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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거버넌스/칼럼] 다국어도메인의 운명은 어디로?

By 2001/07/24 10월 25th, 2016 No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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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어도메인의 운명은 어디로?

전응휘 (피스넷 사무처장)

인터넷 주소를 왜 꼭 영문으로만 써야 하느냐, 우리나라의 우리말로도 쓸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지극히 단순한 발상에서 소위 다국어도메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물론 이 논의는 처음부터 대단히 문제를 안고있는 토론이었다. 왜냐하면 마치 도메인이 또 하나의 등록상표이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는 상표권자들의 생각이 도메인네임의 특성을 간과하는 문제를 낳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터넷 도메인네임 역시 영문이라기 보다는 컴퓨터가 기계적으로 처리하기에 가장 단순하고 공통적으로 쓰일 수 있는 영수옆줄(영문 알파벳, 숫자, 그리고 대쉬기호)을 이용하여 기억하기 힘든 숫자들의 조합인 IP주소를 대치해서 사용하는 식별자(identifier)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넷 사용이 확산되다 보니 도메인이 기존 등록상표의 이해를 악의적으로 침해하는 경우도 생겨나게 되었고, 우리나라처럼 인터넷 이용인구가 2천만에 가까워져 가는 상황에서 웹사이트 주소를 영문표기로만 한정한다는 것이 불편하거나 또 너무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도 자연스레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좀 더 복잡해진 것은 이처럼 다국어 도메인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나라들 – 주로 동북아지역 국가들 한국, 일본, 중국 등 – 이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논의를 전개해 가고 있는 터에 이미 기존 도메인 시장의 공룡기업인 베리사인사가 갑자기 작년 여름부터 시험운영(Testbed)라는 딱지를 달고 본격적으로 유료도메인등록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다국어도메인문제가 일반인들의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은 다국어도메인이 마치 개별 언어권 이용자들의 당연한 권리를 실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실제로는 그 배후에 글로벌 마켓 선점을 노리는 상업적 이익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용자들의 실제적인 수요가 있고 그것에 근거해서 상업적 이익추구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러한 현실 자체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용자들의 현실적 수요를 이용하여 충분하게 검증되지도 않은 서비스를 시장에 내놓고 상업적 이익과 시장선점을 노리는 것이라면 이는 결과적으로 일반 이용자, 소비자에 대한 기만행위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같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이용자들이 별 비판적 인식 없이 도메인업체들의 다국어도메인 캠페인에 쉽게 휘말려드는 것은 주소를 자국어로 쓴다고 하는 것이 일종의 모국어에 대한 자긍심이나 민족에 대한 애국심과 같은 정서적인 요소에 강하게 호소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간단하게 언급했지만 도메인네임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언어에 대한 고려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식별자로서의 기술적, 기능적인 이유 때문에 영수옆줄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이를 특정언어로 대치하자고 하는 주장은 처음부터 도메인네임 본래의 고유한 특성을 빗나간 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용자의 요구가 있다면 다국어도메인의 구현이 기술적으로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를 외면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선 두 가지 중요한 쟁점이 있다. 하나는 다국어도메인이 굳이 국제적인 기술표준을 따라야 할 이유가 있느냐 하는 것과 관련된 논의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적인 기술표준을 확립한다고 할 때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기술적 완벽성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냐 하는 것과 관련된 논쟁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쟁점의 배경에는 공통적으로 빨리 서둘러서 일반 이용자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상업적인 이해가 깔려 있다. 이 두 가지 논쟁을 좀 더 부연하자면, 전자는 다국어도메인(우리 경우에는 한글도메인 – 한글.com 혹은 한글.co.kr)은 어차피 국제적으로 사용해야 할 용도가 별로 없는 것이니 국제적인 기술표준을 만들고 따라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는 주장이며, 후자는 인터넷에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도메인네임체계와의 기술적 호환성(interoperability)이나 다종언어간에 식별자로서의 고유성을 어느 정도까지 추구해야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인데, 최종적으로는 기술적으로 완벽한 기준을 형성해야한다고 하더라도 당장 큰 문제가 없는 기술이더라도 우선 기술표준으로 채택하고 추후 보완하자는 주장이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한 첫 번째 반론은 국제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차피 글로벌망인 인터넷과 관련이 없는 논의이니 인터넷도메인과 관련하여 논의할 필요가 없으며, 그 같은 로칼네임은 소비자에게 혼란을 유발하고 소비자피해를 야기할 수 있으므로 현재의 인터넷네임체계(예컨대 .com이나 .kr)에서 구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메인네임체계에서 각각의 식별자의 고유성을 분간할 수 없게 된다면 도메인네임의 성격상 치명적인 것이므로 엄정한 기술적 검토가 있어야 하고 새로 사용될 기술이 현재 쓰이고 있는 기술체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라면 인터넷 이용의 안정성(stability)을 해치게 되므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상업적 이익의 조속한 실현에만 급급한 업체들의 입장과는 달리 인터넷 도메인의 기능적 공공성을 고려한다면 기술적 호환성과 인터넷 이용의 안정성을 실현한다는 것은 일반 이용자의 입장에서도 너무나 당연하게 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베리사인을 포함하여 다국어도메인 비즈니스에 뛰어든 관련업체나 기관들이 다국어도메인이 IETF(Internet Engineering Task Force, 인터넷의 기술표준을 확립하는 기구)의 기술표준이 나올 때까지 본격적인 서비스를 해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그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인터넷 도메인네임에 대한 정책을 수립해온 ICANN(Internet Corporation for Assigned Names and Numbers, 인터넷주소자원관리기구)이 지난 6월에 열린 스톡홀름회의에서 베리사인에게 또다시 이 같은 경고를 확인한 것도 업체들의 이익추구가 바로 일반 이용자들의 대규모의 혼란과 소비자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금년 8월초 영국에서 열릴 IETF회의에서 과연 다국어도메인의 기술표준이 확립될지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낙관적 견해와 비관적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이미 다국어도메인워킹그룹에서는 기술표준에 대한 컨센서스안을 내놓았지만 IETF의 대표적인 원로인 존 클렌신(John Klensin)이나 빈 서프(Vint Cerf)와 같은 이들이 기술적인 세부사항에 대한 지극히 회의적인 견해를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최소한 몇 달이나 몇 년쯤은 족히 더 걸릴 것이라는 견해와 아마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는 극히 비관적인 견해도 있다. 한편 IETF에서의 기술표준확립에 일말의 실낱같은 기대를 걸고 있는 베리사인이나 i-DNS와 같은 도메인업체들은 IETF가 기술표준확립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인터넷의 기술표준확립의 전통을 깨는 한이 있더라도 또 다른 기술표준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계속 비즈니스를 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 같은 움직임에서 물론 업체들의 과도한 상업적 이익집착으로 인한 기술적 폐해는 경계해야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 ASCII 7비트 네임체계와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갖게될 다국어도메인에 대한 기술표준을 미국중심의 네임운용체계를 고수하며 확립해온 기구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딜레마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도 없지는 않은 듯 하다.

2001-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