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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21세기 싸이버사회의 전망/홍성욱

By 2001/03/13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진보네트워크센터

1세기 싸이버사회의 전망
(창작과 비평. 1999. 여름호; with 윤영민, 정민승의 반론과 나의 답변)

홍성욱

[1] 정보기술촵인터넷촵통신공간으로 특징지어지는 싸이버사회의 21세기 구도를 점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막강한 정보력과 기술력을 가진 마이크로쏘프트사의 빌 게이쯔(B. Gates)도 1년 후를 점치기 어려운 실정이니까. 발제자는 여기서 지난 몇년간의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21세기 싸이버사회에 대한 조심스러운 전망을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대략 5년 전과 지금의 싸이버세상을 간략히 비교하고, 싸이버사회의 특성을 분석한 다음 복합매체로서의 싸이버스페이스를 설명할 것이다.

[2] 1993년 당시 대학생이던 앤드리슨(M. Andressen)이 발명한 모자이크(Mosaic)라는 웹브라우저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주었다. 웹을 통한 정보전송은 1년 사이에 35만% 증가했으며, 모자이크는 1994년 넷스케이프(Netscape)로 탈바꿈해 새롭게 태어나면서 인터넷 대중화의 원년을 열었다. 사람들은 다투어 컴퓨터에 넷스케이프를 설치하고 인터넷을 항해하기 시작했고, 인터넷에 저장된 정보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미국의 대통령이 전자우편 계정을 만들고 백악관이 홈페이지를 개설한 것도, 빌 게이쯔가 회사를 인터넷 중심 회사로 재편하라는 지시를 시달한 것도 모두 이 무렵이었다. 이렇게 싸이버세상은 갑자기,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형태로 사람들에게 불쑥 다가왔다.

1994년에 열린 싸이버세상은 별천지였다. 무엇보다 국경이 없었다. 서울에 앉아서 미국촵영국촵브라질의 홈페이지들을 무한정 여행할 수 있었다. 당장 개별국가들의 제반 법률이 서로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론가들은 국민국가의 존재가 근대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임에 착안해서 싸이버세상의 국경 허물기는 모든 경계를 허무는 탈근대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또 싸이버세상에선 복제가 자유롭고 순간적이었다. 사진이나 텍스트는 마우스 버튼을 한번 클릭하면 곧바로 복사되었다. 영화도,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정보가 디지털화하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이를 보고 이론가들은 물질로 이루어진 실제 세상과 ‘비트'(bit)로 이루어진 싸이버세상의 차이를 강조했다. 책촵영화촵음악을 매개했던 종이촵필름촵테이프 등의 ‘물질’이 사라졌다고 감탄했다. 물질이 사라진 세상에서는 전혀 다른 법칙과 규범이 적용될 듯싶었다.

싸이버세상은 익명의 세상이었다. 어떤 나라에 개설된 홈페이지를 방문할 때도 비자가 필요없었다. 성인싸이트를 여행할 때도 아는 얼굴을 만날 걱정이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전세계 모든 공간에서 우리는 익명으로 정보를 취할 수 있었다. 이런 익명성은 재산촵지위촵학력촵나이촵성의 차이가 가져오는 권력의 차이를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전자우편을 통해 얘기할 경우 학생이 교수와 동등하게 토론을 한다든지, 나이 많은 사람이 좀더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보고가 쏟아졌다. 인터넷은 ‘위대한 평등자’로 간주되었다. 정보에 대한 접근이 자유롭고 무제한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컴퓨터 해방주의자’나 해커들에게 인터넷은 축복과 유토피아였다.

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싸이버세상이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왔다. 복사가 자유로운 싸이버세상은 기계식 복사기의 발명 이래 지적재산권에 대한 최고의 위협이었다. 미국저술가협회의 압력하에 미국정부는 1995년 디지털저작권에 대한 백서를 내놓았는데, 이는 인터넷에서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해 웹브라우저의 특성인 ‘램카피'(RAM Copying, 웹싸이트의 내용을 메모리에 임시로 복사해두는 것)를 불법으로 할 정도로 규제가 심한 것이었다. 디지털저작권에선 사용자의 ‘정당한 사용권’은 깡그리 무시되었다.

또다른 위협은 포르노그라피였다. 싸이버세상이 나이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은 아이들이 음란물에 마음대로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는 셈이었다. 실제 세상과 달리 싸이버세상에서는 강력한 규제를 제외하고는 이를 통제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국경이 없다는 것은 문제를 악화시켰다. 한국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포르노그라피가 미국에 개설된 웹싸이트를 통해 급속하게 흘러들어오듯이, 북미에서도 그곳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것들이 다른 나라의 웹싸이트를 통해 급속히 유입되었다. 1995년, 싸이버 포르노는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고, 1996년 미국 의회와 정부는 ‘통신예절법'(Communication Decency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인터넷상에 ‘음란하거나 야한’ 것을 올려서 ‘명백하게 불쾌한’ 감정을 유발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것이 대략 5년 전의 싸이버세상의 구도였다.

[3] 1999년의 싸이버세상은 5년 전과는 다른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무엇보다 싸이버세상이 ‘위대한 평등자’라는 얘기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신기루에 가까운 것임이 판명되었다. 사회적 계층에 따라 컴퓨터 사용과 인터넷 접근은 아직도 심한 불균형을 드러내고 있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 중에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소득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소득에 비해 더 높다는 통계치(북미의 경우 15% 정도 높음)를 감안하면, 인터넷이 세상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정보소유자’와 ‘정보결핍자’라는 서로 다른 계층으로 더욱 심화한다는 주장이 황당한 것만은 아니다. 여성들의 인터넷 사용이 많아졌지만, 뉴스그룹(각각 고유한 주제를 가진 인터넷상의 수만 개의 전자게시판 네트워크)의 대부분의 토론을 남성들의 거친 언어가 지배한다는 사실도 인터넷이 성차(性差)를 쉽게 해결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추어들과의 논쟁에 진력이 난 전문가들은 자기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제한적인 뉴스그룹을 이용하거나 회원제를 선호한다. 싸이버공동체는 상이한 사람들을 한데 섞기보다는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음으로써 형성된다는 것이 드러났다.

싸이버세상의 익명성도 허구에 가까운 것임이 밝혀졌다. 기업은 쿠키(cookies, 웹싸이트에서 만들어져서 사용자의 하드에 저장되는 아주 작은 파일로 패스워드나 사용자 고유번호 등의 정보를 담고 있다) 등을 이용해 자기 웹싸이트 방문자들의 신상정보를 파악하여 광고와 마케팅에 사용하며, 공짜 전자우편촵홈페이지 공간 등을 제공하고 다양한 신상정보를 수집한다. 실제 백화점에선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쇼핑하고 활보하는 것이 가능할지 몰라도, 인터넷 백화점에서는 오히려 수많은 전자지문(electronic fingerprint)이 남는다. 최근 인터폴은 한 유아 포르노그라피 조직을 기점으로 여기서 사진을 다운받은 전세계의 사람들 수십 명을 추적해서 구속하기도 했는데, 이는 인터넷이 이런 불법사진의 배포를 용이하게 만든 측면도 있지만 이런 행위를 추적하는 것도 더 쉽게 했음을 보여준다.

일련의 판결과 각종 조치들은 인터넷에서의 명백한 불법 복사행위를 상당히 위축시켰다. 작년 미국 의회와 정부는 온라인저작권을 강화하고 이를 방해하는 기술개발을 불법화하는 내용의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DMCA)을 통과시켰다. 국경 없는 인터넷상에서 생기는 분쟁을 다루는 변호사들이 대거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들은 국제분쟁의 판례를 이용해 인터넷상의 분쟁을 분석하고 있다. 인터넷상의 교역에 대한 세금과 관세에 대한 협정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통신예절법은 위헌으로 판결받고 사문화되었지만, 지난해 미국 의회와 정부는 다시 ‘온라인어린이보호법'(Child Online Protection Act)을 통과시켰다. 이것도 올해 초에 지방법원에 의해 위헌판결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포르노그라피를 규제하려는 법률적 시도는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한마디로 1999년의 싸이버세상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점점 닮아가는 중이다. 평등과 자유보다는 차이와 규제가 지배하고,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네티켓이 아닌 법률가들에 의해 초안된 법과 엔지니어들이 설치한 하드웨어촵쏘프트웨어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지금의 싸이버세상은 위계적이고 중층적이며, 또 수많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세상이다. 그렇다고 싸이버세상이 실제 세상을 판박이하듯 모사하는 것은 아니다. 싸이버세상에서 모든 소통방식을 규제하는 ‘TCP/IP 프로토콜'(인터넷상에서 서로 다른 컴퓨터간에 통신을 가능하게 해주는 규약)은 실제 세상에서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성희롱이나 모욕 같은 행위에 대한 처벌 법률은 실제 세상과 싸이버세상 모두에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싸이버살인(싸이버공동체에서 심하게 소란을 피우는 사람을 운영자가 제명하는 행위)이 중형을 받는 것은 아니다. 실제 세상에서 중요한 경계가 싸이버세상에서는 사라지고, 실제 세상에서 별것 아닌 것이 싸이버세상에서는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거시적으로 싸이버세상은 두 개의 상반된 경향이 서로 경쟁하는 전장으로 보인다. 인터넷은 전세계를 연결하지만(globalization), 실제 일어나는 현상은 국소적 네트워크가 자꾸 생기면서(localization) 이것이 다른 네트워크들과 만나는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 모두 정부가 관장하던 도메인네임(특정 네트워크의 주소) 등이 민영화되는 방향으로 가지만, 이것을 관장하는 민간기구는 범세계 인터넷의 새로운 ‘통치자’로 부상한다. 전세계 인터넷의 90% 이상이 영어로 만들어지면서 인터넷상에서 미국의 독점이 가속화되고 있지만, 미국도 ‘com’ ‘org’ ‘net’ 등 자신들이 독점해왔던 도메인의 특권적 위치를 포기하고 ‘us’도메인을 사용해야 한다는 논의가 최근 이를 관장하는 민간기구에 의해 시작되고 있다.

미시적으로 싸이버세상의 구도는 법과 기술에 의해 그려진다. 인터넷 포르노그라피의 문제는 통신예절법촵온라인어린이보호법 같은 법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싸이버패트롤(Cyber Patrol) 같은 여과프로그램, 패스워드, 성인 확인기술, 그리고 최근의 여러 신기술 혼용에 의해 그 해법이 찾아질 것이다.

베른협약이나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 같은 현재의 싸이버저작권법의 문제는 이런 법안이 디지털정보의 특성을 무시하고 단순히 전통적인 저작권 보호의 연장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법안들은 인터넷의 기술적 특성과 모순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수많은 저항에 부딪칠 것이고, 좀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완화될 것임에 분명하다. 무엇보다 저작권 로열티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겪게 될 가장 큰 장애는 불법복사가 아니라, 자신의 저작을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배포하길 마다않는 사람들과의 경쟁임을 직시해야 한다. 저작권 문제와 관련해 디지털 워터마크(digital watermark, 편지지에서 볼 수 있는 투명무늬처럼 디지털 문서나 파일에 정품임을 표시하는 인증), 디지털 서명, 암호화, 불법복제를 막고 추적하는 프로그램 같은 신기술이 널리 도입되고 사용될 것이다. 이 가운데 불법복제를 추적하는 스파이더프로그램 기술은 네티즌 개개인의 프라이버시라는 또다른 권리와 마찰을 일으킬 것이다.

프라이버시 문제는 개인촵기업촵정부가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마찰을 빚고 있다. 한 예로 인터넷을 통한 소비자 정보의 수집은 개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기업활동의 마찰을 일으킨다. 현재 미국의 싸이버 인권운동가들은 정부가 강력한 ‘온라인 프라이버시 보호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부와 기업은 이 문제를 P3P(Platform for Privacy Preferences)라는 표준을 만들어서 해결하길 선호한다. 이 표준은 개개인이 자신이 알려줄 수 있는 개인 신상정보의 수준을 정하고 이 수준치 이상을 요구하는 웹싸이트를 원천 차단하는 방법인데, 이 표준의 문제는 신상정보의 누출을 원치 않는 사람이 고급정보를 제공하는 웹싸이트에 접근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암호화 문제에선 개인과 기업이 이해를 같이한다. 미국의 경우 개인은 철저한 익명과 비밀을 원하는 통신에서 고난도 암호화를 자유롭게 사용하길 원하고 기업과 은행도 온라인송수금의 보호를 위해 고난도 암호화를 원하지만, 정부는 범죄조직과 테러리스트들 때문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암호화 수준을 40비트 정도로 묶어두길 원하고 있다. 이는 미국정부와 다른 나라 정부의 이해가 상충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4] 21세기 인터넷은 ‘교역의 매체’로 부상할 것이다. 인터넷이 교역매체로 사용되는 빈도와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보안과 저작권이 강화되고 해킹이 사회의 안정을 무너뜨리는 심각한 범죄로 취급될 것이다. 아직까지 인터넷 화폐에 대한 시험은 성공적이지 못하지만, 비슷한 시도가 계속될 것이다. 온라인사업의 경쟁은 계속 가속화할 것인데, 현실 경제에서 10년 동안 나타날 자리바꿈이 1, 2년 사이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 시장을 선점한 대기업은 자기 물건을 공짜로 뿌리며 시장을 뚫고 들어오는 벤처기업들과 경쟁해야 하고, 새로운 테크놀로지로 새 시장을 개척한 벤처기업들은 역시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막강한 대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한 제품을 가지고 시장을 뚫고 들어갈 때 벌써 업그레이드와 다음 제품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어야 할 정도로 기술개발의 속도는 빨라질 것이다.

인터넷은 앞으로 새로운 ‘표현의 매체’로 부상할 것이다. 지금까지 인터넷은 출판매체의 경쟁상대는 아니었다. 인터넷신문은 인쇄된 신문의 적수가 못 되었고, 온라인책은 종이책을 대체하지 못했다. 인터넷 홈페이지와 통신공간은 지금까지 학술지·신문·잡지 같은 ‘고급’ 표현매체에 자신의 생각이나 삶을 표현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이 손쉽게 하고 싶은 얘기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사람들이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은 자기만의 작은 인쇄기를 가지고 자신의 소식지를 찍어 가상의 독자에게 배포하는 것과 흡사했다. 앞으로 당분간 인터넷 그 자체가 책을 대체하지는 못할지라도, 지금의 인쇄된 책과 비슷한 전자책이 출판시장에 등장해서 급속하게 시장을 점유할 것이다. 학술지와 논문을 인터넷으로 보는 것은 가속도가 붙을 것이고, 점점 더 많은 학술지들은 오직 온라인에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전달’은 앞으로 더욱 중요하게 부상할 것이다. 인터넷은 다채널 케이블TV와 함께 1990년대 초엽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제시한 ‘정보초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의 모델이었다. 케이블TV와 달리 인터넷은 정보의 쌍방향 소통과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특성이 있다. 미국정부는 초고속 광케이블이 미국의 모든 집과 학교를 연결하고, 정치촵사회 이슈에 대한 심도깊은 해설과 계몽촵교육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미래를 그린 것이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계몽된 시민은 ‘싸이버 민주주의’의 주체였다. 정보고속도로는 시민과 정부를 직접 만나게 함으로써 싸이버 민주주의의 젖줄로 기능했다. 물론 기업은 이 네트워크를 상거래와 제품의 광고를 위해 이용할 수 있었고, 대신 이 망의 건설을 담당해야 했다. 그 궁극적 목적은 싸이버 민주주의와 온라인 상거래였다.

정보고속도로나 싸이버 민주주의라는 ‘거대개념’은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정보고속도로는 정보의 전달에만 촛점을 맞추었지 컴퓨터통신을 통한 사람들 사이의 만남과 공동체의 형성은 무시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를 통해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정보고속도로라는 메타포 대신에 ‘가상공동체’ ‘전자아고라(agora)’ ‘전자마을’ 등의 공동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길 선호했다. 인터넷은 거대한 전지구적 공동체였고, 그 속에 다양한 온라인모임촵토론그룹촵게임그룹촵메일링리스트(mailing list)들이 수많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북미의 경우 온라인모임은 환경조직촵페미니스트조직촵NGO들과 함께 지난 20년간 증가 추세에 있는 몇 안되는 사회조직 중 하나다. 정당, 노조, 교회, 학부모-교사연합(PTA), 자치단체, 자원봉사, 이웃과의 만남 같은 ‘전통적’인 조직과 모임은 모두 급격한 감소 추세다.

이런 가상공동체들이 사회촵정치적인 시민운동단체의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은 무척 중요한 문제다. 인터넷을 통한 사회촵정치적 운동이 쉽지 않음은 지난 몇년간 지적되곤 했다. 인터넷이 사람들을 쉽게 연결하긴 하지만, 서로 만나서 시위에 참여하는 것 같은 그런 ‘연대감’을 제공하지는 않고, 운동에서 ‘빠져나가기’가 너무 쉽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싸이버세상에서 효과적인 운동형태가 있고, 이를 발견하고 조직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예를 들어, 네티즌들은 싸이버세상과 관련된 이슈에 무척 민감하다. 1996년 미국에서 통신예절법이 제정되었을 때 전세계 네티즌이 홈페이지에 파란 리본을 달고 홈페이지를 검은 색으로 칠함으로써 이에 항의했던 경우는 이런 운동의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에서 전자주민카드 반대, 마이크로쏘프트의 ‘한글’ 인수 반대도 통신공간과 인터넷을 통해 불붙듯이 번져나간 운동이다. 두번째로 인터넷은 반론권을 제공하는 데 인색한 기존 매체에 대한 비판에 효과적이다. 한국의 경우 텔레비전이나 『조선일보』 같은 신문에 대한 비판이 통신공간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디지털신문 『딴지일보』 등 기존 신문에 대한 패러디 매체도 인터넷을 매개로 엄청난 독자를 끌 수 있었다. 세번째로는 지역적으로 흩어져 있는 상이한 집단들이 공통된 이슈를 중심으로 모여서 정보를 공유하고 비판의 강도를 높이는 운동이 있다. 캐나다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전개되는 ‘다자간투자협정'(MAI)에 대한 반대운동도 인터넷을 매체로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터넷상의 운동은 기존의 매체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기 힘든 문제에 효과적이다. 기성 언론은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는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럴 경우 잘 홍보된 인터넷 홈페이지는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이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기능을 한다. 미국의 과학자들이 파푸아뉴기니 원주민들의 혈청을 채취해서 특허를 낸 사건을 지속적으로 비판한 국제농업발전재단(RAFI)은 미국의 의학과 생물학을 대표하는 막강한 조직, 미국보건국(NIH)과의 싸움에서 인터넷을 통한 지속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결국 특허를 포기하게끔 만들었다.

싸이버세상에서의 사회촵정치적 운동의 법칙 역시 온라인사업의 법칙과 비슷하다. 정당이나 사회단체들이 홈페이지를 만들어놓고 업데이트를 안하는 것은 이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실망만 안겨줄 뿐이다. 지속적으로 새로운 내용을 채워야 하고, 운동을 위해 만들어진 웹싸이트는 마치 그물망의 눈처럼 많은 사람들이 거쳐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네트워크혁명의 시기에 넘쳐나는 것은 정보요, 부족한 것은 관심이라는 경구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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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1

싸이버스페이스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윤영민(尹英民)
한양대 교수, 정보사회학

싸이버스페이스에 관해 유행처럼 떠도는 탈근대론적 해석에 대한 홍성욱 교수의 비판은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글에서는 싸이버스페이스의 정치적 성격과 관련해 발제자가 다소 소홀하게 다루고 있는 몇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발제자는 싸이버스페이스가 초래하는 몰입(immersion)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먼저 싸이버스페이스가 정신공간(mind space)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우리가 소설을 읽거나 비디오필름을 감상할 때도 일종의 정신공간이 형성된다. 소설의 독자들은 상상을 통해 소설 속으로 빨려들어가, 소설 속의 사건들이 분명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과 함께 분노하고 슬퍼한다. 싸이버스페이스도 이러한 정신활동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는 몸과 분리된 정신만이 진입 가능하다. 바로 이 때문에 싸이버스페이스에서 네티즌들은 엄청난 유연성과 공간초월성을 갖게 된다. 철학 싸이트에서 포르노 싸이트로, 다시 환경운동 싸이트로, 한국에서 미국촵영국 싸이트로 마우스 클릭의 속도로 이동하면서도 네티즌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거의 경험하지 않는다.

싸이버스페이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상호작용이 가능한 정신공간이다. 싸이버스페이스는 죽은 정보와 정신이 만나는 곳이 아니라 살아 있는 정신들이 만나는 공간이다. 바로 정신의 상호작용이라는 데서 ‘몰입’이라는 현상이 발생한다. 몰입을 가상현실(virtual reality) 테크놀로지만의 특징으로 보는 것은 오해이다. 몰입은 특정한 테크놀로지에 고유한 정신적 효과가 아니라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정신의 상호작용이 수반하는 효과이다. 인터페이스가 문자에서 그림으로, 다시 가상현실로 발전함에 따라 사용자가 느끼는 현실감이 얼마간 높아지겠지만 몰입 수준은 얼마나 달라질지 의문이다. 가상현실은 인간의 시각, 청각, 촉각까지 사용한다는 점에서 사용자의 몰입 정도를 다소 높이겠지만, 사실 문자만 가지고서도 사용자들은 매우 높은 수준의 몰입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지금의 인터넷을 가상공간(virtual space)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다.

몰입의 대표적인 형태인 인터넷중독은 벌써 세계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인터넷 까페는 청소년들의 밤잠을 빼앗아가고, 심지어는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청소년뿐 아니라 적지 않은 성인 네티즌들도 인터넷에 접속되어 있는 동안에만 삶의 희열과 목표를 가지며,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하게 되면 심각한 무력감에 빠지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

둘째, 발제자는 싸이버스페이스가 자유를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드러내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싸이버스페이스는 몰입뿐 아니라 생활의 편리함도 가져온다. 전자우편촵온라인쇼핑촵교육촵예약촵토론촵채팅 등은 네티즌들로 하여금 손쉽게 생활의 편의를 얻게 해준다. 그러나 싸이버스페이스와 접속하고 있는 동안 네티즌의 신체는 네트워크의 일부가 된다. 컴퓨터와 키보드가 사용자 신체의 일부가 된다는 맥루언(M. McLuhan)적 해석은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

일단 컴퓨터 네트워크에 접속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싸이버네틱스의 세계–─싸이버스페이스–─에 들어가게 된다. 싸이버스페이스는 에너지가 아니라 정보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싸이버네틱스의 특징은 에너지는 거의 없고 정보가 풍부한 부분이 에너지는 많고 정보가 적은 부분을 통제한다는 점이다. 인간이나 동물에 있어 두뇌가 신경계를 통해 신체 전부를 통제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싸이버스페이스와 접속되면서 네티즌 개인의 두뇌는 싸이버스페이스라는 전지구적 두뇌와 신경계(the global brain and neural system)의 일부가 된다.

싸이버스페이스에서 배제된 우리 몸은–─정보로 완전히 전환될 수 있는 날까지는–─거추장스럽고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 세계에 접속되면 우리는 싸이버스페이스를 지배하는 테크놀로지, 상업적 혹은 정치적 동기에 의해 통치된다. 그것은 미셸 푸꼬가 말하는 통치성(govern-mentality)이 완벽하게 구현되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네티즌들이 정보와 편의, 위로와 공감 등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싸이버스페이스의 일부가 되고 자유를 댓가로 지불하는 점에서 말이다.

셋째, 발제자는 네티즌들이 싸이버스페이스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갖고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지 않는다면 인류가 그동안 피와 땀을 바쳐 성취한 자유와 평등이 크게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점도 확실히 강조하지 않고 있다.

미래사회의 빅브라더(Big Brother)는 쿠데타나 혁명을 통해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자발적인 수용에 의해 총성 한 방 울리지 않고 슬며시 권좌에 오르게 될 것이다. 네티즌들이 인터넷 채팅과 스타크래프트, 심지어 싸이버섹스에 몰입하고, 싸이버스페이스가 가져다주는 온갖 편의에 젖어 있는 동안 싸이버통치는 조용히 구축된다.

이미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완벽한 자유의 환상을 가진 채–─싸이버스페이스에 몰입하면서 신체적 부자유를 자청하고 있다. 싸이버스페이스와 접속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차 허물어져가는 그들의 육체가 그것을 입증한다. 육체와의 조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단절을 통해서 획득되는 정신적 자유는 참다운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육체의 상실, 나아가 죽음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병적인 자유일 뿐이다. 싸이버펑크 소설의 대표작 『뉴로맨서』(Neuromancer)에서 주인공 케이스가 관처럼 생긴 통 안에 누워 싸이버스페이스와 접속하는 모습은 이러한 병적 자유에 대한 탁월한 은유이다. 싸이버스페이스의 탐닉은 신체적 구속만이 아니라 사회적촵정치적 속박까지 초래할 것이다. 네티즌들의 부자유를 통해 경제적 혹은 정치적으로 커다란 이득을 보는 무리들이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은 인류 역사상 한번도 집단적인 노력 없이 그냥 주어진 적이 없다. 21세기라고 특별히 달라질 이유가 있겠는가? 싸이버스페이스는 시민의 힘을 강화할 수 있는 여러가지 계기를 가져오고 있지만 동시에 시민의 힘을 해체할 가능성도 가져오고 있다. 시민권력은 앞선 어느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직 시민들의 주체적 인식과 노력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또한 그때만이 싸이버스페이스는 야만이 아니라 문명의 일부로 정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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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2

가상공동체 운동의 현실성

정민승(鄭珉承)
가톨릭대 강사, 사회교육학

과거를 되돌아보며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조심스럽게 예측하는 글은 읽기가 좋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점을 자상히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홍성욱 교수의 발제문도 그렇다. 그는 처음 싸이버세상이 열리던 때를 되짚고, 그때와는 달라진 현실의 모습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조심스럽게 점쳐보고 있다. 그의 글을 통해 우리는 싸이버세상에 대한 우리의 체험을 떠올릴 수 있고, 현재의 문제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글은 편안하다. 그러나 막상 ‘토론’할 입장에서 읽어보면, 심정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토론이 유발하는 일종의 ‘시비걸기’의 자세는 사소한 흠도 문젯거리로 만들기 때문이다.

몇가지, 글을 읽으면서 느낀 ‘흠’을 이야기해보자.

우선 논의의 흐름이 바뀌는 데서 오는 혼란이 있다. 발제자는 과거와 "지금의 싸이버세상을 간략히 비교하고, 싸이버사회의 특성을 분석한 다음 복합매체로서의 싸이버스페이스를 설명"하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세상’과 ‘사회’와 ‘스페이스’는 동격으로 처리되고 있다. 싸이버공간에 대한 통일된 용어조차 없는 상황이므로 이러한 용어간의 ‘넘나들기’는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러한 구도에 따라 논리의 전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상황의 진단이랄 수 있는 3절에서는 싸이버’사회’의 특성으로서 인터넷을 사용하는 현실 맥락이, 그리고 주로 미래에 관해 예측하는 4절에서는 인터넷의 매체적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다. 이 두 가지 내용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이 없지만, 맥락상으로 싸이버’사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 ‘매체적’ 가능성을 도출하고 있는 셈이다. 과연 범주가 다른 두 영역이 분석-예측이라는 짝을 이룰 수 있는 것일까? 과거와 현재에서 제시한 싸이버사회 분석과는 다른 차원의 예측이 불쑥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전망’에 대한 설명에도 약간의 ‘흠’이 발견된다. 발제자는 인터넷의 다양한 발달경향을 논하지만, 그런 경향들간의 연관과 위계를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인터넷은 "교역의 매체로 부상"할 것이고 "새로운 표현의 매체"가 될 수도 있으며 "정보의 전달은 더욱 중요하게 부상"할 것이다. 이런 현상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들이며, 더욱 가속화하리라는 추측은 충분한 개연성을 가진다. 그러나 전망은 현상에 대한 나열을 넘어서는 체계적 파악을 요구한다. 다양한 현상들을 틀짓고 자리매김해서 어떤 경향이 주도적인지, 그리고 그 안에 잠복한 가능성과 위험은 무엇인지 ‘전망’이 말해주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그러나 발제자의 ‘전망’은 어느새 인터넷의 ‘매체’로 환원되어 ‘교역’과 ‘표현’과 ‘정보전달’ 속으로 녹아들고 있다.

아마도 발제자가 최종적으로 싸이버세상에 기대하는 바는, 이러한 ‘매체’로서의 전망에 이어 제시하는 "가상공동체를 통한 운동"일 것이다. 그가 지적한 것처럼, 싸이버세상에서는 공동체가 존재하며, 이 공동체는 증가 추세에 있는 몇 안되는 조직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에서 사회운동의 가능성이 발견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의 인격적 결합인 공동체, 사회에 대한 적극적 관여로서의 사회운동이 싸이버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또하나의 현실적 공간 속에서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싹트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제자는 가상공동체와 사회운동이 매우 중요하다고 언급하면서도, 그 의미는 오히려 축소한다. 그는 "정보고속도로는 정보의 전달에만 촛점을 맞추었지 컴퓨터통신을 통한 사람들 사이의 만남과 공동체 형성은 무시"했다면서 "거대개념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정보고속도로 같은 거대개념으로는 사람들의 삶이 포착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그가 운동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방식은 여전히 ‘거시적’이며, 또한 ‘도구적’이다. 그가 제시하는 싸이버운동의 가능성, 즉 싸이버는 "기존 매체에 대한 비판"과 "상이한 집단들이 공통된 이슈"로 "오랫동안 운동을 해나가"는 데 효과적이라는 논의는 인터넷의 매체적 특성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으며, 여전히 ‘효과’의 담론 속에 갇혀 있다. 인터넷은 사람들의 삶의 양상으로 전환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토론자는 정보고속도로라는 메타포 대신에 가상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사람’을 개념망 안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매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효과적 수단이 아니라 삶의 장으로 싸이버세상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전자적 행위의 사회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이야기하는 바가 바로 사회현실이 된다’는 인식 속에서, 민주주의는 가능성에 머무르지 않으며 싸이버는 우리 삶의 일부로 파악될 수 있다. 싸이버에서도 태도와 행위, 실천과 비판의 영역이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싸이버’공동체’는 우리 개인의 삶에, 나아가 사회적인 차원에 특정한 의미를 던져준다. 우선, 싸이버공동체의 활동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가진다. 싸이버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무엇에 관해서나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가상공동체 안에서 말하는 경우, 사람들은 어느정도의 책임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성원됨’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다른 성원에 대하여 동료의식을 가지며, 따라서 타인의 말을 좀더 경청하고, ‘알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말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현실공간의 ‘길거리’와 ‘가정’이 다르듯이, 가상공간에서도 ‘일반 통신공간’과 ‘가상공동체공간’은 전혀 다른 공간으로 창출되는 것이다. 동시에 통신을 하는 그 순간은 익명의 대상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타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고 좀더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며, 눈에 보이는 사회적 단서가 없는 까닭에 좀더 충심으로 조언과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익명성’은 사람들의 소통방식에 영향을 끼치는, 여전히 작동하는 현실인 것이다.

가상공동체는 또한 개인을 최대한 배려하는 문화를 전제로 한다. 공동체의 집단적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개인의 생각을 쉽게 침탈하지는 않는다. 싸이버공간은 개인들의 메씨지에 의해 형성되는 공간이고, 공중(公衆)에 열린 메씨지는 최소한의 합리성을 보장할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충분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면, 사람들은 가상공동체에서의 논의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자신의 시각으로 다듬으며, 이런 과정에서 자신이나 공동체가 부딪치는 문제를 현실공간에서 고려하게 된다. 이런 ‘상호 배움’의 과정 속에서 싸이버에서의 운동은 단순히 ‘가상’에 그치지 않고, 참여자와 밀착하여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컴퓨터통신의 물리적·매체적 특성으로 인하여 현실공간으로의 전환이 용이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공동체 속에서 다져진 자신의 소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운동의 뿌리는 오히려 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싸이버사회는 가상공동체라는, ‘개개인의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경유하여 시민사회의 한 영역을 차지하는 공간’의 창출을 통해 시장논리를 벗어날 수 있는 잠재력을 확보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얼마나 자유롭고 진지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이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발제자의 답변

두 토론자의 지적에 대해서 공감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물론 공감하고 동의하는 부분이 더 많지만, 여기서는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을 위주로 답변을 진행하고자 한다.

먼저 인터넷 몰입과 중독에 대한 윤영민 교수의 지적에 공감하지만, 발제자 자신은 인터넷중독에 대해 조금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밝히고 싶다. 일군의 심리학자들은 인터넷중독을 도박중독과 비슷하다고 간주하는데,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인터넷에서의 경험이 실제 세상에서의 자아 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본다. 아마 싸이버스페이스에서 사람들의 경험은 제각각일 것이다. 발제자가 우려하는 것은 인터넷중독이라는 새로운 ‘비정상’의 범주가 생기면, 싸이버세상에 탐닉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을 일괄적으로 병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싸이버스페이스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고, 싸이버스페이스에서의 자유가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깊이 동의한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내용이나 방법에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발제문에서 보이고자 한 것은 "싸이버스페이스와 접속되면서 네티즌 개인의 두뇌는 싸이버스페이스라는 전지구적 두뇌와 신경계의 일부가 된다"든지, 싸이버스페이스에서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육체의 상실, 나아가 죽음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병적인 자유"라는 싸이버담론에 대한 비판적 대안이었다. 발제자는 최근에 싸이버스페이스가 법과 기술(그리고 시장의 힘)에 의해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기 때문에, 싸이버에서의 자유와 권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법과 기술에 대한 현실적인 분석과 대안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려 했던 것이다.

정민승씨와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은 싸이버공동체의 성격과 그것의 사회촵정치운동이다. 여기서 자세한 얘기를 하긴 어렵지만 발제자는 싸이버공동체를 "책임성" "동료의식" "최대한의 배려"만이 충만한 이상적인 공동체로 보지 않으며, 싸이버공간을 매개로 한 정치사회운동도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이 사람들을 쉽게 연결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서로 만나서 시위에 참여할 때 형성되는 연대감을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한가지 이유이며, 싸이버공동체에 참여하는 것도 쉽지만 빠져나가는 것도 쉽다는 것도 또다른 이유이다. 효과적인 운동은 사람들 사이의 친분을 통한 의식의 공유와 서로의 관계에 대한 장기적 전망을 필요로 하나, 싸이버공동체는 이런 친분과 안정적인 관계가 필요없다는 특성을 가진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온라인공동체는 구성원 개개인의 취향과 지향점이 합쳐져서 공동체의 방향을 결정하며, 이렇게 느슨하게 구성된 공동체는 개개인의 취향이나 지향점과 거리가 있는 이념을 위해 재조직되기 어렵다. 싸이버에서의 정치사회운동이 중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발제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싸이버공동체와 싸이버공간의 특성을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장점으로 활용할 때 운동이 성공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2001-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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