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진보네트워크센터

자살사이트와 인터넷책임

* 한겨레신문 12월 13일자 게재글

최근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서는 인터넷 청소년 유해 매체물을 인식하여 차단하는 차단 소프트웨어를 배포하고 있다. 이 소프트웨어는 전국의 피시방, 학교, 도서관 등 국민의 인터넷 접속점에 널리 설치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것을 말 그대로 내려받아 깔았을 경우 접속할 수 있는 홈페이지는 단 한 개도 없다. 심지어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홈페이지에조차 접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소프트웨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 설정으로는, 청소년 유해 매체물은 청소년 유해 매체물이라 차단되고, 그것이 아닌 경우에는 청소년 유해 매체물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막힌다는 말이다.

물론 미등급 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도록 설정을 바꿀 수는 있지만, 수많은 홈페이지가 엉뚱하게 차단될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황당한 일이지만, 이 차단 소프트웨어는 정부가 최근 강력히 추진하는, `인터넷 내용 등급제’의 한 축이다. 게이 커뮤니티인 엑스존은 이 차단 소프트웨어가 인식할 수 있는 표시를 달지 않으면 형사 처벌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으며, 정보통신부는 이달부터 이 제도를 본격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 황당해서일까. 우리 사회는 이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 기술이 과연 명분대로 청소년을 보호할 수 있을지조차 물어보지 않는다. 차단 소프트웨어가 국가 인프라에 설치되면 국민의 정보 접근권과 알 권리에도 많은 영향을 줄 텐데도, 역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 무거운 침묵의 발단은 지난해 이맘때쯤 발생한 자살사이트 사건일 것이다. 지난해 12월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소위 자살 사이트 사건들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올 2월에는 전남 목포와 충북 청주에서 자살 사이트에 접속했던 것으로 알려진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국무총리의 애도 속에 정부와 경찰, 그리고 검찰은 청소년에게 유해한 사이트는 모두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제 인터넷 내용 등급제가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 사이트 사건에서 정말로 놀라운 사실은, 우리 사회가 그들이 자살한 이유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자살 사이트 때문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인터넷에 그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극단적인 사건 만큼 그들이 분명히 가지고 있었을 극단적인 고통에 대해 가정도, 학교도, 지역사회도, 국가도 면책되었다. 결국 인터넷 문제만이 남아 인터넷은 모든 책임을 지고 차단 소프트웨어에 의한 분할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논쟁적 질문이 필요하다. “자살을 생각하고 자살에 대해 토론한 자살 사이트가 죄일까?”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렇다”라고 답변하는 것 같다. 실제로 자살 사이트의 운영자는 붙잡혀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각하고 토론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대한 문제다. 그것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의 본질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질문과 답변이 어디서 되풀이되어 왔는지를 잘 알고 있다. 국가보안법이다. 53년 동안 국가보안법은 생각하고 토론하는 것에 대하여 죄를 물어 왔으며, 우리 사회의 양심적인 세력들은 끈질기게 이에 저항해 왔다. 그러나 나는 자살 사이트 사건에서, 국가보안법이 하나의 법을 넘어서 체제가 되어버렸다는 말을 실감했다. 우리 사회는 자유의 본질을 건드리는 문제에 대한 상식적인 질문을 잊어버린 것이다. 생각하고 토론한 것이 과연 죄를 물을 일인가?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서 보기에’ 청소년 유해 매체물일 때 차단하도록 하는 인터넷 내용 등급제는 청소년 보호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정부의 검열일 뿐이다. 그들이 죽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죄를 지었다. 그리고 계속 `청소년 보호’의 면피 뒤에 숨어 침묵한다면 우리 사회는 또다른 그들의 죽음을 막지 못할 것이다.

장여경/진보네트워크센터 정책실장

2001-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