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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자본주의의 지식집약적 재구조화와 계급 재구성/이원영

By 2001/03/22 10월 25th, 2016 No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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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大文化 [51호] 자본주의의 지식집약적 재구조화와 계급 재구성

– ‘정보경제’혹은‘지식기반’의 지구적 노동기계 비판 –
이원영 / 도서출판 갈무리 편집인, 정치철학연구가
jhjoe@galmuri.co.kr

지구화하는 자본의 신자유주의 전략은 축적의 지식집약적 재구조화를 수반한다. ‘포드를 넘어선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러한 재구조화의 표현이다. 한국에서도 이 경향은 예외 없이 관철되고 있다. 1999년을 지나면서 신진 벤처 기업들의 정보산업이 주식총액에서 전통적 산업들을 넘어서는 사태가 나타나면서 이른바 벤처 열풍이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것이다.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한국의 산업은 전보다 더 급속히 지식-정보 집약적으로 재편되어 가고 있다. 국가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물결 속에 자신의 권리의 상당 부분을 양도하면서도 신자유주의적 정보화에서는 자신을 선도 주체로 내세운다. 이 과정에서 ‘지식기반사회’가 정책적 표어로 등장하며 지식을 부가가치 창출의 원천으로 규정한 신지식인론이 부상한다. 개별 대학의 자본에의 포섭을 심화시키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학부제로의 전환이나 전국적 대학체계 전체를 자본의 필요에 종속시키기 위한 위계화 전략으로써의 ‘BK21’이 이러한 전환의 계열적 일부임을 부언할 필요가 있을까.
오늘날의 세계에서 강력히 추진되고 있는 이 전환을 표현함에 있어서, ‘정보 경제’나 ‘디지털 경제’라는 용어는 현대 사회에 대한 객관주의적 묘사를 담고 있으며 ‘정보 혁명’이나 ‘디지털 혁명’ 혹은 ‘전자 혁명’이라는 용어는 기술 혁명론의 현대적 대입으로서 오늘날도 여전한 자본의 ‘진보적’ 역할을 재확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이 용어 목록 속에 근대적인 모든 것의 해체를 함축하기도 하는, 그리하여 주체성의 해체까지 함축하는 ‘탈근대 사회’라는 용어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용어와 개념을 둘러싼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자본 주도의 이러한 질서재편이 다중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이에 대한 이의제기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오늘날의 이 지구적 변화를 관통하는 정보화의 경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기계 체계와 계급투쟁

기술 발전과 산업의 역사의 관계를 거칠게 표현하면, 제1차 산업혁명을 규정한 기계화가 증기 기술의 생산에의 응용이며, 제2차 산업혁명을 규정한 공장자동화가 전기 기술의 생산에의 응용이라면, 제3차 산업혁명을 규정하는 정보화는 전자 기술의 생산에의 응용이라 할 수 있다. 전자 기술의 발전과 그것의 생산에의 도입은 생산을 인간 노동력의 도구적 연장이나 기계적 재현의 차원에서 벗어나게 한다. 자동기계 단계에서 이미 생산과정의 지적 요소들이 육체 노동으로부터 분리되어 그것이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력으로 전화되지만1) 전자 혁명과 정보화는 이 분리를 완성시킬 뿐만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육체 노동의 필요성을 제거한다. 정보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자동화된 거대한 기계 체계는 인간의 육체 노동의 개입 없이 소프트웨어에 축장된 명령체계를 통해 가동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명령체계는 단지 공장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로써 기계 체계에서 해방된 노동자 계급은 정보적 명령체계에 종속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은 현대 사회의 이러한 변모에 대한 비관주의적 비판을 우리에게 제공했다. “선진 산업 사회에는 (증대하는 오토메이션 부문을 포함하여) 생산과 분배의 기술적 기구가 그 사회적·정치적 영향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단순한 도구의 총량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기구의 생산물과 그 기구를 조작하고 확장하는 활동을 선험적으로 결정하는 하나의 체제로서 기능한다”2)는 진단하에, “이렇게 되면 지배는 -허울뿐인 풍요와 자유 속에서-개인적 생활과 공적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고 진지한 반대를 모조리 통합하고 모든 선택 가능성을 흡수한다”3)는 우울한 결론을 도출한 마르쿠제의 현대 사회 해석이 그것이다. 그러나 1964년에 제기된 이러한 해석은 불과 4년 후 1968년 혁명의 물결이 미국을 포함하여 유럽대륙을 휩쓸게 되면서 ‘진지한 반대를 통합하는’ 현대 사회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 사실은 현대 사회의 변모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게 된다.
맑스의 기계에 대한 분석은 마르쿠제의 해석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르쿠제가 기술적 합리성의 전일적 지배력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면 맑스는 기술의 발전과 그 결과에 내재하는 갈등을 분석하는 데 관심을 모은다. 그의 분석의 출발점은 기계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이다.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는 기계의 발명은 결코 누구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다른 모든 수단과 마찬가지로 상품의 값을 싸게 하며,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부분을 단축하며, 노동일 중 자본가에게 공짜로 제공하는 다른 부분을 연장하기 위한 것”4)이다. 다시 말해 더 많은 잉여가치의 생산이 기계의 목적인 것이다. 수수께끼는 여기에 있다. 주지하다시피 가치의 원천은 인간의 노동 시간이다. 그런데 왜 자본은 더 많은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해 생산 과정에 참여하는 노동의 양을 늘리는 대신 노동을 절약하는 기계를 도입하게 되는 것일까? 가장 쉬운 대답은 노동의 절약을 통해 단위 생산물의 생산비용을 낮추고 이것을 사회적 평균가격에 따라 판매함으로써 얻는 특별잉여가치의 수취가 기계 발명의 추동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기계 체계의 도입은 커다란 비용을 요구함에 반해 그것의 효과는 신속히 사라진다. 다른 경쟁 업체들에서 동종의 혹은 더 나은 기계를 도입하게 되면 특별잉여가치는 신속히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자본이 기계를 도입할 때 고려하는 주요 변수는 기계의 가치와 예상되는 특별잉여가치의 차이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기계의 가치와 기계가 대신하는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차이’5)에 있다는 것이 맑스의 생각이다. 이 생각은 노동력 가치가 상승할 때 기계 발명과 개량 및 기계 도입에의 동기가 상승함을 함축한다. 그런데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가치로서의 노동력 가치는 육체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생활수단의 가치를 자신의 최저한계로 가질 뿐만 아니라 더 적게 일하면서 사회적 부의 더 큰 몫을 쟁취하려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 의해 상향 압박을 받는다. 맑스는 기계 체계의 도입에 의한 상대적 잉여가치 전략으로의 전환이 이러한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 의해 규정됨을 분명히 밝힌다.

점차 증대하는 노동계급의 반항이 의회로 하여금 노동시간을 강제적으로 단축하도록 하고, 우선 진정한 공장에 대하여 표준노동일을 명령하지 않을 수 없게 하자마자, 즉 노동일의 연장에 의한 잉여가치 생산의 증가가 전혀 불가능하게 된 바로 그 순간부터, 자본은 기계 체계의 발전을 한층 더 촉진시킴으로써 전력을 다하여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데 몰두하였다.6)

노동자 투쟁에 대한 자본의 대응 전략으로서의 기계 체계의 도입은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하나는 그것이 노동자들의 요구의 흡수라는 점이다. 기계는 노동의 절약, 즉 더 적은 노동 시간으로 같거나 더 큰 가치를 생산하는 기술이다. 이 점에서 기계 체계는 노동자 계급의 노동시간 단축 요구를 실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 계급에게 더 많은 사회적 부를 가져다주거나 노동자 계급의 삶 시간의 확대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노동 시간 단축이라는 노동자 계급의 요구는 부정적 방식으로 혹은 역의 방향으로 실현된다. 이런 의미에서 기계 체계의 도입은 수동혁명이면서 반혁명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맑스가 좬자본론좭 제15장 제3절 이하에서 서술하는 ‘기계제 생산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은 기계가 자본의 독재에 대항하는 노동자 계급의 반항을 타파하는 무기임을 입증함으로써 기술 발전이 인류의 불행을 종식시킬 수 있으리라는 오늘날의 낙관주의적 기술혁명론에 대한 비판을 제공한다.
기계는 여성노동과 아동노동을 착취의 대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그리고 노동력 가치를 구성하는 상품 가격을 하락시킴으로써 직접적으로 노동자들의 노동력 가치를 현저히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의 강도를 높인다. 더 나아가 노동 절약의 수단으로 도입된 기계는 역설적으로 노동일 연장의 무기로 전화된다. 기계에서는 노동수단의 운동과 생산활동이 노동자에 대하여 자립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그것은 그것의 조수로 배치된 노동자가 어떤 자연적 제한에 부딪히지 않는 한 그 자체로 끊임없이 생산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자본의 인격적 형태인 자본가가 기계의 자연적 마멸을 막고 도덕적 가치감소의 위험을 덜기 위해 기계를 잠시라도 놀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기계 체계는 자본의 노동일 연장의 욕구와 긴밀하게 결합된다.
기계 도입의 종국적 결과는 인간과 이 객관적 유기체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기계는 기술적 관점에서는 종래의 분업체계를 타파하기는 하지만 그 분업체계는 처음에는 매뉴팩쳐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으로서 공장에 존속되며 다음에는 자본에 의하여 노동력의 착취수단으로서 더욱 지독한 형태로 체계적으로 재생산되어 고정된다. 전에는 동일한 도구를 다루는 것이 평생의 전문직이었는데, 이제는 동일한 기계에 봉사하는 것이 평생의 전문직으로 된다. 기계는 노동자 자신을 유년 시절부터 특정 기계의 한 부분으로 전화시키는 데 악용된다. 그리하여 노동자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비용이 현저히 감소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공장 전체에 대한, 따라서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절망적인 종속이 완성된다. (…) 매뉴팩쳐와 수공업에서는 노동자가 도구를 사용하는데, 공장에서는 기계가 노동자를 사용한다. 전자에서는 노동수단의 운동이 노동자로부터 출발하는데, 후자에서는 노동자가 노동수단의 운동을 뒤따라가야 한다. 매뉴팩쳐에서는 노동자들은 하나의 살아 있는 메커니즘의 구성원들이다. 공장에서는 하나의 생명없는 메커니즘이 노동자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며 노동자는 살아 있는 부속물로서 그것에 합체되어 있다.7)

남녀노소 구별 없는 개개인으로 구성된 노동집단을 노동수단의 규칙적 운동에 종속시키기 위하여 병영같은 규율이 필요해지는데 노동자 계급의 육체 노동자와 감독 노동자로의 분할은 이를 실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된다. 이리하여 높은 온도, 가득찬 먼지, 고막을 찢는 소음, 광선 차단으로 인한 어둠으로 나날이 건강과 생명을 빼앗는 감시 공간으로서의 공장 감옥이 출현하며 노동자들과 기계의 적대관계가 첨예해진다. 기계파괴의 형태로 표출된 러다이트 운동은 산업혁명이 가져온 기계 체계에 대한 노동자의 저항의 폭발이었다.

테일러주의 및 포드주의의 기술혁신에서 케인즈주의로

1917년 혁명에 대한 자본의 대응은 볼셰비키 조직이 구상한 동맹, 즉 노동자 전위들과 프롤레타리아 대중 사이의 동맹의 기초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전위를 공장으로부터 절단하는 것, 그리고 계급으로부터 공장을 절단하는 것”8), 이것이 자본의 목표였고 1917년에 대항하는 서방의 역공격의 특수한 형식이었다. 자본의 개혁주의의 표현으로서의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는 생산과정의 대규모화와 노동력의 탈숙련화를 통해 볼셰비키 전위들을 계급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그들이 계급대중에게 행사하던 헤게모니를 박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 작업의 하위분화와 단편화는 노동자들 속에 내재하는 숙련을 기계장치 속으로 체계적으로 이전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조립 라인의 도입이 그것을 가능케 했는데 노동자는 이제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콘베이어벨트의 한 부속품이 되었다. 그것은 숙련 노동의 해체와 지금까지 자본주의적 노동과정 외부에 존재했던 광범위한 대중들의 노동 과정으로의 흡인을 통해 노동자 계급을 수평적으로 재구성했다. 이러한 개혁이 1917년의 혁명을 봉쇄하는 데 일정한 실효를 거두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자의 대규모 창출과 더 높은 사회화를 통해 노동자 계급의 자율성을 이전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재구성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대량생산에 상응하는 소비주체를 창출하지 못함으로써 체제의 모순을 증폭시켰다. 1929년 검은 목요일의 월 스트리트의 붕괴는 체제에 미치는 노동자 계급의 위력적 현실성을 무시하고자 한 테일러주의/포드주의적 시도들이 직면한 충격적 위기였다. 시장이 주도한 기술혁신이 체제의 불안정성을 극적으로 드러낸 이 위기는 국가와 시장의 분리라는 고전적 자유주의 신화의 종말을 가져왔다.
체제의 안정은 국가 권력의 이 새롭고 위험스러운 기초, 즉 노동자 계급의 불복종적 힘에 대한 승인에 의존한다는 인식은 케인즈를 통해 표현되었다. 1929년을 맞아 케인즈는, 경제 내부에 정치적 요소를 내면화하자는 자유방임주의에 대항하는 자신의 이전의 포괄적 주장을, 국가 자체가 경제적 구조로, 생산적 주체로 되어야 한다는 명제로 발전시킨다. 케인즈의 생각은 국가가 생산적 주체로 됨으로써 유효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효수요’는 노동자 계급의 자율성을 승인하면서 그것이 자본의 외부로 탈주하지 않고 자본 내부에서 행동하도록 만드는 유인이다. 이것을 통해 노동자 계급과 그들의 투쟁은 자본주의 발전의 동력으로 계획될 수 있다. 케인즈의 ‘계획자’ 국가는 노동과 자본의 변증법과 영구 개혁주의를 통해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의 기술혁신적 대응의 결함을 보수(補修)했다.
케인즈의 대응은 공장에서의 전위의 파괴라는 테일러주의/포드주의의 대응을 받아들이면서도 국가에게 노동자 계급의 요구를 (물론 자본주의의 틀 내부에서) 재현하는 전위의 역할을 위임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전위의 상은 계획 주체로서의 국가 속에 보존된다. 이것을 1917년 혁명 이후 레닌의 생각과 비교해 보자.

사회주의는 최근의 현대 과학의 발견에 기반한 대규모 자본주의적 기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계획된 국가 조직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데, 이 국가 조직은 수천만의 인민으로 하여금 생산과 분배에서 하나의 통일된 기술을 가장 엄격히 준수하도록 한다.9)

러시아에서 전위는 국가로 전화되었고 자신을 국가자본주의적 발전의 견인차로 배치했다.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더 무거운 공물의 지불은 우리를 파멸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우리를 사회주의로 인도할 것’이다. ‘국가 자본주의 노선을 따라 노동자 계급이 소 소유자적 무정부성에 대항하여 국가체제를 보호하는 방법을 터득할 때, 국가적 규모로 대규모 생산을 조직하는 방법을 터득할 때, (…)사회주의의 기반은 확고하게 될 것이다. (…)소비예뜨 권력에게 국가자본주의는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닌데, 소비예뜨 국가는 노동자와 무산 대중의 권력이 보장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10)
이러한 인식 위에서 레닌은 ‘최근의 현대 과학의 발견에 기반한 대규모 자본주의적 기술’의 도입과 이것을 공장 속에 실현할 엄격한 ‘노동 규율’의 부과를 소비예뜨 정부의 주요 과제로 설정했다. 이후 레닌의 사회주의론 속에는 ‘산업의 자본주의적 경영의 보존과 노동 규율의 부과가 노동생산성 향상에 별 도움이 안되며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주도성, 활동성, 그리고 조직화를 저하시킬 것이며 노동자 계급을 예속화할 수 있다’는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우려를, 노동 규율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하려고 하는 ‘나무랄 데 없는 쁘띠 부르주아지’ 심성의 표현으로 비난하는 것이 하나의 논쟁적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11)
서구의 선진적 노동 기술 혹은 노동 방식과 엄격한 노동 규율을 결합시키는 것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촉진할 것이라는 레닌의 생각은 좬옥중수고좭의 그람쉬에게서도 거의 그대로 재생산된다. 그람쉬는 미국주의와 포드주의가 경제를 계획화하려는 경향의 표현이며 이에 걸맞는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를 길러내기 위한 장치들임을 밝힌다.

미국에서 작업의 합리화와 주류의 양조·판매 금지는 의심할 바 없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 기업가들이 노동자들의 사적인 생활을 조사한다거나 어떤 기업에서 자신의 노동자들의 ‘도덕성’을 통제하기 위해 감사활동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새로운 작업방식에서 비롯되는 요구인 것이다. 이러한 시도들(비록 실패로 끝난 것이라고 하더라도)을 비웃고 그것들은 단지 ‘청교도주의’의 위선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들은, 미국적 현상의 중요성, 의미, 객관적 내용 등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미국적 현상이란 역사상 그 전례가 없는 속도와 목적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와 인간을 창출하고자 한 지금까지의 가장 거대한 노력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12)

물론 그람쉬는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가 인간성이나 정신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들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람쉬는 장인 노동에서 표현되는 인간성이나 정신성의 노동 속에서의 유지와 실현은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오히려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는 ‘동물성’에 대한 투쟁을 개시한 산업주의의 최근 국면으로서 이제는 낡은 휴머니즘과 투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는 ‘노동자들이 새로운 생산 방식에 의해 소진되어 물리적으로 붕괴하지 않게끔 특정한 심리·신체적 균형을 작업 외부에서’ 부과하려 하는데, 이것이 바로 술과 성적 방탕을 금하려는 청교도적 노력의 목적이다.
우리는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의 이 노력이 사회주의의 유지를 위해 당/국가의 권력을 빌어 엄격한 노동규율을 부과하려는 레닌의 의지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노동규율이 한쪽에서는 자본가에 의해, 다른 한쪽에서는 국가에 의해 부과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노동규율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는 동일한데, 그람쉬 역시 노동규율의 부과를 반대하지 않는다. 그는 미래의 새로운 사회 형태에서는 지금 외부로부터 부과되고 있는 규율들이 노동자 계급의 자기규율로 전화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노동자들의 심리·신체적 균형이 내재화될 수 있으리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레닌 역시 노동 규율의 외부로부터의 부과를 항구적인 것으로 보기보다 이행기의 일시적 조치로 받아들였는데, 모스끄바-까잔의 철도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수행한 공산주의적 토요 노동에 대한 찬미는 그람쉬가 말하는 노동규율의 내면화의 한 사례이자 미래의 사회주의 노동자에 대한 한 예상으로 읽을 수 있다.13)

1968 혁명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전자/정보 혁명

그러나 1929년에 폭발한 위기는 케인즈로 하여금 체제의 안정을 위해서는 노동규율에 의지한 포드주의와 테일러주의만으로는 부족하며 완전 고용에 기초한 소득과 소비의 지속적 혁명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했다. 이것이 전후 복지국가를, 그리고 이른바 구 사회주의 국가들을 지탱한 개념틀임은 이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1968년에 폭발한 혁명은 계급투쟁을 해결하는 사회주의/케인즈주의적 방식이 체제의 안정을 보장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제도적 노동자 운동의 위기로 표출되었다. 이 제도적 노동 운동은, 케인즈가 국가의 기초로 삼고자 한(물론 통제 가능한 형태로의 변형 속에서) 노동의 권력이었으며 레닌과 그람쉬가 규율의 내면화 주체로 본 바로 그 집단이었다. 전후의 역사 속에서 이 제도적 노동자 운동은 노동 규율을 내면화하여 영구 개혁주의를 실천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 과정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과 창의성과 지성을 ‘자발적으로’ 계획자 국가에, 그리고 거대 기계들에 위임함으로써 전자기술에 기초한 집중화되고 대규모화된 새로운 생산체계를 가능케 했다. 그 결과, 새롭게 탄생한 것은 산업생산을 대체한 ‘에테르적인 정보기계’14)였다. 이제 노동은 탈영토화, 비물질화되며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교육적·정보적 강제를 통해 노동자를 온종일 자본의 전횡 아래에 묶어 놓는다. 노동자는 자신의 지식을 박탈하는 지구적 노동기계에 종속되어 끊임없이 자본을 위해 생산하고 또 소비한다. 자본은 집단적 노동력을 통합하면서 더욱 사회화되며 그 결과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공장으로 전화된다.
들뢰즈는 이러한 사회를 통제 사회라고 명명한다.15) 이러한 공간에서 지배는 노동자를 기계에 묶어두는 직접적 노동 규율, 즉 훈육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통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통제는 변조(modulation), 즉 ‘순간순간 스스로 변화는 주형, 혹은 이러저리 변형될 수 있는 그물’16)과 같다. 봉급보다 우위에 선 상여급, 학교 교육에 뒤이은 평생 교육, 낡은 스포츠를 대체한 서핑, 생산을 대체한 마케팅과 금융, 감옥을 대체하는 전자 족쇄, 주화를 대체한 전자카드, 병원을 대체하는 원격진료, 기타 무수히 열거할 수 있는 통제사회의 이 새로운 특징들은 정보 기기와 컴퓨터와 같은 제3의 기계들을 통해서 작동된다.
증기가 산업화를 가져왔고 전기가 자동화를 가속시켰듯이, 전자의 생산에의 도입은 정보화를 재촉하는 ‘디지털 포맷’ 혹은 ‘디지털 수렴’을 가져온다. 디지털 포맷은 정보의 1들과 0들로의 상징적 재현이며 이것은 생산물이 전자적 방식으로 쉽게 저장되고 전송될 수 있게 한다. 즉 정보는 전자 파동이나 광선 파동으로 변환되어 전선이나 광케이블을 통해, 혹은 전자기파로 공기나 공중을 통해 전송될 수 있다.17)

정보화의 결과

정보화가 자본에게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점이 무엇인가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문제는 정보화 경향이 오늘날의 노동자 계급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에서 이미 암시되듯이 정보화는 포드주의 노동자의 결정적 패배를 함축한다. 포드주의 노동자의 개혁주의는 노동자들의 창의성과 지성과 통제력을 기계로 이전시키려는 자본의 전략에 부단히 협력하는 것이었다. 정보화가 노동조합 권력의 약화를 수반하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 사실 노동자의 힘의 기계로의 이전은 정보화 과정에서 돌출한 자본의 일시적 전술이 아니다. 맑스가 집요하게 분석하고 있듯이 그것은 자본주의의 탄생 이후 지금까지 줄곧 이어지고 있는 자본의 일관된 전략이다. 오늘날의 전자 혁명 역시 그 과정의 최근의 국면으로서, 개별 노동자의 지성과 지식을 생산적 기계 체계 속으로 직접적으로 전유하고 병합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전자 혁명은 개별 노동자 혹은 집단 노동자의 지성의 보다 높은 지식 형태로의 수집, 집계, 통합을 보여주는 점에 그 독특함이 있을 뿐이다. 포드주의가 노동 집약적 생산을 기술 집약적 생산으로 대체했다면 오늘날의 정보화는 그 기술의 고지식적 내용을 통해, 즉 지식집약적 생산을 통해 이전의 시기와 구분된다. 이 단계에서 대중의 경험과 지식은 노동자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노동자 외부에 데이터베이스로, 소프트웨어로 축적된다. 하드웨어가 노동자의 육체나 기계류에 축적된 지식이라면, 소프트웨어는 노동이나 기계류로부터 분리된 지식, 특허권이나 저작권과 같은 독점권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상품지위를 유지하는 지식이다. 이 고도로 축적된 지식들은 ‘더 이상 지도(地圖)나 복제, 거울 또는 개념으로서의 추상’이 아닌 시뮬라시옹을 가능케 한다. 즉 ‘모델들을 가지고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 즉 파생 실재를 산출하는 작업’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18)
무인 자동기계와 (우리가 오늘날 유전자 조작과 복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조작과 복제에 기초한 생산이 그 예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이 창조한 신이 인간을 지배하고, 노동자가 생산한 기계가 노동자를 지배하듯, 노동자로부터 전유된 지성이 생산으로부터 노동자를 추방하는 역설이 재연된다.
물론 오늘날 모든 노동이 추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화된 지구적 노동기계는 고기술 노동자들(과학자, 엔지니어, 연구자들, 기술자)을 중심으로 소프트웨어를 생산하면서 나머지 노동자들을 언제든지 필요할 때에만 사용할 수 있는 유연한 노동자, 임시직 노동자로 배치하려 한다. 생산에서 추방된 광범위한 실업자들은 이 유연한 노동자들을 충원해 주는 저수지의 역할을 할 것이다. 실제로 디지털화된 자본은 노동자의 저항이 있는 곳에서 자본을 빼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노동자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그 이동은 빛의 속도와 같은 것이어서 하루에도 자본은 횟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자주 지구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다. 자본의 이 이동에 따라 수많은 업종이 생겨나고 또 파산한다. 노동자들도 이에 따라 취업과 실직을 되풀이한다.
복지국가 혹은 사회적 국가 단계에서는, 자본이 노동을 계획하고 조직하는 수단으로 국가를 사용할 수 있었던 반면 노동 역시 자본의 운동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국가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는 더 이상 디지털화된 자본의 이동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것은 포드주의 노동자의 패배를 다른 측면에서 반증한다. 노동조합으로 대표되는 제도적 시민사회는 국가에게 포섭되며 국가는 자본의 논리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국가로부터 독립된 시민사회 조직으로 출발한 NGO들도 자국 정부에, 그리고 더 많게는 자신에게 후원금을 대는 해외 자본과 정부에 포섭된다.19)
자본의 자유화와 민영화의 후원, 자본의 핵심적 이윤원천으로 된 지적재산권과 특허권의 보장, 노동자들의 지구적 탈주 운동인 이민의 통제,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대한 경찰적 통제 같은 것이 국가의 주요한 역할로 남겨지는 것이다. 대중의 공포에 토대를 둔 핵국가 혹은 신경찰 국가가 사회적 국가 이후 현대 국가의 특징으로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구성 주체의 생산

자본에게 최대한의 자유가 주어지고 노동조합이 자본의 논리에 통합된 현실에서, 저항하는 노동자에게 전자적 족쇄가 채워지며 노동자 계급이 서로 이해를 달리하는 고기술 노동자와 임시직 노동자, 실업자로 분할되어 있는 지구적 현실에서 과연 저항은 가능할까?
우리는 저항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일체의 저항이 시뮬라크르의 들러리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야당, <좌파>, 비판적 담론 등과 같은 시뮬라크르 들러리로 하여 권력은 그의 비존재, 그의 근본적인 무책임성, 그의 <부유>의 악순환을 깨뜨리려 한다. 권력은 화폐처럼, 언어처럼, 이론처럼 떠다닌다. 비판과 부정성만이 홀로 여전히 권력의 사실성의 환영을 퍼뜨린다. 만약 이것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고갈되어 버린다면 권력은 이것들을 인위적으로 부활시키고, 그것들에게 환각을 일으키는 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20)

우리는 기존의 저항의 이러한 들러리화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우리는 민주파 야당들의 변형된 신자유주의적 여당으로의 이동을, 동구 사회주의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붕괴와 해체를, 전투적 노동조합 운동의 개혁주의 정당으로의 전환을, 비판적 지식인의 권력 사제로의 변신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급관계가 재구성될 때마다 낡은 저항들이 쓸모 없어지거나 권력의 들러리로 바뀌는 만큼 새로운 저항들이 출현해 오지 않았는가? 낡은 저항들의 함열과 사라짐은 허무주의의 필연성을 입증하기보다 새로운 무기를 찾을 즐거움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들뢰즈의 말을 보드리야르의 주장과 대비해 보자.

지금 한창 징계 사회를 대체해 가고 있는 것이 통제 사회이다. ‘통제’란 버로스가 새로운 괴물을 지칭하기 위하여 제안한 이름이며, 푸코는 그것이 장차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폴 비릴리오 역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통제의 형태들을 계속 분석해내고 있다. 그 형태들은 닫힌 체제의 지속을 통하여 작용하던 과거 징계율을 대체해 가고 있는 것이다. (…) 어느 체제가 가장 지독한지 혹은 가장 참을 만한 것인지 따져볼 것도 없다. 왜냐하면 제각각 해방과 굴종을 대립시키고 있으니까. 가령 감금의 장소인 병원의 위기 상태에서, 지역별 구분이라든가 통원·왕진 치료 등이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주는 듯하지만, 실상 가장 가혹한 감금 상태에 버금가는 통제 기관의 일환인 것이다. 두려워하거나 희망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저 새로운 무기를 찾을 일이다.21)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새로운 무기는 오직 전개되고 있는 현실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펴본 자본의 디지털 정보화 전략의 이면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주로 이 노선을 따라 현대 사회를 고찰하는 네그리의 탐구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의 출발점은, 디지털 정보화와 자동화가 비록 노동의 필요성을 파괴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것은 노동 거부에서 샘솟는 지식에 의해 고안된 것이라는 생각이다.22) 이 생각은 기계 체계가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 단축 투쟁에 대한 수동적 대응으로서 발전되어 왔다는 맑스의 생각과 일치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산업주의의 승리가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해방을 가져올 것이라고 본 맑스의 분석범위를 넘어서 있다. 네그리는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정보기술이 어느 정도까지, 자본이 생산 및 재생산의 모든 사회적 힘을 실질적으로 포섭하는 수단인가’23)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정보기술에 의해 변화된 생산 방식은 생산의 경제적 가치가 더이상 특정한 기술적 능력이나 노동자의 기술과 연결되지 않는다.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자의 직접적 노동 시간이 아니라 생산에 적용되는 과학과 기술의 총체이다.
그 결과 노동하는 집단에 기초했던 계급의식은 사라진다. 그러나 적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조직 속에 내재화된다. 이제 단지 국가나 사장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와 노동을 전유하는 사회적 구조가 문제가 된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착취당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풍부한 주도권, 자유와 잠재력을 소유할 수 있다. 정보기반의 자동화는 생산적 사회와 실업 사회라는 두 개의 사회를 정립한다. 다른 한편으로 정보기반의 자동화는 노동에 사용되지 않는 시간이 사회적으로나 생산적으로 유용하게 되는 더 높은 사회형태의 정립을 나타낸다.24)
이런 사회 속에서 적대와 사회적 갈등이 구조화되는 양태는 완전히 새로운 기준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예컨대 양산되는 실업에 대항하여 단순히 ‘실업 반대’라고 말하는 것은 변화된 사회에 낡은 노동 관계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시간인가?’라는 새로운 문제의 제기를 봉쇄한다. 네그리는 ‘만약 사회적 시간이 오늘날 생산을 조건짓는 지식의 이전 및 생산에서 유용하다면, 모든 사회적 시간은 노동에 사용되었든 노는 데 사용되었던 보상되어야 하지 않는가?’25)라고 묻는다.
그러므로 적을 국가나 사장들로 국한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필요한 것은 시선을 사회의 조직 형태에로 돌리는 것이다. P.M.은 좬볼로 볼로좭(Bolo’Bolo)에서 오늘날의 지구적 노동 기계가, (A)정보(계획, 설계, 경영, 과학, 커뮤니케이션, 정치, 아이디어의 생산, 이데올로기 영역, 예술 등 그 기계의 집단적 두뇌와 신경 체계), (B)생산(상품의 산업적·농업적 생산, 계획의 실행, 파편화된 노동, 에너지의 유통) (C)재생산(A, B, C 노동의 생산과 유지, 아이의 출산, 교육, 가사노동, 서비스, 오락, 정의, 섹스, 레크리에이션, 간호 등) 등의 세 가지의 본질적 기능들, 국제 노동력의 세 가지 구성 부분들, 세 가지 거래들(Deals)로 구분된다고 본다.26)이 세 가지 기능들에는 각각 (A)기술적 지식인 노동자, (B)농업/산업 노동자, (C)변동 노동자가 상응한다. 그리고 기계를 움직이도록 만드는 모순은 이 노동자들 간의 내적 모순이다. 이들 중의 일부는 이러한 거래를 지지하고 있고 또 다른 일부는 그것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의 이 내적 분할과 상호 배척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 이것은 사회적 착취형태에 반대하는 새롭고 자율적인 생산능력들의 결집으로서 노동자들의 대안적 연대형태들, 협동체들을 조직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노력이 국가나 사장들과의 싸움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는 네그리의 생각과 상통하는 것이며 ‘계급간 적대의 극대화와 계급내 적대의 최소화’가 오늘날의 운동의 과제라고 말하는 해리 클리버의 생각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계급내 적대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생산이 지배와 명령의 부품들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은밀한 영역에서 현대의 주체성의 부품도 생산하고 있다는 점에 기초해야 한다. 오늘날의 지식 집약적 생산, 정보적 생산은 어디에 토대를 두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자.
지식은 다중의 생산적-소통적 삶의 속성이다. 그것은 소비될수록 소진되기보다 오히려 증대한다. 지식생산과 정보활동은 생산적 소통체의 운동에 기초한다. 되돌아 보면 자본은 그 시작부터 다중의 이 소통능력을 착취해 왔다. 그것은 크게 보아 세 개의 단계를 거친다.

(1)자연과 인간의 신체적-정신적 소통(신진대사) 과정에 대한 자본의 폭력적 개입과 노동의 발생
(2)노동자들의 지적 소통 능력의 기계로의 이전과 자본의 자립화(즉 인간 지성의 고정자본으로의 분리 독립)
(3)생산적 소통·공동체의 지성의 소프트웨어로의 이전

우리가 다루고 있는 단계는 세 번째 단계이다. 예를 들어보자. 검색엔진 야후(http://www. yahoo.com)는 어떻게 축적하는가? 그것은 검색로봇을 통해 다중의 수많은 지성활동들, 즉 인터넷 사이트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그것을 소비자에게 되돌려주는 작업을 자신의 축적의 기초로 삼는다. 공장에 결집된 직접적 생산 공동체가 착취의 대상이 아니다.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거대한 소통 욕구들과 소통 활동들이 야후의 착취대상이다. 생산에 투여된 인간의 직접적 노동시간이 아니라 사회적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적·소통적 협력, 즉 소통 그 자체가 착취의 대상으로 된 것은 그 전의 단계와 구별된다. 오늘날의 착취는 다중의 삶에 대한 직접적 개입을 통해, 그리고 그들간의 소통 행위의 형태와 구조에 대한 자본 중심적 변형을 통해 존재할 수 있다. 그들의 소통이 자본을 매개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것, 다중의 삶이 자율적으로 구축되지 못하게 저지하는 것이 착취의 존재조건이다. 이것이 하버마스가 생활세계의 식민화라고 부른 것이다. 지식과 소통력은 그 자체가 사회 혹은 공동체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희소성의 원리에 구애받지 않는 특징을 갖는다. 그것들의 소비는 오히려 그것들의 증식을 낳는다. 이 때문에 그것들을 상품화하는 것은 유한한 공기를 상품화하는 것만큼 어렵다. 지식·정보가 오직 독점권에 의해 지지됨으로써만 상품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국가가 독점권(특허권, 지적재산권 등)에 대한 자본의 요구를 법적으로 담보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27)
오늘날 생산하는 소통적 다중은 자본의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의 잠재력은 철저히 자율적이다. 자본은 핵공포 혹은 경제 위기를 무기로 자신의 개입을 정당화 하며 정보의 탈취를 통한 명령체계의 구축을 통해 착취하고 지배한다. 오늘날은 생산적 다중의 자율적 삶이 착취의 대상이며 그것의 (구획과 분할을 포함하는) 불구적 변형이 착취의 방법이다. 자본의 착취적 개입은 다중의 소통적 욕구를 변형시켜 불구화하며, 다중의 자유로움, 해방, 자기가치화를 곤란하게 만든다. 그래서 오늘날은 착취가 곧 지배이고 통제이다. 경제와 정치의 분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은 착취를 통해서 지배하며 지배를 통해서 착취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중의 자율적 삶에 외부적이며 기생적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본의 착취와 지배가 기생적으로 되는 만큼 적대보다 분리의 잠재력이 성숙한다는 것이다. 자본이 생산 과정에서 지휘감독의 역할을 담당할 때에는 적대의 측면이 더 중요했다. 분리는 적대를 거쳐서만 가능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가는 더이상 어떠한 생산적 기능도 하지 못한다. 노동자 계급은 자신의 생산적 소통능력을 자본의 기생적 매개로부터 매개의 시뮬레이션으로부터 분리시켜 냄으로써 자본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적대를 조건으로 하는 봉기나 재전유의 계기보다 구성이 더 중요하며 봉기와 재전유는 구성의 계기에 종속된다. 그러나 이것이 적대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기조직화, 자기가치화 운동의 성숙은 일시적으로 적대의 계기를 전면화시킬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봉기 혹은 재전유의 운동을 절실히 요구하는 국면에 다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구성의 중심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착취로부터의 해방은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동일한 과정의 양면을 이룬다.
이 과정은 자기조직화에서 시작해야한다. 왜냐하면 자기가치화는 자기조직화의 구체화, 현실화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통한 소통 기술의 증대는 자기조직화의 가능성을 크게 높인다.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서 개인들, 집단들, 계급들은 서로의 처지와 상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노동자 계급 내부의 분할을 넘어설 수 있는 수평적 의사소통을 시작할 수 있다. 전자메일, 게시판, 뉴스그룹, 웹 사이트 등은 우리를 연결시키는 노드(node)들로 작용할 수 있다. 물론 컴퓨터 통신네트워크로 충분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집회와 시위, 파업과 같은 전통적 투쟁-소통 형태들과 접목됨으로써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사빠띠스따들은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투쟁 대의를 알리고 대륙별-대륙간 풀뿌리 활동가들의 회의를 조직해 냄으로써 컴퓨터 통신네트워크의 힘을 보여주었다. WTO 각료회의 저지를 위한 시애틀 시위와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총회를 봉쇄하기 위한 워싱턴 시위 역시 우리에게 새로운 사회적 연대와 상호소통의 사례를 제공한다.
자기조직화의 자기가치화로의 이행은 전복의 수로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지구적 노동기계의 자동적 흐름은 다중의 구성적 힘을 부단히 전유하는 메커니즘이기 때문에, 전복이 없이 다중의 생산적·소통적 에너지가 자기가치화의 방향으로 모아지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P.M.은 전복의 세 차원을 구별하고 각 차원들에서 그 활동의 있을 수 있는 세목들을 나열한다.

우리는 모든 유형의 노동자, 기계의 모든 기능인, 그리고 세계의 모든 부분이 그 나름의 특유한 전복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 기계에 해를 가하는 상이한 방법들이 있으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가능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전복의 지구적 메뉴는 다음과 같이 서술될 수 있다
(A)탈정보화: (하드웨어나 프로그램의) 사보타지, (게임이나 사적 목적을 위한) 기계-시간의 절취, 결함있는 설계나 계획화, (엘스버그와 워터게이터 스캔들과 같은) 비밀누설, 직장 이탈(과학자, 공무원), 선택의 거부(교사), 관리 실수, 배신, 이데올로기적 일탈, (상급자에게) 거짓 정보주기 등; 이것들의 효과는 즉각적이거나 장기적일 수 있다(몇 초, 몇 년)
(B)탈생산: 일손 놓기, 저질 생산, 사보타지, 파업, 병가, 작업장 집회, 공장에서의 시위, 잦은 이동, 점거(예컨대 폴란드 노동자들의 투쟁); 효과는 중기적(몇 주, 몇 달).
(C)파열: 반란, 도로 봉쇄, 폭력 행동, 도주, 이혼, 가정 싸움, 약탈, 게릴라 전쟁, 빈집 점거, 방화(예컨대 사웅 빠울로, 마이애미, 소웨또, 엘 살바도르); 효과는 단기적(몇 시간, 몇 일).28)

그러나 먼저 이들 각각의 형태는 다른 두 가지 형태들에 의해 무력화될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그들의 효과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탈정보는 생산이나 상품 및 서비스들의 물리적 유통 속에서 사용되지 않으면 무효하다. 파업은 경찰의 개입을 누군가가 저지하지 못하면 파괴된다. 파열은 기계가 생산 부문에서 대체 공급원을 획득하는 한 빨리 끝나고 만다. 노동기계는 자신에 대항하는 전복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것은 세 부문의 공격이 서로 지지하고 증식되지 않도록 그것들을 흔들어 놓으려고 노력한다. 예컨대 노동기계는 파업과 실업자 시위가 서로를 배척하고 서로의 힘을 상쇄시키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문성과 지역성을 넘어서려는 상호 연결과 공명의 노력은 필수적이다. 부문과 지역에 매몰된 투쟁들은 오히려 노동기계에게 상상력과 신축성을 부여해주며, 자신의 통제 도구들을 점검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그칠 수 있다.
둘째로 전복의 이 세 가지 형태들은 자기가치화에 종속될 때에만, 즉 구성의 계기로 될 때에만 생산적 힘으로 전화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복은 자기가치화, 구성의 전제를 창출하는 생산활동으로 볼 수 있다. P.M.이 전복(subversion)을 전복적 구축(Subtruction)의 한 계기로 설정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 것은, 구성은 그 출발부터 전 지구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노동기계가 지구적인 한, 전복적 구성 역시 전 지구적이어야 한다. 탈정보-탈생산-파열의 계기들의 지역적 연결로서의 디스코(Dysco)는 그것의 전 지구적 소통망 속에서 그것의 증폭된 구성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모든 국지적 투쟁들은 그것이 전사회적이고 전지구적인 차원의 공명 속에 놓여지지 않는 한 패배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사빠띠스따 봉기의 지금까지의 6년이 넘는 지속은 이 지구적 공명의 힘을 떠나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맺음말

이상에서 나는 오늘날 이른바 정보혁명을 가져오고 있는 (극소)전자혁명의 계급투쟁과의 상관성을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살펴보았다. 노동자의 경험과 지식의 소프트웨어적 명령 체계로의 이전은 전자기술의 생산에의 적용이 가져온 강력한 경향이다. 그것은 노동자 없는 생산을 가능케 하면서 대규모의 실업을 낳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 실업은 일시적이고 순환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다. 이렇게 하여 취업 노동자와 실업 노동자, 그리고 이 양자의 점이지대에 놓인 임시직 노동자로의 분할이 구조화된다. 이것이 오늘날 노동자 계급 내부의 경쟁과 적대를 상승시키면서 사회적 연대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음은 물론이다.
내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디지털 기반의 정보혁명에 의한 노동자 지식의 자본의 것으로의 분리 독립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아래로부터의 주체 형성을 불가능하게 할 만큼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성립 이후 자본의 일관된 전략의 최근의 국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디지털 기반의 생산 역시 ‘주체들의 적대적 생산’29)의 경향을 벗어날 수 없다. 기계나 소프트웨어는 그 자체만으로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며 자신의 가치를 생산물에 단순 이전시킬 뿐이다. 가치는 오직 인간 노동에 의해서만 생산된다. 이것은 인간 노동이 어떤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간의 사회적 관계가 노동 시간에 의한 교환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노동이 생산에서 제거되고 생산이 소프트웨어의 명령을 받는 자동기계의 운동으로 전일화된다면 자본주의는 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본주의는 어떠한 가치도 생산하지 못할 것이며 가치가 없는 한에서 잉여가치가 없고 그러면 이윤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산은 디지털화된 생산 영역 외부에 노동을 강도 높게 착취당하는 또 다른 영역의 창출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으며(지구의 일부에서의 정보화와 실업, 그리고 지구의 또 다른 일부에서의 땀 공장과 초과노동이 현 시대의 전형적 풍경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착취의 대상을 직접적 생산의 영역으로부터 유통과 소비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나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계급간 적대를 확대·심화시키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 적대를 극복할 주체의 형성을 다루면서 나는 구성적 분리를 그 방법으로 제기하고 계급내 적대의 약화, 최소화만이 그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그것이 현실에서 도출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직 원리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 아직 추상적인 주장을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구체적 투쟁들 속에서 검토하는 것은 추후의 과제로 남아 있다.
각주
1) 칼 맑스, 김수행 역, 좬자본론좭 제1권 하, 비봉출판사, 538쪽.
2) H. 마르쿠제, 박범신 역, 좬일차원적 인간좭, 한마음사, 1993, 14쪽.
3) 같은 책, 38쪽.
4) 칼 맑스, 같은 책, 475쪽.
5) 칼 맑스, 같은 책, 501쪽: “자본가는 노동에 대하여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하는 노동력의 가치만을 지불하므로, 자본가에 의한 기계 사용의 한계는 기계의 가치와 기계가 대신하는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차이에 의하여 설정된다. (…) 자본가 자신에게 있어서 상품의 생산비를 규정하며 경쟁의 강제를 통하여 그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오직 기계의 가격과 기계가 대체하는 노동력의 가격 사이의 차이뿐이다.”
6) 칼 맑스, 같은 책, 521쪽.
7). 칼 맑스, 같은 책, 537쪽.
8)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원영 역, 좬디오니소스의 노동 1좭, 갈무리, 1996, 63쪽.
9) V.I. 레닌, 이창휘 역, 좥좌익 유아성과 쁘띠 부르주아 심리좦, 좬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좭, 새길, 139쪽.
10) V.I. 레닌, 같은 책, 137-8쪽.
11) 같은 책, 152-3쪽 참조.
12) 안또니오 그람쉬, 이상훈 역, 좬옥중수고·1좭, 거름, 1986년, 328쪽.
13) V.I. 레닌, 좬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좭, 앎과함, 141-159쪽 참조.
14) 안또니오 네그리·펠릭스 가따리, 이원영 역, 좬자유의 새로운 공간좭, 갈무리, 1995년, 42쪽.
15) 질 들뢰즈, 김종호 역, 좬대담: 1972-1990좭, 솔, 1993년, 198-205쪽.
16) 질 들뢰즈, 같은 책, 200쪽.
17) J. Davis, T. Hirshcl & M. Stack (ed.), Cutting Edge(Verso, London·New York, 1997, pp.131-3).
18) 장 보드리야르, 하태환 역, 좬시뮬라시옹좭, 민음사, 1993년, 12쪽.
19) 제임스 페트라스, , 《월간 말》, 2000년 5월호, 104-111쪽.
20) 장 보드리야르, 같은 책, 61쪽.
21) 질 들뢰즈, 같은 책, 199쪽.
22) 안또니오 네그리, 장현준 역, 좬전복의 정치학좭, 세계일보사, 1991년, 191쪽 참조.
23) 안또니오 네그리, 같은 책, 247쪽(번역 일부 수정).
24) 안또니오 네그리, 같은 책, 251쪽 참조.
25) 안또니오 네그리, 같은 책, 같은 쪽(번역 일부 수정).
26) P. M., Bolo ‘Bolo(Semiotext(E), 1995, p.36)
27) 최근의 비지니스 모델 특허를 둘러싼 논란은 사회적 지식의 상품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전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오병일, <독점자본으로부터 ‘인터넷의 자유를 방어하라>, 《월간 말》 2000년 5월호, 146-151쪽 참조.
28) P.M., Ibid., p.60.
29) 안또니오 네그리·펠릭스 가따리, 이원영 옮김, 좬자유의 새로운 공간좭, 갈무리, 1995년, 53-58쪽 참조.

2001-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