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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사이버스페이스는 어떤 공간인가? : 인터넷과 가상성/Mark Nunes

By 2000/08/06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진보네트워크센터

이글은 이광석씨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http://soback.kornet.net/~leeks2k/space1.htm

사이버스페이스는 어떤 공간인가? : 인터넷과 가상성

Mark Nunes(이은미 옮김)

AT&T의 광고를 비롯해서 백악관의 정책발표를 통해 보더라도 1990년대 중반, 미국이 변화된 세계를 준비해왔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서 컴퓨터 스크린 위에 존재하는 세상이다. 1994년 처음 6개월동안에 인터넷의 전세계적인 네트워크에 연결된 컴퓨터사용자의 수가 무려 백만이 증가해서 전체 3,212,000명의 호스트가 존재하게 되었다.이러한 급성장에 맞춰, 미디어는 진보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내건 미국의 낡은 아이콘을 새로이 닦았다. 다름아닌 고속도로였다. 곧, 모든 미국인들은 개방된 도로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새로운 도로 사업은 인터넷의 지도가 지구를 계속해서 에워쌀 때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근의 현황으로는 인터넷이 지구를 연결하는 것 이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은 우리가 살고 있는 하나의 은유적인 세상을 창출한다. 또한 새롭고 가능한 세계에 대한 약속이 환상적이면 환상적일수록, ‘그 세계’의 개념은 더욱 불확실해진다.

기술적인 인공물뿐만 아니라 대중적 이미지로서의 인터넷은 ‘그 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사이트와 포스트모더니티 입장에서 그러한 시스템의 위치를 제공한다. 인터넷에 대한 지리학적인 은유는 문자그대로 (아마도 실제로) 여행, 거리와 속도를 허락하는 ‘정보 초고속도로’밑의 위상적인 ‘배경’을 제공하면서 하나의 장소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엄격하게 ‘사이버스페이스’는 더 이상 윌리업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 말하는 공상적 ‘매트릭스’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것은 사이버네틱의 공간으로서 사이버공간은 컴퓨터 네트워크라는 망의 개념으로서 일반적으로 말해진다.

인터넷은 그 자체의 세계를 아주 빨리 창출해낸다. 많은 이론가들은 이미 그 세계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우, 이 주제에 대해 종말의 순간 또는 사이버네틱 유토피아의 출현이라는 극단적인 입장으로 접근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하나의 사이버네틱 지형으로서의 인터넷의 출현은 은유와 실제간의 상징적 거리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포괄적이고 알아낼수 있는 세계의 사실적인 시뮬레이션을 보여주면서 하이퍼리얼에 대한 ‘리얼’을 포기한다. 보드리야르, 폴 브릴리오, 장-프랑수아 료따르 및 다른 사람들은 ‘텔레마틱스’를 포스트모던을 위한 시발점의 제공으로 여긴다. 포스트모던의 세계에서는 계몽주의의 ‘진보’로써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 그 세계의 모델은 그 세계 자체가 된다. 보드리야르나 료따르의 주장에 반대하는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질 들뢰즈나 펠릭스 가따리와 같은 사람은 사이버스페이스를 계몽주의의 가정에 대한 탈피나 변형을 위한 가능성의 조건으로 본다. 이러한 접근은 포스트모던 문화에서 ‘현실적인 것’에 대한 현대적 도전을 전개한다. 반면에 인터넷이 폐쇄되는 것을 이론으로써 어떻게 유용하게 막을 수 있는지를 동시에 제공한다. 양쪽의 접근방식은 인터넷을 가능한 세계로 인정하면서 지금의 세계에 대한 도전 또는 대체로 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간으로서의 ‘사이버스페이스’는 포스트모던한 ‘세계’의 유혹과 제거의 예를 보여준다.

사이버스페이스 여행

한때, 고속도로가 미국을 변화시켰듯이, ‘정보 초고속도로’는 현실계에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미국인들의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이미지를 제공한다. 비록 그 표현은 제안된 NII를 위한 용어로서 백악관에서 기원했지만, ‘정보 초고속도로’는 이미 존재하는 전세계적인 인터넷의 네트워크를 위한 아호로서 대중적인 용어가 되었다. 지나치게 이용된 그 표현은 인프라스트럭쳐의 기계를 연결하는 실질적인 네트워크 구조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고속도로의 은유는 미디어 이미지로서 존속하는 것으로 이 기술에 의해 창출된 세계를 위한 개념적 모델로 기능한다. 사람이 전화를 들었다고 해서 다른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컴퓨터로 같은 전화선을 연결하면 공간적 또는 동적인 메타포가 확산되기 시작한다. ‘정보 초고속도로’는 보다 미묘한 은유적 표현에 의존한다. -속도, 움직임 그리고 방향이 가능한 가상적 지형학. 폴 브릴리오가 제안했듯이, 컴퓨터는 ‘최후의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것은 모든 지형학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1989:108-9) 인터넷의 세계는 시뮬레이트된 영역으로 기능하고 우리는 컴퓨터/모뎀 로드스터, 윈드스크린을 대체하는 컴퓨터 스크린을 가로질러 왔다갔다 한다. 모션, 스피드 그리고 여행은 ‘현실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반면, 기술적 시뮬레이션으로서의 힘을 얻는다. 바르트를 이어 보드리야르는 자동차가 운전자/관람자가 물리적 세계보다는 이미지와의 상호작용을 통한 시각적 경험함으로써 동작을 얼마나 쉽게 변형시키는가를 지적한다. (보드리야르, 1988: 13) 이러한 물리적 세계가 자동차의 앞유리창’위’에서 이미지로 변형해가는 그러한 은유와는 달리 ‘사이버스페이스’는 ‘스크린을 넘어’ 그 자체의 시뮬레이션이 되면서 현실과 은유를 날려버린다. 현실은 더 이상 알베르티의 창문에 대한 이러한 포스트모던적인 해석의 지시대상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가상적 지형학은 스크린의 현실성이 된다.

이러한 모델에서 컴퓨터는 시뮬레이트화된 세계를 여행하는 하이퍼리얼한 수단이 된다. 수많은 인터넷 ‘가이드’ 책은 항해가와 탐험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면서 이러한 지리학적 은유를 사용한다. 소프트웨어 회사는 데스크탑을 증가시키려고 ‘지리학적 인터페이스’를 발전시키면서 메타포를 이용한다. 사용자들은 ‘빌딩으로 표현된 사이트의 정보를 보기 위해 [가상화된 사무실의]창문을 뛰어넘을 수가 있다.'(피셔 1995; F 9) 이렇듯 끝없이 반복되는 ‘사이버스페이스 여행’의 이미지를 엄격하게 근사한 마케팅 전략으로 취급하기 보다는 현대문화에서 이러한 개념적 모델은 명확한 목적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권력의 형태를 시뮬레이트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에게 있어, 현실에서부터 하이퍼리얼까지권력의 전이는 세계를 정복하려는 근대의 동인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리학은 잠재가능한 지점으로 내파한다.

이미 여행은 여기저기에서 시작되었다. 분산,탈출 그리고 이동을 향한 막연한 욕망은 비-운동이나 절대적 이동 및 잠재적 편재이기를 멈춘 이동성안에서 고정된 지점에 모여있다. 그러한 이동성은 노력없이도 끊임없이 공간을 가로지르면서도 자체의 공간을 떠난다. (보드리야르, 1988:39)

‘사이버여행’의 이미지는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데, 왜냐하면 컴퓨터 스크린 위/너머의 은유적 세계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 세계란 더 이상 그 세계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 ‘지구’이다. 그 이유는 그 자체가 그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경제, 정치 그리고 문화적 통제를 위한 이상적인 세계를 제공해준다. 그 세계는 항상 정복되었거나 식민지화되었다. 가상적이고 잠재력이 있는 공간은 현실의 역동적인 공간을 대체하기도 하고 ‘현실’의 잠재력을 은유적으로 가상적인 ‘역학’에너지로 변형시키기도 한다. 아서 크로커와 미첼 웨인스타인에 의하면, 권력에 있어서의 이러한 이동현상은 자체의 궤도밖으로 이탈한 자본주의의 한 형태를 의미한다. 정신이나 경제적 에너지에 대한 계몽주의적 해방으로 보여지는 것은 실제로 가상적인 순수 순환의 세계에 대한 육체의 포기가 된다. ‘권위부여’는 크로커나 웨인스타인에게 있어 가상성으로의 자유로운 매력의 일종이다. (1994:10-11) 강제적인 온라인 세계는 ‘스크린 너머에 있는 불가능한 세계로 내파되면서 그 네트에 사로잡힌 개인을 포함한 독점력이 강한 개인주의의 속임 그림이다.'(1994:9)가상계급은 교환과 유통의 ‘유동적인 광분’으로 자신을 굴복시키고 ‘범-자본주의’는 노동과 육체를 ‘현실’로부터 전적으로 해방시킨다. (1994:87-9)달리말해서, 인간은 이제 가상화를 위해(그리고 그것을 통해) 살게된다. 브릴리오는 The Vision Machine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기술관료적인 ‘진보’는 인간의 육체가 인간을 위해 기능하는 도구가 아닌 도구기능을 위해 작동하게 되는 시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4:72-6) 인간과 미디어-확장에 관한 맥루한의 진술은 역전되어왔다. 이제 인간이 미디어를 확장시킨다.

이러한 시각으로 볼 때 사이버네틱 ‘공간’은 그 세계를 증가시키지 않는다는 개념적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그 공간은 완전히 현실화되고 완벽히 포위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위해 그 세계를 포기한다. 그러한 것은 바로 투명성과 즉시성의 세계이다. 거리를 겨냥하는 기술은 점차 거리의 개념적 가능성을 파괴하는 가상세계를 창출한다. 육체 균형과 가상 여행이라는 불안정한 순간에, ‘항해자’는 공간과 시간을 녹여버리는 즉시성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시-공의 콘텍스트로부터 반복적으로 주체를 납치하는 것이다. (브릴리오, 1991:101) 이러한 비판적 견해로부터, 인터넷은 공간을 ‘거리, 공간 그리고 분리라는 모든 개념을 내파시키는 하나의 ‘초월적 잠재력을 지닌 지점’으로 붕괴시켜버린다. ‘네트 서핑’에 관한 많은 광고에서 그려진 것처럼, 이러한 움직임이 해방처럼 보일 수 있는 반면에, 브릴리오의 시각에서는 그 반대가 참이다. 즉, 주체성은 subjecting-to가 된다. 니체가 말한 ‘권력에 대한 의지’는 크로커와 웨인스타인에게 와서 ‘가상성에 대한 의지’로 변형된다. 다시말해 ‘기술적으로 중개되고 구체화된 상상력에 자신을 굴복시키려는 의지’인 것이다. (1994:41) 이처럼 부상하는 사이버스페이스가 점점 더 현실적이 될 수록, 전 지구를 물리적으로 주항할 능력은 전자적으로 거리를 여행하는 능력에 비해 가치가 덜해진다.

따라서 인터넷은 현실-생활의 노드/컴퓨터, 전멸적인 공간의 접속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터넷은 공간적 거리의 물리적 세계를 대체할 가상화된 자체의 세계를 창출하고 유지한다. 따라서 기업들이 네트상의 ‘열린 가게’에 몰려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컴퓨터 네트워크는 더 이상 이익을 남기기 위한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사이트’를 만듦으로써 사업을 행하는 하나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국제적 기업-일반적으로 국제주의-은 사라지고, 국제적 네트워크의 가상화된 세계에 포함된다. 보드리야르는 인터넷이 전체의 접속이라는 꿈에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리고 그것이 일단 가상화되면 현실 공간 보다도 더 중요해지고 그러한 은유적 사이버스페이스가 초현실적인 것이 되는 종말의 순간을 상상하게 된다.

인간의 행동이 작동하고 있는 스크린이나 터미널에 초점이 맞춰지자마자, 그 나머지는 이미 버려지고 비난받은 광대하고 무용한 육체로 보여진다. 현실 그 자체는 육중하고 쓸 데 없는 육체의 모습인 것이다. (1988:18)

더 이상 기술은 세계를 확장시키지 않는다. 이제 기술은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인’ 시뮬레이션으로 세계를 대체한다.

가상 지형학

‘현실적인’ 물질의 존재에서 인터넷은 여러개의 전화선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호스트기계의 복잡하고 풍부한 네트워크로 구성된다. 현실공간을 가로지르는 정교한 다리, 점프 및 연결의 시스템과는 반대로, 호스트 ‘사이트’와 사용자의 주소라는 지리학적 형태는 사용자들에게 보다 단순한 가상영역을 창출해준다. 결국 그 여행은 이 사이트에서 저 사이트로의 접속을 추적하는 것이된다. 일단 이미-존재하는 접속코드로 가야만 가상지형이 존재하게 된다. 다른말로하자면, 사이버스페이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지구로 기능하는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1940년대에 최초의 항해하는 지구의 개발을 총체성으로서의 ‘세계’라는 개념적 모델 뿐 아니라, ‘진정한 지도란 없다’라는 현실화와 연결시킨다. 지도만들기의 다양한 역사적 순간을 봤을 때, 단순히 ‘변증법적 진보’만이 있다는 것이다.(1991 :52) 지도나 지구에 대한 근대적 개념 또는 세계의 재현불가능한 총체성과의 관계와는 대조적으로, 포스트모던한 지도로서의 인터넷은 세계를 초월하면서 그 자체로 총체성이 된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라 과정’ 으로서 이 점을 설명한다. 지구/모델로써 세계를 정의할 때, (1983:2) 그것은 이미 가까이왔다. Borges의 지도 이야기는 너무나 정확해서 땅을 완전히 뒤덮고 있고 그것은 보드리야르에게 땅의 현실성에 대한 시뮬레이션의 알레고리를 제공하게된다.

지금부터 지역을 앞서는 것은 지도이다. … 만약 그 우화를 오늘날 다시 말할수 있다면, 지역을 분 리하게 된 것이 바로 지도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지도상의 조각이 사라져가는 지역이 될 것이 다.

가상지형으로서의 인터넷은 그 우화에 대한 보드리야르식의 재생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모사의 세계도 세계의 재생산도 아니다. 그것은 재생산된 세계의 지형/모델이다. 이러한 접속의 잠재성은 가상세계에 앞서는 것으로 이런 영향과 결과를 의미한다. 이러한 지형에 관한 ‘지도’는 그 자체로 지역이다. -지구인 동시에 세계를 말한다.

이러한 은유의 지형학은 인터넷이란 단지 인간의 상상력이 스스로의 능력을 제한하는 미지의 거대한 나라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제공한다고 본다. 이런 영역의 내재성- 거대함과 무제한-은 어쨋든, 이러한 의미 즉, 공간을 차지하지 않으나 제한된 코드의 세계를 현실화 할 것을 억제하면서 방어전략을 수행하는 의미화와 시뮬라크라의 가상화에 지나지 않는다. 거리는 즉시성으로 사라진다. 또한 존재는 동시성과 투명성의 상태가 된다. 만약 호스트 기계가 ‘다운된다고 해서’,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상세계의 한부분이 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코드는 부재로부터 존재를 불러일으킬 수는 없다. 그 사이트에 ‘도달’하려는 어떤 시도일지라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심지어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것에도 비교될 수 없다. 오프라인 기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호스트도 알려지지 않게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에는 개척자가 없다… 왜냐하면 인터넷의 영역은 이미 전반적으로 지형화되었기 때문이다. 노드들간의 연결은 이런 지형탐구를 위한 시도를 전개한다.-사이버스페이스내의 모든 ‘여행’은 각 단계를 되풀이하고 재추적하는 것이다.

인터넷은 ‘발견되지 않은 나라’는 제공하지 않는다. 단지 계획된 보물찾기와 같은 시뮬레이션만을 제공할 뿐이다. 2년전에 나타나서 수많은 Web을 바탕으로 하는 검색엔진인 Gopher는 인터넷이 단지 알려지지 않은 지식의 영역만을 가상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보의 구체적인 부호화를 재생산할 가능성은 그 위치를 정하려고 하는 어떤 시도를 앞서기도 하고 -배제하기도 한다. 어떤 것은 인터넷 상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기도 하고 어떤 것은 밝혀지기도 한다. 모든 인터넷도구는 포괄적이다. 왜냐하면 인터넷 정보는 폐쇄된 체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느 것도 검색 기준을 넘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Alta Vista는 거의 완벽한 자료의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3백만 이상의 개인 페이지를 데이터베이스화한다. 그러나 온라인 된 것, 정보의 존재론적 위치를 가지는 것은 , 말하자면 이미 지형화되어 있는 것이다. 당신은 이미 발견된 것만을 발견할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터넷상이 아닌 어떤 ‘장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인터넷은 사용자가 알려진 요소들과 마련된 사이트 그리고 포괄적인 코드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내재적 영역인 그 너머의 가능성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총체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가상영역은 말 그대로 지형학이다. 바로 토포스나 장소를 창출하기도 하고 노출시키기도 하는 글이다. 이미지 (그래픽)가 사이버공간의 형태로써 작용하는 반면, 특히 WWW을 통해서, 인터넷은 여전히 글쓰기의 매개체로서 중요하게 기능한다. 그와 같이,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을 하기위한 물질적 존재로서 일반적인 글쓰기의 역사내에 자리매겨진다.(이는 ‘활음조의’소리와는 반대된다.) 더우기, 실시간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는 장소에서 글을 쓰기때문에 , 인터넷의 가상지형은 글쓰기를 말자체로써 표현할 수 있게한다. Derrida는 글쓰기를 최초의 커뮤니케이션 기술로 본다. 왜냐하면 글쓰기는 기억을 돕고 또한 말의 즉시성을 시뮬레이트함으로써 시간을 ‘극복’하는 하나의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1981 :75) 그는 라이프니추의 비-음석적 글쓰기로 인해 우리가 기계언어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동시에 글쓰기는 이미 언급된 말의 즉시성에 더 가까이 간다고 보고 있다. (데리다 , 1976:77-9)이러한 두 사건은 과거에 대한 데리다의 역사내로 추락한다. fortlda게임의 부재는 글쓰기를 통해 존재하게 된다. 데리다의 지점으로부터, 글쓰기는 존재를 향하거나 여기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여기’에 주체를 만들어내는 수단을 제공한다. 이러한 존재가 이상적인(플라톤적이거나 낭만적인) 담론에서는 위장-거짓된 말로서의 글로 보여진다. 그러나 기술로서의 글쓰기라는 지점에서보면, 글쓰기의 텔로스는 말의 즉시성과 투명성을 가상화하려고 한다. 예를들어 전신은 공간적으로 부재하는 대상이 주체를 위해 존재하도록 해줄뿐 아니라 ‘사라진것’과 ‘여기있는 것’사이의 시간을 축소시키면서 전신은 모든 글쓰기가 ‘여기존재할 수 있는’ 잠재력과 직접적인 대화로서의 잠재력을 강조한다. 글쓰기는 한 문화에 대한 시공의 제한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전신이 된다. (료따르, 1991 :49-51) 브릴리오에 따르면 전신에 이어 급성장 일로에 있는 미디어와 함께 전신의 속도는 그 세계의 공간에 ‘전자지형학’을 출현하게한다. 가상적인 것의 출현과 ‘현실’적인 것의 소멸은 존재의 측정으로서의 공간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지형학의 기억상실증’를 생성한다. (브릴리오 1994:10) 현실공간은 항상 여기 그리고 지금이다. 실시간은 현실공간을 대체한다.(또는 대신한다) (1994:63-4)커뮤니케이션이 점점 즉시적으로 될수록 부재/존재 그리고 글쓰기/말하기라는 구분은 의미를 잃게된다. 출현과 사라짐의 게임인 fortlda는 내파하기 시작한다. 글쓰기는 더이상 모사나 재생산이 아닌 인터넷상에서의 ‘초월’을 이루어낸다. 말하기의 세번째 순서인 시뮬레이션으로 말이다. 전신이 가상적인 지형학이 되면서 글쓰기는 과거 텔로스의 역사에 도달한다. 그리고 나서는 그것을 초월해버린다. 료따르가 말한대로 컴퓨터는 자체의 목적지/운명이 된다. 자체의 한계대로 전제조건presupposition과 함축implication을 기억하면서 진행된 폐쇄된 시스템의 과정인 것이다. (1991:53) 거리를 감당하는 우편체계는 자체의 체계적인 세계가 된다. 즉 폐쇄된 순환의 줄이 되는 것이다.

텔레마틱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미디어가 현존하는 세계속에서 ‘인간의 확장’으로서 기능한다는 맥루한의 전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맥루한에게 기술은 지구촌의 가능성을 약속한다. 텔레비전에 대한 맥루한의 믿음은 1970년대에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등장하자 이러한 기술중심의 관점은 다시 유포되기 시작했다. 사실 온라인 공동체 운동의 중요성은 인터넷이 공동체적 실존을 획득할 수 있다는 이러한 이미지로 부터 생겨난다. 하워드 레인골드는 수년동안 이러한 시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결코 혼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장으로써의 컴퓨터 개념은 또한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크로커나 웨인스타인의 관점에서 보면 Teilhard de Chardin의 ‘인간 생활권(noosphere)’과 맥루한의 ‘지구촌’은 오늘날 자유로와진 인간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텔레마틱적인 것들’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텔레마틱적인 것들은 단지 인풋의 노드들로서, 그리고 정보순환 구조의 복구로서 ‘넷’상에 존재한다. 이러한 미디어들은 ‘보편화’를 제공하는 대신에 종속화를 생산해낸다.

인간은 그 자신의 행성인 지구와, 그 자신의 영토와, 그 자신의 육체로서 존재하는데 오늘날 인간은 종속적인것이 되었다. 초월적인 존재가 되면서 인간은 과도하게 된것이다. (보드리야르)

그러나 종속화가 소외를 낳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국가는 가상화되고 투명한 세계에 너무 가까워지게 된다(보드리야르). 없는것을 표현할 필요도 없다. 시뮬레이션은 재생산되기를 기다리면서 항상 내재해 있는 것이다.

근접성이 증가하면서 미디어가 매개되지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의 시뮬레이션이 나타난다. 텔레마틱스를 여타의 다른 매개 커뮤니케이션들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결합의 투명성-거리가 존재하지 않는 거리, 현재에 의해 만들어지는 상상된 부재의 소멸이다. 예를들어 지금 어디선가에서도 인터넷상에서 사용자가 전화와 유사한 텍스트기반 전화 접속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전화와는 달리 거리감은 접속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투명하게 된다. 단어는 스크린상에서 ‘현존’한다. 그러나 또한 목적지를 향해 사라져간다. 더이상 ‘fortlda’가 아닌 인터넷의 텔레그라피는 동시에 여기 그리고 저기에 존재한다. 텔레마틱은 전화와 동일한 총체성의 상징을 지속시켜왔다. 글로브 폰 라인은 지구를 둘러싸고는 우리의 목소리가 전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우리는 집에 편안히 앉아 우리의 목소리가 얼마나 가깝게 들리는지 궁금해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인터넷의 유닉스 빽본에 건설된 동시에 미디어에 의해 인터넷의 최상위에 놓여있다는 지형학적인 은유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컴퓨터와 상호작용하도록 초대된다.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그러한 전화선들은 초월적인 잠재력을 지닌 접속의 세계인 인터넷의 가상세계보다 덜 ‘실제적인’ 현존감을 지닌다.

이렇게 ‘실제적인 것보다 더욱 실제적인’ 가상 지형학은 ‘실제 세계’가 허용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수준의 통제로 사이버네틱 지형을 표현한다. 다시한번 알베르티의 창문을 컴퓨터 화면에 비교하면 더이상 표면은 거리와 깊이, 반대편의 환영을 통해 세상을 나타내지 않는다. 화면상에서 모든 표현의 양식은 실제적이지도 상상적이지도 않는 영토속으로 몰락해버린다. 그러나 시뮬라토리-환상적인 실재는 이 가상 지형학에 의해 가능해진다. 비유적인 지형이 더욱 강제적이 될 수록 인터넷이 대체물로서의 역할을 끝낼 시기는 더욱 가까워질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전환에 대해 기술한다. ‘실재적이지 않은것은 더이상 꿈이나 환상도 그 이상이나 그 내부도 아닌 그 자체로 실재적인것의 환상을 일으키는 유사물이다’. ‘세상’의 상징적인 총체성의 장에서 인터넷은 시뮬레이트된 세상의 총체성과 즉시성, 투명성의 밀접한 고리를 제공한다. 이 시뮬레이트된 세계속의 경험은 사이버네틱한 실재의 경험이 된다. 더이상 현실성은 없다. 가상성만이 존재한다.

가상세계들

우리가 가상현실을 고글과 착용하는 옷으로 연상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현실의 시뮬레이션을 경험하기 위해 스크린과 키보드 이상의 다른 어떤 기술적 보조물을 쓸 필요는 없다. 앞에서 서술한 많은 부분의 논의가 인터넷상에서의 은유적인 거리, 움직임, 공간에 대해 다루는 동안 네트워크화된 기계의 기술 또한 가상현존을 탐구하려는 더욱 의식적인 시도를 이끌어왔다 : MUD, MOO라고 불리는 텍스트기반의 가상 공간. MOO는 MUD로 알려진 프로그램류의 하위종이다. 그 기본적인 형식에서 머드는 텍스트상의 묘사를 통해 지형을 시뮬레이트하는 상호작용적인 멀티유저 게임이다. 플레이어들은 그들의 환경과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그 세계속에서 하나의 인물이 되어간다. 원래의 MUD와는 달리 MOO에서는 이 세계를 결정하는 코드를 헐어빠지게 하는(hack at) 인물이 허용된다. 플레이어는 단순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이용하여 그들의 가상세계속에 대상을 창조해낼 수있다 : 방, 풍경, 자동차, 음식, 카메라, 심지어는 인물까지도. 수많은 환상적인 MUD가 여전히 존재함(용죽이는 작은천사로 완성된)에도 불구하고 MUD와 MOO는 원래 그들의 게임포커스에서 상당히 멀어져갔다 – 1991년 1월 람다무(Lambda MOO)를 시작으로한 가상공동체(GREF 1) 시도를 포함해서. 이러한 가상공간은 개인에게 전문적인 회의, 비지니스 미팅으로 부터 가상섹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유로 몰려들 기회를 제공한다.

전자잡지인 ‘포스트모던 문화’의 후원을 받는 PMC-MOO는 이러한 ‘텍스트기반 가상성’ 형식의 적절한 예를 제공한다. 그들이 표명한 관심사가 알려짐으로해서 우리는 포스트모던 이론가들과 비평가들이 PMC-MOO에 매달릴것을 예상하고 실제로 회의나 미팅, 토론 그룹들은 일반적인 현상이 된다. PMC-MOO는 또한 맨하탄에 있는 산드라 거링 갤러리와 블라스트를 결합한 가상전시회뿐만 아니라 뉴조리칸 시인의 카페와 함께 시 ‘혹평’을 위한 사이트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런것들과더불어 이방에서 저방으로 왔다갔다 하다가 마주치기 아주 쉬운 더욱 아카데믹하고 예술적인 시도들, 지난밤의 TV토크쇼(아마도 MTV의 ‘The Real World’일 것이다)나 이번 주말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는 두명의 플레이어.’지구촌’을 향한 이러한 원형의 중심에서 매혹적인 것과 평범한 것은 서로를 앞지른다. 모순적이게도, ‘황홀한 커뮤니케이션’의 직접적인 경험은 거의 알아차릴 수가 없고 궁극적으로는 아주 평범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고도로 중개된 상호작용 형태는 중개되지 않은 커뮤니케이션을 가상화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당신은 어디에 존재하십니까?’라는 질문은 MOO에서는 아주 평범한 물음이다. 그러나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세계는 거리가 아닌 근접의 메타포에 따라 서로간에 의사소통을 하는 플레이어들의 이런 일련의 상호작용과는 반대로 작동한다는데 동의한다. 아마 보다 설명력있는 질문은 이런 것일게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텔넷에 연결해서 버지니아로 ‘여행을 간다.’여기서 텔넷은 UVA’s RISC에 기초한 서버로 PMC-MOO 프로그램 코드를 운영한다. MOO ‘안’에서는 이 목적지에 ‘도착한’ 다른사람들과 ‘만난다.’ fortlda놀이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사라지면서도 동시에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하기도 하지만 부재하기도 하고 멀리 있기도 하지만 가까이 있기도 하다. MOO는 공간의 시뮬레이션을 창출한다. 플레이어들은 사진의 시뮬레이션을 표현하기위해 그 공간을 사용한다. ‘현실에서 당신은 어디에 존재하십니까?’라는 질문은 다른 말로 자신을 이러한 새로운 공간에 가상화하거나 동화시킬수 있는 능력보다는 덜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인공적이거나 사이버네틱한 자아 즉, 이러한 새로운 지형안에 거주할 수 있는 그러한 존재의 창조를 요구하면서, MOO는 현실로서 취급되는 은유적 세계나 ‘전체로서의’ 인터넷을 구성하는 개념적 모델을 펼쳐낸다. ‘가상공간에서 플레이어들의 ‘자연스럼움’과 편안함은 ‘현실적’ 사이버스페이스가 어떻게 되는지를 강조한다. 인터넷을 통해 거리는 가상공간에 대한 여지를 만들면서 텔레커뮤니케이션 형태와는 전혀 다른 투명한 경험이된다. 전화상에서 나는 목소리가 얼마나 가까이 들리는지에 열중한다. 거리를 극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나는 편안함을 얻는다. MOO안에서 나는 더 이상 거리를 극복하지않는다. 왜냐하면 스크린이 공간의 틈을 메꾸지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크린의 표면에 존재하는 시뮬레이션 세계로 공간을 대체한다. 보드리야르의 스크린은 알베르티의 창문을 대신한다. 그것은 공간을 가상화하는 동시에 부정하는 ‘피상적 심연’이다.

MOO는 ‘이상적인 사회’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가끔은 진부한 아이디어이기도하다. 왜냐하면 세상에 대해 도전하기보다는 우리가 찾고자한 그 세계를 재창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폐쇄된 공동체의 모델인 것이다. 벽으로 구분되는 도시를 따라 모델링된 하나의 공간이다. MOO는 자체의 정확한 경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암호와 계약으로서 제공되는 행동적 코드를 포함하기도한다. 공동체는 아무리 개방적이게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자기들의 취미를 확인하는 것으로 기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조직적인 공간을 줄이 쳐진 공간이라 언급한다. 그리고 내가 다른 곳에서 제안했듯이, MOO는 아니 보다 일반적으로 폐쇠된 주변으로 기능하는 인터넷상의 공동체 모델은 모더니티의 온라인에 대한 가정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이들은 먼지와 콘크리트 그리고 도시위에 그려진 것보다는 보다 더 우아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꿈꾸는 반면, 대부분의 온라인 문화는 현실공간에 대한 지배적인 표현으로 묘사되는 똑같은 인간, 사회 그리고 정치 전략의 끝없는 반복과 순환과 보다 많은 관계가 있다. (Dibbell, 1993:37)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매력을 seductio에서 제거subductio로, 타자에 의한 유혹에서 스크린상에서 계속 반복된 자아의 최면hypnosis으로 되는 그러한 희열의 변화로 묘사한다.(1988 :25) 가상화된 존재는 모사물이나 원본의 재생 가능성을 탈피한다. 그 이유는 원본이란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1983 :97) 예를 들어, 팩시밀리 는 전화선을 통해 복사본을 전송한다. 그러나 전자우편은 가상화된 서류를 생산하고 전송한다. 그것은 무한히 복사되고, 즉각적으로 전송되고 다양한 포맷으로 재생되기도 한다. 이메일은 ‘원본’이란 개념을 퇴색시킨다. 그러나 가상 주소는 이용자의 물리적 위치에 달려있기 때문에 원본과 목적지로의 문제가 된다. 우편의 시뮬레이션(전자우편)으로부터 존재의 시뮬레이션(MOO)이라는 인터넷상의 이동은 ‘보다 더 현실적인’ 현실성을 창출하는 숙명적인 단계이다. 즉,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hypertelia이다. 따라서 텔레마틱이란 단순히 과거에 대한 인식을 멈추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도 있다.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한 공간의 종말, 정보를 통한 지식의 종말, 하이퍼리얼을 통한 상상력의 종말.

가상 지형학에 대한 이러한 해석의 중요성은 인터넷의 잠재력에 대한 많은 유토피아적인 해석과는 반대되는 지점에 서있다. 공동체를 지지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인터넷을 해석하고자 하는 노력은 이러한 시각의 ‘현실성’과 그것이 표현하는 ‘현실’에 대한 도전 둘 다를 가리킨다. 가상 공동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상 공간내 가상 육체들간의 상호작용의 힘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1993년에 발표된 Village Voice 라는 논문에서 쥴리안 디벨은 LambdaMOO에서 일어난 ‘사이버-강간’사고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디벨은 피해자여성의 정신적 충격뿐 아니라, 가상 공동체의 반발행위까지도 묘사하고 있다. MOO놀이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러한 범죄로 인해 자신들의 가상공동체정부- 문자 그대로 정부- 와 자유와 정의가 어떻게 조화를 이뤄낼수 있는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다. WELL( The Whole Earth ‘Lectronic Link)은 또 다른 가상 공동체의 예를 제시하는데 사실상 그것은 최초의 것이기도 하다. 즉 전자 게시판에서 ‘시민’ 그룹들이 서로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장치를 말한다. Virtual Communities의 저자이자 WELL에 오랜 동안 거자한 사람인 하워드 레인골드는 이와 같은 가상 공동체를 전자적인 아고라 라고 묘사한다. 그러한 묘사를 통해 그는 맥아가게가 하나의 시장이 되었을 때 잃어버린 공동체의 모습을 재건설 할 수 있는 ‘공식적인 공공 장소’가 될 가능성을 제공한다. (1993:26) 이미 인터넷은 그 자체의 시민 자유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전자프론티어재단EFF은 그 이름에서도 함축하고 있듯이, 가상 지형학을 미국의 프론티어와 자유의 개념과 연결짓는다. EFF와 또다른 그룹들은 사이버스페이스에 대단한 희망을 걸고 있다. (만약 민주 원리들이 ‘현실’세계에 만연할 수 없다면, 아마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가능할 것이다.) EFF의 창시자인 미첼 케이포(그리고 로터스사)는 다음과 같은 논의를 전개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삶….. 그 안에서의 최상이란 엘리트주의보다는 평등주의에 대한 지향이고 위계적이기보다는 보다 탈중심화된 것이다. 사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삶이란 토마스 제퍼슨이 원한 것을 이루는 것과 같다. 즉 개인의 자유와 다원주의, 다원성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약속원리에 기초한 것들을 말한다.(1993:53)

말그대로 수백만의 ‘네트이용자들’에게 사이버스페이스는 현실적인 잠재력을 가진 현실적인 장소이다. 정확히 말해서 현실과 비현실이라는 구분을 날려버리는 그 자체가 바로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로부터, ‘세계로서의 인터넷’이 가지는 강압적인 이미지는 우리를 세계밖으로 또는 그 세계의 억압의 밖으로 내밀어버린다. 그것은 세계를 목적밖으로 이끌어내어 하이퍼리얼리티로 인도하는 계몽주의의 동일한 목표를 그동안 쭉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아고라는 조작적인 파라미터의 제한된 장치내에 위치하는 광대한 자유영역의 가상화와도 같다. John Unsworth가 지적하고 있듯이, MOO의 이미 결정된 ‘핵심’ 코드는 이용자들의 자유의지를 제한하면서 빠져나갈수 없는 운명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폐쇄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조작적 코드는 ‘그 자체로 하여금 서로간에 이미 접촉하고 있는 것things을 두도록 제한하는 것이다.'(Gane, 1993, 57)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인터넷은 궁극적으로 접촉의 지도를 추적해나가는 것이다. 누구도 인터넷에서 새로운 접촉을 ‘창출’해낼 수는 없다. 이처럼 ‘스스로 초월’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바로 공동체로부터 의사소통을 분리시키는 것이다라고 보드리야르는 말하고 있다.(1993 : 12) 사이버공동체는 방어전략을 제공한다. 마치 공동체에 대한 계몽주의적 개념에서의 디즈니랜드처럼 인공주변의 경계내부보다 외부에는 더 이상 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기면서 ‘하나의 상상적인 효과’를 창출해낸다는 것이다.'(보드리야르 ,1983:26) 공동체 모델은 정확하게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형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동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실화의 순간을 따르는 하나의 모델 즉, 공동체의 시뮬라크라이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공동체는 어떤 다른 ‘현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디어 자체를 통한 중개된 사회내에만 존재가능하다. 더 이상 분화되지 않으면서, 자아와 공동체는 프랙탈이 되어 자신과 똑같은 부분으로 무한히 분할 될 수 있다. 그 각각의 부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전체의 시뮬레이션이다. (보드리야르, 1993: 57) 이렇게 확산된 소멸의 위협은 정보 ‘과부하’나 컴퓨터-매개의 파놉티콘이 주는 두려움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사실, 유토피아의 가능성에 대한 꿈과 절박한 정보 재난의 위협은 동일한 기능을 제공한다. 즉 모더니티의 위기억제이다. 미국민들에게 정보세계로의 자유로운 접근을 제공하려는 약속과 이러한 정보가 통제되는 세계의 위협은 동일한 전략부분이다. 간단히 말해서, 무한히 증가하는 정보 이미지는 계몽주의의 ‘지식’추구가 내파한 현실을 억제하는 것에 불과하다. 크로커와 웨인스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식이 정보로 축소되면 의식은 역사, 판단 그리고 경험과의 접촉을 빼앗긴다.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확장된 지식사회에 대한 환상이라든가 가상 지식의 현실성이다.(1994: 24)

기술이 점점 정교화되면 정보의 시뮬레이션이나 억제 전략이 점점 확실해진다. ‘정보’는 수요의 이동, 전자시장 그리고 늘어만가는 텔레비전 채널의 수를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언어가 된다. 깊이가 없는 스크린의 환상 -‘피상적인 심연’-으로 인해 우리는 확실하게 뿌리를 박게된다. 풍요로운 정보로 인해, 우리는 가상 세계의 폐쇄된 주변에서 ‘미지로’ 남겨진 것이 없고 배울 것도 없다는 것을 깨우칠 시간이 없다.

매력적인 지향점

부상하고 있는 포스트모던한 하이퍼리얼리티에 대한 비판을 고려한다면, 혹시라도 현재의 궤도밖에 존재하는 온라인 기술을 이끌어낼만한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 질문해야만한다. 료따르에게 있어, 그것은 ‘텔로스 없는 전신공동체’를 상상하려는 노력의 물음이다. 그 공동체란 목표로서의 공동체를 ‘잊곤 한다.'(1991:54) 만약 우리가 찾고자 한다면,이와 같은 ‘또다른’ 방향(계몽주의적 텔로스를 따르려하지 않는 기술적으로 중개된 문화를 향한 길)은 그러한 공동체를 대재앙으로 추구하기보다는 텔레마틱스에 대한 도전에 위치지으려한다. 보드리야르의 경우, 그러한 과정은 ‘그 세계의 강요된 현실화’를 야기시키지 않는 게임을 포함하고 대신에 그 자체를 우연적이고, 설명불가능하며 저주받은 몫으로서 그 체계의 ‘타자’로 인정한다. (Gane,1993,45) 이러한 접근방식은 체계의 전반적인 시각을 ‘당신을 회피하고 그에 따라서 당신은 당신자신과 당신만의 진실을 회피하는 활동의 중심’으로 유혹한다. (보드리야르 1988:66) ‘그 세계’를 노출시키려는(결과적으로 실현시키려는) 시도보다 보드리야르는 자체의 총체성을 숨기려한다. 그 세계를 과정밖으로 안내하고 궤도밖으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한편, 크로커와 웨인스타인의 견해에는 하이퍼텍스트화된 육체를 통해 ‘파리 코뮨에 대한 인터넷의 등가물’을 발견하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유사한 방식으로, 크로커의 ‘데이터 플래쉬’는 더 이상 네트상의 노드로서 기능하는데에 관심을 두지 않고 대신에 인터넷을 계몽주의적 ‘세계’와 커뮤니케이션라인에 저항하는 창조적 관계와 모델로 변형시키는데에 집중한다. (1994:15)인터넷에 대한 이러한 접근방식들은 어떤 대답보다는 물음을 향하고 있다. 즉, 미디어의 매력적인 투명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가상 영역’이 자체의 모델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일 이상을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말이다.

내가 제안했듯이, 지배적인 가상 지형학은 하이퍼리얼한 시뮬레이션 온라인 즉, 그 세계를 대체할 또다른 세계를 밝혀내게 된다. 이러한 모델은 미국에서 적용해왔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모델로서 미국정부에서 적용해왔다. 계몽주의 사상의 궤도에서 쌍둥이 별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이러한 사이버스페이스의 산물에 관한 중심을 제공한다. 온라인공동체의 파놉티콘적인 두려움과 평등주의에 대한 열망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은 모더니티의 사상전반에 걸쳐 탁월함을 보인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다른 공간과 다른 지형학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이 체계너머를 살펴보아야할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 국가,도시 그리고 규정화된 시스템의 끝없이 반복되는 흠집난 공간에 대한 도전은 탈영토화라는 부드러운 공간과방랑자적인 과정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정부공간은 개인을 배치하고 조직화하는 반면, 부드럽고 방랑자적인 공간은 집단을 다양한 라인과 크로스로 ‘분배한다.'(들뢰즈와 가타리 1987:481) 이러한 사상을 따른다면, 새로운 온라인 이론가들은 WWW의 발전과 함께, 새로이 출현하는 부드러운 사이버스페이스의 가능성을 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상적 지형학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미디어의 ‘본질’이 아닌 미디어와의 관계속에 자신을 제안해야할 것이다.가상회되고 초월적잠재력이 있는 하이퍼여행의 세계를 제공하기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포스트-글로벌한'(그렇기에 개방된) 지형을 제공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모더니티를 포스트모던의 시기로 이끈 바로 그 가정들을 이탈시킬만한 잠재력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MOO질문에서 stakes현상금을 걸 수 있다. "당신은 현실세계에서는 어디에 존재하고 있나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사람들은 모든 구석에서 아주 흔한 것을 발견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또한 인간의 의도된 목표로부터 우리로 하여금 방향을 바꾸게 할 매력적인 대상이나, 속임의 대상을 발견하고자 할 것이다. 레인골드는 비록 가상적 접촉이 많은 사회장벽(나이, 인종, 그리고 성별)을 희미하게 함으로써 공동체를 유용하게 할지라도, 이러한 동일한 인터페이스는 가상시민이 ‘전자 사기꾼’에게 쉽게 속게되는 기만과 책략을 허락한다. (1993:164)배제, 환상 그리고 암시의 가능성이란 공동체에 대한 계몽주의적 개념에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악마’는 종말을 막고 하나의 체계를 실험experiment, 충동 drift그리고 ‘편력’peregriation에 개방시킬 저항일수도 있다. 보다 ‘개방된’ 지형학에서 미지의 접촉과 ‘괴기한 결합’은 이익에 기초하고 가정을 공유하고 있는 공동체의 모델을 대체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러한 일련의 공동체는 지금까지의 주장보다는 실험을 위한 확장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료따르는 이러한 저항을 ‘감수성’이라 칭하는데, 그것은 모더니티를 다시쓰고자하는 시도이며 과거 모더니티의 텔로스의 가정을 씀으로써 결정된 것과 복잡성을 폐기하기 위함이다. (1991: 28)그는 모더니티의 작업공간에서 프로이드가 제시한 시간제아르바이트(?)durcharbeitung를 통한 작업과 전략적 연극장소에서의 자유로운 연극을 제안했다. (1991:54,117) 료따르는 그러한 가정을 향한 (그리고 그것을 넘은) 총체적 시스템의 강압을 회피하고자하는 욕망성을 지적한다. 료따르의 말에 의하면, ‘준비되지 않은 어떤생각을 수용하도록 준비된 것은 사고라는 이름을 받을만한것이다. Being prepared to receive what thought is not prepared to think is what deserves the name of thinking'(1991: 73)가상적 유토피아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가상성을 통해 해방된 세계에서 계몽주의의 개념을 즉각적이고 내재적으로 수행할것이라고 본다. 아마, 그 모델의 내재성은 그것을 창출한 가정에 도전할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가상성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서 상업적 맥락에서가 아니라, 베르그송의 맥락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즉 실제적인 것이 출현하기 전해 그러한 시기를 발생시킬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말이다. 가상성을 상업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우리가 발견한대로의 온라인 세상’을 약속한다. 그러나 온라인 공간은 이러한 약속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가상적 지형학은 ‘실제’공간보다는 가능성의 조건을 제시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사이버스페이스는 (체계,지구, 세계 기타등 등에 관한)정의가 정체하고 ‘총체적인 흐름’의 파괴적인 역학이라는 두 개의 순간사이에 존재한다. 베르그송의 이러한 접근은 특별히 들뢰즈식이지만 그는 ‘가상적인 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지적한다. 무언가가 되거나 실험하거나 그 사이를 지나쳐버리는 순간. 온라인 공동체는 세계를 가상화하지는 않지만 모더니티의 조건사이를 지나치는 공간, 즉 부상하는 것을 볼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을 제공한다.

가상 지형학에 대해 이처럼 반전된 이미지에서, 인터넷은 하나의 세계로서 그것을 총체화시키려는 인간의 의도에 저항할 가상성을 제공한다. 모더니티에서 당연히 여겨졌던 가정과 일치한 지점들 대신에 공동체, 정보, 해방 자아를 제공하면서 말이다. 가상 공동체는 인간이 어떻게 결정된 목표(전자 민주주의, 평등주의적 유토피아)를 성취하기보다는 접촉을 구성해나가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공동체 모델을 (재)생산하기 위한 작업보다 오히려 사이버스페이스는 인간의 목표를 뛰어넘어 새로운 접촉을 향하게끔 한다. 새로운 담론을 요구하는 새로운 ‘지지학’. (브릴리오 1991:110) 온라인 상에 나타난 ‘가상 육체’는 ‘현실의’ 육체를 가져야만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인간의 가정으로부터 길을 잃게 한다. 인터넷의 가상성내에서, 우리의 말이 곧 우리의 육체이다. 그것은 aporetic한 연결체로서, ‘물리적'(본체의)전체성과 현상학적 경험으로서의 ‘육체’에 대한 재-관찰을 강요한다. 인터넷은 어떠한 모델을 확신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파괴하기 위한 매개체를 제공한다. 이렇게 상이한 과정에 따라서, 인터넷은 제거되기보다는 우리를 유혹하게 될 것이다. 자아와 육체,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모더니티의 가정에 대한 도전으로서. 인터넷은 총체성의 시뮬레이션을 보이기보다 오히려 놀이공간을 제공할 것이다. 기술을 통한 목표의 추구대신에 인간은 ‘사이버스페이스’의 충동과 유인으로 자신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망은 스크린에서 깊이를 발견하고 낯익은 경로를 벗어나 다른 방향에서 자신을 잃기는커녕 찾게끔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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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6/01/ Lee, Kwang-Suk

2000-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