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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칼럼] 디지털 문화는 공동체 문화이다/백욱인

By 2000/05/05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진보네트워크센터

디지털 문화는 공동체 문화이다

백욱인(서울 산업대)

"문자와 인쇄기술은 전문화와 분리를 조성하고 장려한다. 전자 기술은 통일과 참여를 조성하고 장려한다" <맥클루한, 미디어는 메시지이다 >

정보통신기술은 모든 것을 바꾼다. 가족과 교육, 직장, 이웃, 정부,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 우리는 최근들어 디지털 정보통신기술이 정치를 민주화하고, 문화의 생산과 소비를 민주화하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심심찮게 듣는다. 물론 이러한 낙관적인 예견 뿐만 아니라 정보통신기술이 고급 문화를 타락시키고 저질 모방 문화를 걷잡을 수 없이 확산시키리라는 부정적 견해도 있다. 디지털 정보통신기술은 의사소통방식 뿐만 아니라 문화 차원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를 몰고온다.

사이버스페이스는 분명히 새로운 기술의 소산이다. 컴퓨터와 통신의 결합이 이러한 공동체를 이루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단순히 기술만으로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①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컴퓨터,②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③네트워크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사이버커뮤니티’는 특히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사교환과 이를 지속하려는 공동의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다. 네트워크 연결 기술과 하드웨어, 그리고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되는 자료와 정보만으로는 커뮤니티를 구성하지 못한다. 새로운 미디어의 특징으로 제시되는 쌍방향성과, 멀티미디어만으로는 과거의 미디어와 다르다는 의미에서 뉴미디어는 될 수 있어도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지는 못한다.

피씨통신과 인터넷은 미디어인 동시에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새로운 환경이다. 그런데 미디어만으로는 공동체를 만들지 못한다. 맥크루한의 말처럼 미디어는 ‘인간 몸의 확장(the extensions of man)’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인간 공동체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기존의 매스미디어와 같은 ‘일대 다’의 관계로는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텔레비전은 미디어이지 인간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환경이 아니다. 공동체가 이루어지려면 사람들이 만나는 공동의 광장이 있어야 하며, 의사를 소통하는 도구가 있어야 하고, 그들이 만드는 공동의 가치와 신념 그리고 행위가 있어야 한다. 피씨통신에는 이런 요소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이런 맥락에서 네트는 뉴미디어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간 생활의 환경이자 조건이다. ‘다수 대 다수의’ 새로운 만남의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만남의 방식도 과거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정보통신기술은 비즈니스의 도구에만 그치지 않는다. 네트는 이제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이 대중문화의 지형을 바꾸는 핵심 기술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네트는 연결과 참여의 문화를 북돋는다. 모뎀이 삑삑거리면서 전화선을 통해 네트에 연결되는 소리는 현실세계와 사이버스페이스를 갈라놓는 신호음이다. 아이디와 암호를 입력하면 당신은 전세계의 무수한 네티즌과 연결된다. 전화선과 컴퓨터를 통한 연결은 사람의 가슴을 들뜨게 만든다. 생면부지인 상대편과 자료와 정보를 나누고 공동의 관심사를 교환하는 행위는 분명 지구촌 사회의 새로운 경험이다. 바로 여기에 ‘연결(wired)’이라는 말의 매력과 위력이 있다.

네트와 컴퓨터 통신은 만남의 형태를 바꾼다. 컴퓨터 통신의 전자 게시판은 컴퓨터통신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 편집위원이 임의로 실릴 글을 선별하거나 자신의 잣대로 짜르지 않는다. 구성원 전체의 자유로운 참여가 보장되어 있는 컴퓨터 통신은 열린 문화를 지향한다. 동호회는 서로 취미가 같은 구성원간의 친목과 정보 교환을 통하여 구성원의 적극적인 참여를 도모한다.

한편 컴퓨터 게임은 우리의 노는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동네 골목이 자동차에 점령당하고 텔레비전이 아이들을 방안으로 끌어 모으면서 참여형 놀이인 스포츠와 보고 즐기는 놀이인 미디어로 양분되었다. 스포츠 산업이 발전하면서 놀이는 다시 한번 놀이하는 사람을 소외시켰다. 그런데 컴퓨터 게임은 직접 참여하는 놀이의 기능을 다시 회복시킨다. 전자 게임은 매스미디어 문화의 수동적인 오락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참여적 놀이의 지평을 열어 놓고 있다. 게임의 열린 공간은 참여자의 적극적 사고와 개입을 통해 새로운 오락의 경지를 열어 놓는다. 게임도 역시 당대 문화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게임 시나리오와 그에 필요한 음향과 영상 등 여러 가지 구성 요소를 창조하는 문화의 잠재력과 능력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머드(MUD)의 경우 게임의 열린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다수의 참여자가 동시에 참여하여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고 상대의 참여에 의해 상황이 변하고 자신이 취하는 태도가 전체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머드의 경우 오프라인 전자 게임이 갖는 개인의 고립성을 극복하고 가상 현실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자기 아이덴티티의 새로운 실험과 확장을 경험할 수 있는 열린 전망을 제공한다.

그러나 전자 공간이 가져오는 개인화 경향에도 주의하여야 한다. 육체적 접촉이 거세된 익명성의 가상공간은 자신만의 고치를 틀고 들어앉는 밀실이 될 수도 있다. 현실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끊임없이 사이버스페이스에 잠입할 경우 네트는 공동체 활성화와는 거리가 먼 전자 밀실로 전락할 것이다.

디지털 문화는 나눔의 문화이다.

"우리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이 복제되고 아무런 비용없이 무한히 배분될 수 있다."<바를로,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

피씨통신은 정보의 공유와 나눔을 자신의 존재 의미로 여기는 새로운 마인드를 창출한다. 피씨통신의 열린 마당은 폐쇄적인 연줄망에 입각해 있는 기존 제도권에 대한 도전이다. 피씨통신 이서는 제도권의 구린내나는 타협과 아부를 뛰어넘어 당당하게 대중적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득권에 기대어 권위와 지위를 누리던 소유자적 근성을 파괴한다. 때로는 나눔의 정신이 흘러넘쳐 상용 프로그램까지도 통신망에 올리는 열성 정보 공유자도 출몰한다. 이들의 개방성은 철지난 자료를 손아귀에 꼭 잡고 남이 그런 자료에 접근할 것을 두려워하는 관료와 구닥다리 학자의 밴댕이 속알머리와 상대가 안된다. 정보의 가치는 소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정보는 쓰면 쓸수록 튼튼해지는 근육처럼 서로 나눌수록 커지는 살아있는 물질이다.

피씨통신 작가가 등장하고 동호회를 통해 특정 분야에서 프로를 능가하는 아마추어 매니어가 등장한다. 쌍방향 독자의 등장을 통해 독자가 적극적으로 내용 전개에 개입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현실세계에서는 연줄에 기댄 작가와 학자의 한마디가 무게를 얻지만 이들은 타성과 제도의 구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피씨통신의 게시판이 누리는 인기도는 이미 제도와 권위라는 틀을 벗어난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 피씨통신 조회수가 신문 구독률만큼이나 큰 마력을 갖는다. 네티즌들은 자기 생각에 동조하고 격려를 보내주는 사람을 네트에서 만나는 즐거움 하나만으로 온갖 자료와 정보를 기꺼이 공유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보는 독점적으로 소유되어서는 안된다. 정보의 독점은 특혜를 낳고 특혜는 부정을 낳는다. 정보의 독점과 미공개는 협잡과 사기를 키우는 온상이다. 정보의 소유란 사용을 위한 것이지 상품화의 도구나 개인적 소유욕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정보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정보사회의 새로운 문화에 적응할 수 없다.

설악산 맹물도 ‘생수’로 포장되면 돈주고 팔리는 자본주의의 시대에 도데체 정보의 나눔이 어떻게 가능한단 말인가?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디지털복제’가 아날로그복제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트에서 이루어지는 비트의 복제는 아톰의 복제와 달리 복제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디지털 정보통신 기술은 정보의 생산과 유통비용을 엄청나게 낮춘다.

아날로그 복제는 대부분 아톰의 복제이다. 아톰의 복제에는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고 비용도 만만찮다. 그래서 아날로그 복제품은 대부분 상품으로 팔린다. 그러나 디지털 복제에 드는 비용은 거의 0에 가깝다. 그리고 복제 기술도 그다지 대단하지 않다. 키보드로 몇가지 명령어를 치거나 마우스를 한두번 누르는 것으로 디지털 복제는 쉽게 이루어진다. 또한 디지털 복제는 대부분 마음의 창조물 곧 지적 생산물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이점이 아날로그 복제와 디지털 복제를 갈라놓는 지점이다. 아날로그 복제에서 디지털 복제로 이행하는 것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 변화하는 폭과 깊이에 비례한다.

아날로그 복제는 포디즘적 대량생산 시대의 기계적 복제 방식이다. 아날로그는 사용의 배타성과 일회성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이에 비해 디지털 복제는 포스트포디즘의 걸맞는 다품종 소량복제방식이다. 디지털 복제는 필요할 때 수시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복제는 사용의 공유성과 복수성, 재가공성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0과 1의 정보로 구성된 디지털 산물은 그것이 디지털 그림이든, 음향이든, 텍스트든간에 원본과 복제품이 똑같다. 이러한 디지털 복제물은 아날로그 복제품과 달리 애당초 자신만의 아우라(AURA)를 갖고 있다. {와이어드(Wired)}의 웹 사이트인 {핫와이어드(HotWired)}에서 보는 바와 같이 디지털 복제품은 모니터에 어울리는 독특한 아우라를 갖고 있다. 비트의 복제가 간편하게 이루어지면서 디지털 복제와 변형은 현대 포스트모던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복제와 변형이 창작의 고통을 동반하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페티쉬의 이름을 빈 표절과 모작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술의 대중화와 창작 주체의 자유로움이라는 측면에서 디지털 복제가 몰고올 엄청난 지적 혁명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디지털 복제는 표절과 복사의 베끼기 문화를 양산할 것인가, 아니면 창의력과 주체성의 문화를 확산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전적으로 네티즌의 실천에 달려 있다. 디지털 문화는 그 자체로 고정되거나 이미 결정된 완결물이 아니다. 디지털 문화는 네트라는 터전에 뿌려진 작은 씨앗이다. 네트의 환경과 씨앗의 성분에 따라 나쁜 열매가 맺을 확률도 존재하며, 더 나아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불임의 문화가 될 가능성도 있다. 또한 미래의 대안 문화로서 창조성과 주체의 자율성을 마음껏 실현하는 새로운 문화 양식으로 등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문화적 실천의 주체는 인간이고 그런 면에서 디지털 문화의 기술적 측면이 곧바로 디지털 문화의 가능성과 한계를 결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지털 문화를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디지털 문화는 지식문화이다.

"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마음의 문명을 건설할 것이다. 그것은 너희 정부가 이전에 만든 것보다 더 인간적이고 공정한 세상이 될 것이다." <바를로,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

사이버스페이스의 아이덴티티는 물질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에 기초한다. 네트 시대의 진보는 물질의 생산력이 아니라 마음의 생산력 확대에서 찾아진다. 산업혁명은 기계생산을 통하여 물질의 생산력을 엄청나게 높였다. 산업혁명기의 생산력은 동력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로 상징된다.기계가 기계를 생산하는 중공업은 산업혁명의 완성을 뜻한다. 생산력 증대의 상징인 기계는 인간의 근력을 확장시켰다. 팔뚝의 힘과 비교될 수 없을만큼 강력한 기계가 두손이 담당해야 하는 노력과 고통을 감소시켰다. 기계 덕분에 육체의 생산력은 크게 증가하였고 20세기 물질문명은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와 함께 소비사회의 정점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1970년대말 극소전자혁명은 자동화라는 생산력의 획기적인 질적 전환을 가져왔다. 육체의 확장을 완성하는 자동화혁명이 진행되면서 컴퓨터가 생산에 응용되고 비즈니스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1980년대에 퍼스널 컴퓨터가 보급되자 이제 생산력의 증대는 육체와 물질의 영역을 서서히 벗어나 마음과 정신의 영역으로 확장되기에 이른다.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마음과 정신의 영역이 태동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에 네트워크를 통해 전세계의 컴퓨터가 서로 연결되는 시점에서 마음의 생산력은 급기야 전지구적 차원으로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네트의 혁명은 기술과 문화의 결합을 가져온다. 기술과 문화의 결합은 테크노컬처(techno-culture)로 발현되고 있다. 음악의 경우 미디(MIDI)를 통해 작곡과 편곡, 혼성모방, 표절, 페티쉬가 아주 쉽게 이루어진다. 테크노 컬처에서는 모방과 표절, 창조적인 작업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기계 복제의 응용은 일반인의 전문적인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을 쉽게 만들었다는 기술적인 차원의 민주적인 효과와 더불어 창조성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미술 분야에서는 컴퓨터 그래픽(Computer Graphic)을 사용하여 새로운 이미지 창조와 기존 이미지의 새로운 변형과 복사가 쉽게 이루어진다. 전자글쓰기 또한 표절과 복사에서 예외가 아니다. 디지털시대의 복제는 정신과 마음을 복사한다. 네트에서는 정신과 마음이 손쉽게 복제될 수 있다. 네트 바이러스의 무서운 번식력과 자가증식력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네트시대에서 지식이 갖는 의미도 변화하고 있다. 지혜와 지식은 고대 그리이스 시대의 소크라테스 이후부터 갈라진지 오래이고, 인쇄술이 지식의 정보화에 박차를 가하더니 급기야 디지털복제의 시대가 도래하여 정보를 데이터(비트)로 수렴시키고 있다. 이제 지식은 지식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식은 정보와 데이터로 분해되고 있다. 그래서 정보와 데이터로 분해된 지식을 다시 꿰맞추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비트시대의 지식인으로 등장한다. 한 때는 글읽는 능력을 갖춘 자가 지식인이었다. 실천의 시대에는 행동이 지식이었다. 이제는 데이터와 정보를 짜맞추어 활용하는 능력이 지식인의 필요조건으로 간주된다. 디지털 시대의 지식의 생산과 유통, 분배, 소비에 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지식의 위상 변화와 더불어 정보불평등 문제가 드러나면서 정보빈자와 정보부자, 정보 거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정보 활용 능력의 문제이다. 아무리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엄청난 데이터를 소유하고 있다 하더러도 그것을 효율적으로 재조합하고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지적 역량이 없으면 아무작에도 쓸모없는 정보쓰레기 집하장이 되어 버린다. 정보에 관한 정보, 곧 메타 정보(meta-information) 가 중요시 되는 이유도 이런 데서 찾아진다.

디지털 문화는 젊은이의 대항문화이다.

불안의 시대는 대부분 어제의 도구, 과거의 개념으로 오늘의 일을 하려들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맥클루한, 미디어는 마사지이다.>

새로운 기술의 자유주의적 요소에 주목한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문화의 해방적 잠재력을 강조한다. 새로운 매체로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컴퓨터가 아이들의 게임기로, 가정주부의 가계부, 아빠의 업무용 프랜젠테이션 작성기로, 언니 오빠의 레포트 작성기에 머물러서는 디지털 문화의 앞날을 기약하기 힘들다. 새로운 매체로 구식의 전통적인 일거리를 처리하고 있다면 이것은 정작 디지털 문화의 퇴행을 자초하는 격이다. 컴퓨터로 사주를 보거나 컴퓨터를 타이프라이터로 쓰는 데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해서는 디지털 문화의 새로운 싹을 피울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젊은이들이 피씨통신의 주요 사용자라는 점은 일단 긍정적인 의미를 던져준다. 젊은이는 이미 변화된 환경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과거의 개념이나 도구로 현실을 재단하려 들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현실의 변화에 자동적으로 몸을 싣는 젊은이들은 기술과 문화의 만남에 저항하지 않는다.

디지털 문화는 문화생산자와 소비자간의 단절과 구분을 부숴버린다. 디지털 문화에서는 문화소비자라는 말은 현실성이 없다. 문화 사용자, 혹은 문화 생산-소비자라는 말이 더 현실적이다. 더 나아가 사용자는 내용에 개입하여 변형과 조작을 가할 수 있다. 디지털문화는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의 닫힌 구조를 부수고 쌍방향적인 의사소통의 열린 구조로 이행을 촉진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피씨통신의 고발이나 정치행위에 대한 감시, 지역 및 중요 이슈에 대한 온라인 보도는 거대 매스미디어의 일방적인 지배에 쐐기를 박는다. 사회문화 행태에 대한 개입과 실천의 장이 디지털문화를 통해 새로 열리고 있는 것이다. 네트에서 활동하는 아마츄어 매니아들은 어줍잖은 프로들의 게으름과 기만을 용납하지 않는다. 인기구룹 {룰라}의 표절 파문을 돌이켜보면 통신망이 대중문화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침을 알 수 있다. 피씨통신은 인기 정상을 달리던 그룹을 하루 아침에 날려버리는 위력을 보여주었다.통신망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은 일반 사용자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훨씬 더 대중적이고 직접적이며 참여적이고 창조적이다. 이러한 파급 효과는 대중매체와 주고받음을 통해 그 사회문화적 효과를 눈덩이처럼 불린다.

온라인에서 인기를 끈 소설이 인쇄매체로 발간되어 인기를 끄는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실세계와 네트의 사이버스페이스 간에 만리장성은 없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진출한다는 것은 가상공간에서의 영향력이 가상적으로만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통신망에 대중매체의 평이나 선전이 실리고 반대로 텔레비전에서 통신망을 이용하여 시청자의 의견을 받거나 통신망의 내용을 간접 중계하는 미디어의 크로스오버(crossover)현상도 생겨나고 있다. 당분간 이러한 두 매체간의 상호작용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디지털 문화는 과연 대안적인 문화로 성장할 수 있을까? 네트가 이전의 매체에 비해 새로운 내용을 담아내고 새로운 구조를 가지며 새로운 사회적 효과를 발휘한다면 새로운 매체는 대안적 매체로 성장할 잠재력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주류와 안전의 유혹을 벗어나서 방항의 정신을 키워나가는 것, 그리고 주류문화에 대항하여 새로운 대항 문화를 키워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게 되려면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공조와 배합전술을 잘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온라인에서 형성된 공감과 영향력은 오프라인의 실제 생활세계로 이전될 수 있다. 온라인 모임이 수시로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구성원의 육체성을 확인하고 그들간의 유대를 강화한다면 온라인 모임은 더욱 강력한 틀로 확대할 수 있다. 최근 미국의 통신법 개정을 둘러싸고 이루어졌던 온라인 항의 캠패인과 오프라인 시위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효율적 배합 전술이 여론 형성과 헤게모니 장악에서 매우 탁월한 효과를 갖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네트는 인간의 문화적 DNA를 복제한다. 복제된 문화의 DNA는 네트라는 배양기에서 국경과 시간을 초월하여 증식한다. 디지털 복제물인 비트는 DNA처럼 자기증식성을 갖는다. 비트는 비트를 낳고 비트가 낳은 비트는 또 비트를 낳으면서 비트의 증식은 계속된다. 문화 DNA의 디지털 복제가 갖는 위력은 바이러스의 증식처럼 폭발적이고 위협적이다.

맥클루한은 새로운 전자기술이 통일과 참여를 조성한다고 보았다. 그의 말대로 인터넷은 국가간의 지리적 경계를 허물면서 네티즌의 통일과 참여를 촉진하고 있다. 인터넷은 맥클루한이 지적한 지구촌이란 말에 현실감을 바짝 불어넣었다. 지역주의와 국가주의, 편협한 인종주의는 인터넷의 범지구주의적 영향 아래서 과연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구촌 시대에 여전히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연고주의로 사람을 가르고 파당을 지어 자신만의 이해를 추구하는 밴댕이들을 어떻게 소탕할까? 디지털 문화는 이러한 밴댕이들을 잡는 특효약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00-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