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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배드 서브젝트(Bad Subjects)’를 위한 선언

By 2000/05/27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진보네트워크센터

백욱인교수 홈페이지(http://soback.kornet.net/~wi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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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배드 서브젝트(Bad Subjects)’를 위한 선언

A Manifesto for Bad Subjects in Cyberspace

조 병준 역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정치를 조직하라

1993년 9월, 배드 서브젝트는 `배드 서브젝트를 위한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에서 우리는 현존하는 좌파 정치 운동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다. 우리가 볼 때 현대의 좌파는 냉소주의와 다문화주의에 대한 집착, 그리고 희생과 주변화를 부추김으로써 자신들의 비효율성을 보상받으려는 욕망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당시 배드 서브젝트는 전자 우편 리스트를 조직하고 우리의 간행물들을 전자 출판으로 게재할 수 있는 조그만 사이트를 만들어 인터넷에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였다. 우리의 선언문은 전자 우편망의 대로를 가로질러 엄청난 독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우리는 그토록 많은 독자들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뉴질랜드에 이르는 수많은 곳에서 답신이 날아들었고, 심지어 미국에서는 학교 수업 시간에 우리의 선언문을 가르치는 곳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배드 서브젝트의 지명도와 인기는 무엇보다 우리가 온라인 상에 존재한다는 이유에서 비롯했음이 분명하다. 인쇄된 간행물도 계속 유통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독자들 중 거의 대다수는 인터넷을 통해 우리와 만나고 있다.

선언문에서 우리는 좌파 정치 운동이 좀더 우리의 일상 생활과 밀접히 연관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개인적 참여와 정치적 참여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제시하고 싶었다. 이제 인터넷은 우리의 일상적 삶이 벌어지는 장이 되었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제안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 것인지 사례들을 제시하고 싶었다. 한때 우리에게 인터넷은 그저 우리의 글들을 전파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인터넷은 온라인 사용자들이 배드 서브젝트 구성원들의 사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교류와 발전을 위한 중요한 사회적 맥락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사이버 스페이스는 이제 배드 서브젝트를 위한 조직 도구임과 동시에 만남의 마당이 된 것이다. 또 어느 면에서 사이버 스페이스는 우리가 최초의 선언문에서 상상했던 유토피아 공동체를 닮아 가고 있다. 다음 글은 사이버 스페이스의 급진적 잠재력을 찾아보려는 우리의 집단적 노력을 보여준다. 물론 우리는 사이버 스페이스가 지닌 한계를 간과하지 않았다.

사이버 스페이스와 범세계적 자본

전화와 자동차, 라디오, 텔레비전이 한때 그랬듯이, 사이버 스페이스는 당대의 테크놀로지 물신(物神)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사이버 스페이스는 매스 미디어의 확장 과정에서 논리적으로 한 걸음을 더 나가는 것이다. 20세기 내내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더글러스 켈너(Douglas Kellner)와 토드 기틀린(Todd Gitlin) 같은 최근의 비평가들에 이르기까지 좌파들은 매스 미디어가 진보적인 힘인가 아니면 반동적인 힘인가를 놓고 입씨름을 벌여 왔다. 매스 미디어가 지배 계급을 위한 프로퍼갠더 수단으로만 기능할 위험성은 항상 존재해 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급진적 단체들이 매스 미디어를 독자적으로 활용한 사례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 경우 매스 미디어는 대중을 조직하고 대중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어 압도적인 잠재력을 갖추었으면서도 값싸게 이용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가 될 수 있었다.

인터넷의 역사를 소개하는 대중적 논의에서는 흔히 인터넷이 지닌 혼돈스러운 구조와 언뜻 보기에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구조를 과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에스콰이어 1994년 12월 호에 실린 필 패튼(Phil Patton)이 쓴 온라인 접속 안내 기사는 그 전형적인 예다. 이 기사는 머리가 빙빙 도는 풍경으로 인터넷을 그리고 있는데, 그 기사를 지배하는 철학은 복잡성 이론이다. 이 카오스가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를 정리할 것이라는 행복한 신념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 저 흐름을 따라가라’는 식이다.

인터넷이 자라난 씨앗과 같았던 알파넷(ARPANET)은 미국 국방성이 만들어 냈던 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냉전 프로젝트들 중의 하나였다. 패튼이 쓴 인터넷의 역사 역시 인터넷의 군사적 기원 때문에 그것이 민간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서 여타의 다른 대중적 설명들과 일치한다. 패튼에 따르면, 인터넷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되면서 그 주변부에서, 철도나 자동차 도로 근처에서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터넷은 역사적으로 미국의 민족주의 정책과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즘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인정되고 있다. 국가 정책이 인터넷을 창조했지만, 이제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인터넷이 지닌 급진적 잠재력에 대한 논의들은 그것이 지닌 아나키적 성격에 대해 집중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논평가들은 인터넷이 그것을 특정 방향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중앙 집중적 권력의 시도를 계속 좌절시켜 왔다는 사실을 찬양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국가 권력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는 좌파들은 그런 논평가들과 입장을 함께 해 왔다.

하지만 인터넷의 카오스를 찬양하는 것은 곧 소위 말하는 자본주의 자유 시장을 찬양하는 것과 위험스러울 정도로 근접해 있다. 흔히들 자유 시장이란 규제와는 공존할 수 없는 생산적인 카오스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적으로 보자면 자유 시장은 일체의 정치적 또는 경제적 방향 조절 작업 없이도 얼마든지 혼자서 굴러간다. 자유 시장은 개인주의를 키우기 마련이다. 즉, 자유 시장이 최상의 상태로 기능하는 때는 바로 엄청나게 다양한 취향들과 욕구들이 그 안에 포함될 때라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자유 시장이란 그것을 구성하는 불평등한 사회 관계망들을 감추고 있는 허구일 뿐이다.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단어를 앞서 언급한 자유 시장으로 대치시켜 보면, 우리가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해 높이 평가한 것이 좌파가 지금껏 계속해 온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범세계적 자본주의처럼 컴퓨터 네트워크는 사람들을 연대시키기보다는 소외시키면서 한자리에 불러모으고 있다. 온라인 상에서 상호 교류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런 네트워크들이 확고한 경제적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에 의해 생산된다는 사실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하나의 상품일 뿐이다. 그 상품은 프로그래머들과 월급쟁이 시스템 오퍼레이터들, 그리고 사용자들에게 메모리를 분배하고 보다 복잡한 쌍방향 데이터 스페이스를 만들어 내고 뉴스 그룹과 발송 리스트, FTP 사이트를 유지하는 일을 맡고 있는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생산된다.

인터넷은 자유 시장이나 소비주의, 또는 노동의 소외 등에 대한 안티테제가 아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공상 과학 소설 작가인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이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것은 광범위한 세계의 하층 계급을 착취하는 다국적 기업들과 부자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되는 미래의 가상 현실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이버 스페이스 안의 공동체들이 급진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잠재력이 매체 그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사이버 스페이스 그 자체는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다. 수많은 유형의 공동체들이 컴퓨터 네트워크 상에 존재한다. 그들 중의 대다수는 우리가 자본주의에서 흔히 맞닥뜨리는 일상적인 상호 작용들이 확대된 것에 불과하다.

유즈넷(Usenet)과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을 예로 들어보자. 거기에서 우리는 점점 더 개인적 견해들과 정치 선전, 그리고 광고들 간에 경계가 엷어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오로지 직업 소개에만 전념하는 뉴스 그룹들도 있다. 월드 와이드 웹을 보자. 슬로베니아의 진보적 정치 운동을 다룬 글 한가운데에 있는 어느 한 단어에서 마우스를 눌렀는데, 갑자기 동유럽 관광에 대한 선전 문구에 접속되는 일도 벌어질 수 있다. 수많은 구역에 존재하는 온라인 갤러리들의 목적은 미술과 음악, 또는 문자 작품들을 팔기 위한 것이다. 결국, 인터넷은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터넷의 잠재력에 대해 환호할 때 우리는 그것이 비추고 있는 자유 시장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한꺼번에 묻혀 오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인터넷을 찬양하는 이유가 그것이 카오스적이고 탈중심적이며 개인주의 그 자체를 옹호하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머지 않아 똑같은 이유에서 자유 시장을 찬양하게 될 것이 뻔하다.

민주주의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사이버네틱 커뮤니케이션이 내세우는 좋은 사회라는 약속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이런 약속들은 우리가 민주적 유토피아주의(democratic utopianism)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도출되었다. `몬도 2000(Mondo 2000)’의 구성원들 같은 테크노 아나키스트들로부터 뉴트 깅그리치(Newt Gingrich) 같은 제멋대로의 보수적 미래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들 그런 민주적 유토피아주의를 주창한다. 자유 시장이라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온라인 상의 민주적 유토피아주의 역시, 개인의 의사 표현의 자유가 곧 우리 사회의 자유를 평가하는 척도라는 믿음에 깊이 빠져 있다.

온라인에서의 민주적 유토피아주의에서 사이버 스페이스 공동체는 결국 물리적 현실 안에 있는 정치 공동체를 열심히 흉내내게 된다.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미합중국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실재하는 민주주의의 결함들이 컴퓨터 네크워크에서도 광범위하게 드러난다. 네트워크에서 가장 큰 숫자를 차지하고 가장 입김이 센 집단은 바로 중산층과 상류 계급이며, 이들은 하층 계급과 소외 집단들이 지닌 욕구와 욕망에는 전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정치가들과 지방 정부, 그리고 특수 이익 집단들은 이미 가상 현실을 통해 시청 회의를 수행할 수 있고, 사람들로부터 의견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어느 시청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그 특권에 대해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뿐이다. 더 나아가, 사이버 스페이스는 거의 패로디 수준에 육박하는 개인주의화의 위험성을 안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 의견에 지나치게 높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통신 속어 IMO(In My Opinion)를 앞에 깔고 시작하지 않는 개인적 의견은 아예 끼여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개인을 지나치게 강조해 온 결과, 오늘날 좌파들은 다시 자신들을 대규모 공동체로 조직하려 할 때 수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개인 또는 자기 정체성에 근거한 정치 운동을 벌이다 보니, 결국 주류 사회에 대해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하고 통일된 입장을 취하려는 모든 집단은 불신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다문화주의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개인들 상호간의 관계를 수정하도록 도와주었다. 가령, 인종 차별 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가 되는 것은 무식하고 때로는 불법적인 행동이 되었다. 하지만 다문화주의는 동시에 우리에게서 정치적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서 볼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해 버리기도 했다.

이제 좌파들은 개인적 영역을 넘어선 정치 운동에 대해선 확고한 비전을 상실해 버렸다. 그 결과 좌파들은 많은 사람들의 힘을 통해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프로그램이나 목표를 일체 설정하지 못하게 되었다. 도대체 당신들이 말하는 사회란 누구의 사회요? 다문화주의자는 그런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사회라는 대답을 들을 때, 다문화주의자는 역겹다는 듯 반박할 것이다. 그런 사회는 없다고. 설령 그런 사회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건 필시 억압적인 사회일 것이 뻔해. 만약 모든 정치 운동이 순전히 개인적이라면 그런 반박은 분명히 옳은 것이다. 어느 두 사람도 완전히 동일한 삶을 공유할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정치는 개인적 경험을 넘어서는 것이다.

보다 더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려면, 좌파는 개인의 정체성을 옹호함과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는 정치 운동을 실천해야 한다. 사이버 스페이스 안에서의 정치 공동체가 지닌 잠재력이 특히 주목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알고 있는 정체성이 컴퓨터 네트워크 상에서는 달라진다. 컴퓨터 환경 속에서 상대방을 대할 때 우리는 상대의 인종이나 성별, 나이 등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가 없다. 따라서 서로를 그런 조건에 따라 판단하려는 사람들의 충동은 사전에 차단된다. 물론 그런 판단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또한 온라인 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다양한 부류의 다문화주의자들 중의 하나로 규정한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상의 급진적 공동체들이 실제 현실에서와 같은 식으로 실패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컴퓨터 네트워크들은 이미 많은 논평가들이 지적했듯 범세계적인 것이며, 아니면 최소한 국제적인 것이다. 온라인에 등장한 이후 배드 서브젝트의 전자 우편 리스트와 독자들은 문자 그대로 전 세계인으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사이버 스페이스 안에서의 어떤 급진적 공동체라도 단순히 자신들이 속한 문화 집단 또는 국가를 넘어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될 수 있다. 사람들이 온라인 상에서 자신들의 (다문화주의적) 정체성을 대표할 방법을 선택할 수만 있다면, 사이버 스페이스는 궁극적으로 퍼포먼스적 정체성(performative identity)의 실현을 위한 토론장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온라인 상에서 한 여성이 남성의 정체성을 지니고 퍼포먼스를 할 수도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그런 식의 퍼포먼스들이 인종이나 성, 민족성 등 고정되어 있다고 전제되는 속성을 깨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것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런 온라인 상의 퍼포먼스들은 아마 우리들이 현재 알고 있는 다문화주의를 넘어서 작으나마 한 걸음을 더 나아가게 해 줄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고정된 채로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온라인 접속이 이루어지는 사이트들이다. org(organization, 조직), gov(government, 정부), edu(education, 교육) 같은 전자 우편 주소록의 접두어들로 인해 사용자들은 각기 상업 네트워크, 국가 네트워크, 교육 네트워크라는 시스템 안에 갇히게 된다. 미국 바깥의 사용자들 역시 그들의 접두어에 붙은 국가 코드로 식별된다. 사용자 주소를 지울 수 있는 익명 서버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들도 완전한 익명성을 보장해 주지는 못하며 그나마 그것의 이용도 제한되어 있다. 이것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다문화주의적 정체성을 일시적으로 초월(또는 재규정)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결국 노동 정체성, 또는 계급 정체성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정체성이 탈다문화주의(post-multicultural) 세계와 탈민족국가 세계를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사회적 맥락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진보적인 `안전한 공간’의 이용

모든 급진적 정치 운동에는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강령이 구조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우리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선 협동 작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리고 이상적으로 볼 때, 우리가 급진주의자로서 형성할 수 있는 팀의 유형들은 더 나은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청사진이 될 수도 있다. 불행하게도 좌파와 여타 급진적 공동체들은 불안정하고 위선적이기로 악명이 높다. 1960년대 후반, 신좌파(New Left)와 민권 운동이 여성 해방 운동을 낳게 된 이유는, 오로지 여성들과 그 동지들이 볼 때, 신 좌파와 민권 운동 내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주의적 행동이 평등과 사회 정의라는 그들의 공식 목표와 명백히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의 여성 해방 운동과 기타 민권 운동 집단들은 개인적 문제들을 정치적인 문제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적 신념과 일상적 행동이 서로 분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문화주의적 입장이 지닌 한계는 부분적으로 우리 배드 서브젝트가 현재 벌이고 있는 활동을 지탱하는 추진력이기도 하다. 배드 서브젝트는 지금까지 항상 좌파 정치 운동에 관한 토론장을 마련하고, 또 그것을 넘어서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사회 변화를 촉진시키고자 하는 목표 아래 활동해 왔다. 인쇄된 출판물 안에서 사람들이 당대의 문화가 지닌 한 측면에 대해 실질적이고 일관된 입장을 구축해 간다면, 온라인 통신망 안에서 사람들은 토론할 수 있고, 더 정확히 말해서, 그 안에서 사람들은 `일상 생활을 위한 정치 교육’에 관해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신을 통해 사람들은 좌파들이 어떻게 하면 현대 사회를 더 잘 이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 그 가능한 방법들을 토론한다. 따라서 온라인 통신망은 일종의 `안전한 공간(safe space)’ 또는 `후원자 집단(support group)’과 비슷한 모습을 띠게 되며, 아이디어와 입장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게 해 준다.

주어진 시간에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통신 구성원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현재 전자 우편 리스트를 정기 구독하는 200명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전달되고’ 있다. 사람들 서로간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일단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에 대해 `배드 서브젝트의 집단적인’ 입장만큼은 꾸준히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자 우편 리스트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하나의 입장(때로 임시적인 것이 될 경우도 있지만)을 집단적으로 형성한다. 통신에 참여함으로써 구성원들은 배드 서브젝트 집단이 항상 추구해 온 유형의 정치 공동체를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자유로운 교환에도 역시 나름의 한계는 있다. 모든 `안전한 공간’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조심해야 할 점은 있다. 통신망과 같은 장소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토론들이 자칫 우리에게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있다는 잘못된 착각을 줄 수도 있음을 주시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교환이 재빨리 모든 입장은 다 동등한 수준에서 정당하다고 간주하는 토론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문제를 들 수 있다.

통신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좌파 정치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만, 때로 그들의 토론이 앞서 언급한 개인주의라는 진흙땅에 빠져드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런 경우 비판적 견해나 보다 일관성 있고 그에 따라 궁극적으로 더 쓸모 있는 입장이 정립될 가능성은 사전에 배제되어 버린다. 사실 어느 정도의 `진보적 다원주의(liberal pluralism)’ – 모든 사람의 의견이 평등하게 평가되고 존중되는 – 는 필요하며, 또 통신망이라는 안전한 공간은 그런 역동성을 허용할 뿐더러, 사실 부추기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실질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의 확고한 입장을 구축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배드 서브젝트에 관한 토론들이 하나의 집단적인 정치 운동을 제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통신 집단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정치 공동체의 느낌과 그 공동체를 생산적으로 활용해 세계를 실제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서로 구분해야 한다. 더욱이 어떤 후원자 집단이든 간에 마찬가지지만, 우리도 집단을 떠나 사이버 스페이스를 벗어난 우리의 삶에서 통신에서 얻은 기술과 지식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통신을 통해 수많은 사회적 변화와 정치적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다. 아이디어의 교환을 통해 우리는 의식화를 이룰 수 있으며, 이런 의식화 자체에 이미 현실적인 결과가 담겨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통신 기록에 접속하는 학생, 교수, 작가들은 거기서 얻은 아이디어와 자원을 활용해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을 바꾸는 사람도 많다.

우리는 전자 우편망 같은 장소에서 벌어지는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와 효율적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급진적 정치 운동 사이에 균형을 잡아야 한다. 사실 다문화주의건 자유주의적 다원주의건, 어느 쪽에서도 본래부터 급진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실 양쪽 모두 `대안(alternative)’ 시장 또는 `틈새(niche)’ 시장을 창조함으로써 우리가 부수고자 하는 자본주의 구조를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흔히 낳는다.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전망에 대해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하나의 입장을 지켜 가야 한다. 그 입장이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저항하는 것이다.

전자 우편망에서 이루어지는 쌍방향 토론은 아이디어와 행동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교육 대상인 대중에 접근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진정한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내는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온라인 구성원들이 그저 `배드 서브젝트 집단’의 아이디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구성원들이 현실에서 최대한 활성화시켜 가는 그런 세계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뛰고 있다. 따라서 사이버 스페이스의 정치적 잠재력에 대한 자기 의식화가 최종 목표는 될 수 없다. 우리는 인터넷을 떠나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오로지 `현실’ 세계 안에서의 사회 변화를 위한 추진력으로서만 인터넷을 활용해야 한다.

사이버 스페이스를 위한 급진적 프로그램

사이버 스페이스 공동체란 또 다른 형태의 공동체일 뿐이며, 거기엔 나름대로의 함정과 성과가 있다. 궁극적으로 문제는 공동체가 취하는 형태가 아니라, 그 공동체를 가지고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온라인 상의 공동체와 현실 생활에서의 공동체가 서로 대립하거나, 그 공동체간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고 믿는다. 이 공동체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관계가 만들어 내는 결과로서 서로를 확연히 다른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 있다. 현실의 공동체들이 사이버 공동체들을 만들어 왔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현실 공동체들과 사이버 스페이스 안에서 만들어진 관계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사이버 스페이스와 현실 사회는 변증법적 관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창조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시즘의 전통을 따르는 유물론적 변증법은 흔히 물질이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일련의 관계로 해석되곤 한다. 많은 이론가들이 이제껏 지적했듯이, 이런 해석은 당신이 물질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사이버 스페이스가 정신의 영역으로 보이고 따라서 비물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해도, 우리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물질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물질성을 상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들은 사이버 스페이스에 접근하지 못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접근하고 있다는 진술이 불가능하다. 또 사이버 스페이스의 구조를 자본주의 구조와 비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모든 물질 원료(raw material)와 마찬가지로 사이버 스페이스도 세계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 따라서 사이버 스페이스는 물질성과 이데올로기를 띄고 있다. 실제의 접속 장치(ports)와 기계, 램(RAM)이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사이버 스페이스를 확보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 안에서 행동하는 방법들에 대한 믿음이 있다. 현실 세계에서의 공동체처럼 사이버 공동체도 물질 원료와 인간의 활약이 결합되어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급진적 정치 운동과 실재 현실에서의 실천 사이에는 서로 연관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급진적 정치 운동 프로그램은 그 물질 원료와 정보에 대한 평등한 접근권을 지향하는 행동들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은 사이버 스페이스 사회 또는 그것의 구조와 법칙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지역적이며 또한 범세계적인 참여를 증진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반자본주의 사상을 확산시키고 국가 간의 경계를 해체하는 대로(大路)를 활짝 열어 놓게 될 것이다. 이 모든 행동에는 미래의 유토피아적 사회를 건설한다는 확실한 목표가 담겨 있다. 이 유토피아 사회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범세계적인 것이 될 것이며, 그 사회의 사람들은 정의와 협업, 재산의 공유, 그리고 갈등의 평화적 해결에 전념하면서 하나로 묶이게 될 것이다.

지금 현재를 놓고 볼 때 아직 사이버 스페이스는 유아기에 머물고 있다. 비판적 토론에서 우리는 흔히 하나의 테크놀로지로서, 또 하나의 사회적 힘으로서의 사이버 스페이스가 어떻게 발전해 갈 것인지 그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이버 스페이스를 이론화하는 작업은 동시에 하나의 사회로서의 우리들 자신이 미래에 어떤 모습을 띠게 될지를 상상 속에서 투사해 보는 일이기도 하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단순한 컴퓨터 시스템 이상의 어떤 것이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현재 진행형으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인간 관계의 네트워크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현 시점에서의 사이버 스페이스를 놓고 볼 때 그것의 구조가 전혀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바로 그것이 지닌 유토피아적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사이버 스페이스의 미래를 조직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인간 사회의 미래 역시 확정되지 않은 것임을 우리 스스로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모습의 사회를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언제나 더 나은 사회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이버 스페이스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이 선언문도 하나의 초대장에 불과하다. 이 초대장은 개인으로서, 또 하나의 사회로서의 우리가 미래 사회에 대한 선택권을 쥐고 있음을 기억시키기 위한 것이다.

2000-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