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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2054년 워싱턴을 배경으로, 6년동안 살인사건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을 만큼 치안이 완벽하게 구현된 세계를 보여준다. 이른바 프리크라임(Pre-crime) 시스템은 미래에 범죄가 일어날 시간과 장소, 범행을 저지를 사람까지 미리 예측해낼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프리크라임 특수경찰은 ‘미래’의 범죄자들을 범죄발생 이전에 체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2054년에 미래를 예지하는 시스템이 개발될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혹자는 단지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황당무계한 SF적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립 K.딕은 이것이 미래에 대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현재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프리크라임 시스템은 놀라울 만큼 게놈 프로젝트나 유전자정보은행의 아이디어와 근본적으로 닮아있기 때문이다.
유전자지도는 인간게놈이라는 정보의 바다에서 유전자 수천 개의 위치를 확인하고 질병을 유발할 수 있는 유전자 변이를 찾아낼 수 있다는 장밋빛 청사진을 그려 보인다. 심장병, 간질환, 비만, 유전성 질환, 심지어는 범죄성향 유전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질환들이 ‘발생하기 이전’에 질병유전자가 무엇인지를 파악함으로서 통제가능하다는 사고는 실상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예측하여 체포하는 프리크라임과 완전히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이처럼 유전자를 일종의 청사진으로 간주하며 유전자가 모든 것을 만든다는 물신적 사고에 대해 다나 해러웨이는 이를 ‘유전자 물신주의’라고 비판한다. 그녀는 유전자를 ‘물체’로 간주하는 생명공학의 초유전적 이데올로기가 건강산업, 의약, 농업관련 산업을 포함한 강력한 산업분야에서 지속적인 연구와 투자를 끌어들이는 자본주의의 이해관계와 긴밀한 역할을 맺고 있다는 점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또한 그와 동시에 그녀는 좀더 급진적인 인식론적 비전을 보여주는데, 유전자가 ‘물체’가 아니라 관계성이라는 장에 있는 매듭이라고 말한다. 세포 역시 구획된 영역을 확보하는 독립적 물체가 아니라 상호작용의 영역이며, 유전자는 이러한 관계성의 장의 매듭으로 계승을 자리매김하고 실제적인 것으로 만드는 구체화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유전자는 ‘물질적’이자 동시에 ‘기호적’인 실재물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이라는 과학에 대한 그녀의 인식론적 입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해러웨이는 단호하게 “생물학은 담론이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과학은 물질적인 세계에 대한 법칙의 탐구이자 기술이라는 고전적인 인식론에서 벗어나, 과학 역시 동시대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하나의 담론이라는 것이다. 생물학이라는 과학 역시 단순히 객관적인 과학이 아니라 노동, 자본, 생산성과 같은 현대사회의 체계 속에 갇혀있고, 다양한 현상들을 가시화하는 하나의 담론으로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유전자가 물질적-기호적 실재물이라는 언급은 유기체인 인간이 물질적, 기호학적으로 살며 과거 역사의 영향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러웨이의 입장은 ‘자연문화’(natureculture)라는 개념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나는데, 그녀는 자연과 문화를 이분화하여 물질적 자연을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상징적 문화를 기호학적 탐구대상으로 구분하는 것을 부정한다. 해러웨이는 이 두 개의 영역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영역이 사실은 하나이며, 생물학은 일종의 은유 혹은 설화라고까지 주장하는 것이다.
유전자지도와 같은 현대 생명공학의 시도에 대해 해러웨이의 인식론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과학자의 윤리’와 같은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여전히 유전자지도를 물질적 자연에 대한 객관적 지식으로, 그리고 그러한 지식의 활용에 개입되는 윤리적 전제로 이분화하는 방식의 접근이 갖는 핵심적인 문제는 유전자지도라는 지식의 형태가 근거로 삼는 인식론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유전자를 어떠한 현상으로 과학적 담론 상에서 가시화하느냐의 문제는 객관적 진리탐구의 영역만이 아닌 은유와 설화의 문제, 즉 그 자체가 세계가 아닌 담론으로서의 생물학이 갖는 인식론의 영역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해러웨이는 매우 드물고 급진적인 개입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장의 잎사귀처럼』이라는 사이어자 구디브와의 대담집은 이러한 그녀의 사유에 명쾌하고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동행자가 되어줄 것이다.
2005-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