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네트워커통신비밀

통신비밀보호법 시행령 개정안의 문제점{/}모든 국민의 통신기록을 저장하라?

By 2005/08/12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정책제언

안태윤

목 격자가 없는 범죄 현장에 남아 있는 발자국은 수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범인의 동선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혹시 신발바닥의 문양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어떤 신발인지까지 알아내었다면 수사는 상당한 진전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발자국은 눈길이나 무른 땅 위에나 남는 것이고, 진흙이나 피를 밟고 난 직후가 아니면 흙을 밟기 어려운 도시에서 벌어진 범죄현장에서 발견되기가 쉽지 않다. 아마 범죄 수사의 효율성 면에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안타까움을 달래기 위해 모든 제화회사에 대해 신발바닥에서 특수한 잉크가 새어나와 콘크리트바닥에도 발자국이 남을 수 있게 신발을 제작하도록 의무화할 수 있는 것일까.

다소 황당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그러한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바로 지난 6월 28일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통신비밀보호법 시행령 개정안이 그것이다. 개정안은 전기통신사업자의 협조의무(안 제21조의 5)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전기통신사업자는 통신제한조치 및 통신사실 확인자료 제공요청에 필요한 설비, 기술, 기능 등을 제공”해야 하며, 통신사실 확인자료를 12개월 동안 (다만, 시내전화 및 인터넷 로그기록 자료는 6개월) 보관하도록 하고 있다. 즉, 전기통신사업자에게 통신제한조치 및 통신사실 확인자료 제공요청에 응하기 위한 제반 준비와 12개월 이상 고객의 통신비밀을 보관해야 하는 일반적 의무를 부담시키는 것이다.

기왕에 현장에 남아있는 발자국을 범죄수사에 이용하는 것과 범죄수사를 위해 모든 국민에게 발자국을 남기도록 의무화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후자는 수사 편의를 위해 온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고, 국민들의 일상적인 이동 경로를 감시하겠다는 것이어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결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치라 할 수 있다.

개정된 통신비밀보호법 제2조 제11호가 규정하는 통신사실확인자료는 누가 누구를 상대로 통신을 했는지, 언제 몇 번이나 했는지, 어느 위치에서 통신을 했는지 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어서 통신 내용과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비밀로서 보호되어야 할 대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통신비밀보호법이 개정된 주된 이유가 바로 이러한 통신사실확인자료를 제공받거나 열람하는 것이 통신내용을 감청하거나 비밀리에 녹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헌법이 보장하는 통신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일이기 때문에 통실사실확인자료 열람 등에 영장주의를 적용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통신비밀보호법이 제15조의2에서 전기통신사업자에게 영장주의 원칙에 따른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 요청에 협조할 의무를 규정한 것인데, 시행령 개정안은 그 협조의무를 근거로 수사기관의 필요가 장래에 있을 것에 대비하여 전기통신사업자가 적극적으로 통신사실 확인자료를 추후 제공할 준비를 갖춰야 하고, 모든 국민의 통신사실 확인자료를 1년 이상 보관할 의무까지를 규정하고 있다.

시행령 개정안이 규정하는 의무는 모법인 통신비밀보호법이 정하는 의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개정안이 규정한 의무는 전기통신사업 중 불가피하게 발생한 기왕의 통신기록을 범죄수사에 이용하겠다는 차원을 넘어 장래의 수사상 편의를 위해 모든 국민의 통신사실을 의무적으로 보관시키겠다는 것으로서 구체적인 범죄혐의 없이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한다는 점에서 중대한 인권 침해 및 위헌 문제를 야기한다.

영장주의를 도입한다는 것은 곧 국민의 기본권의 침해를 필요최소한도로 엄격하게 제한하겠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개정된 통신비밀보호법이 통신사실확인자료의 제공 등에 영장주의를 도입한 것은 곧 개개인의 통신기록의 비밀을 강하게 보호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통신기록 유출 위험을 줄이는 방향으로 제도가 정비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전기통신사업자에게 모든 국민의 통신기록을 1년 이상 보관하도록 하여 개인의 통신기록 유출의 위험을 높이는 방향으로 시행령을 개정하는 것은 모법이 위임한 권한 범위를 일탈한 위법한 조치이며 통신비밀보호법의 개정 취지에도 역행하는 오류임이 분명하다. 전기통신사업자가 서비스 제공이나 요금 정산 등 사업상 불가피하게 필요한 범위를 넘어서는 통신 관련 기록은 애당초 보관할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세우고, 영장주의의 엄격한 적용 절차를 거친 예외적인 경우에 한하여 통신기록을 일정기간 보관하여 제공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향으로 시행령을 마련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번 시행령 개정안이 영장주의 도입 취지를 오해하고 있다는 우려는 “피의자 또는 피내사자가 아닌 다수의 가입자에 대한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요청을 1건의 허가청구서에 의할 수 있다”고 한 규정(개정령안 제21조의4 제2항)에서도 드러난다. 영장주의 하에서 피고인이나 피의자 이외의 제3자에 대해 강제처분을 하는 예는 매우 드물다. 감청이나 비밀녹음 등 통신제한조치의 경우에 제3자가 피의자나 피내사자와 통신의 일방 당사자가 되는 경우에는 사실상 그 제3자도 통신제한조치를 받게 되는 셈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통신제한조치의 청구는 ‘피의자별 또는 피내사자별’로 하도록 하고 있다.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 역시 통신제한조치와 마찬가지로 영장주의 원칙을 적용하겠다는 모법의 개정 취지에 비추어 개정안이 피의자나 피내사자 아닌 자의 통신사실확인자료를 포괄적으로 제공 요청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며 현행 형사상 강제처분의 전체 체계상으로도 어울리지 않는 행정 편의적 발상이라 하겠다.

2005. 5. 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었던 통신비밀보호법 법률개정안(의안번호 1778호)의 제안 이유를 보면 “범죄의 수사나 국가의 안보를 위하여 수사기관이 전기통신사업자에게 통신사실확인자료의 열람이나 제공을 요청하는 경우 그 남용의 우려가 커지고 있음을 감안, 엄격한 절차를 마련하여 그 통제의 수준을 격상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이 충실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통신사실확인자료의 열람이나 제공의 요청을 통신제한조치에 버금갈 정도로 제한하려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모쪼록 법무부가 이러한 입법자들의 의도에 충실하게 시행령을 마련해 나가길 바라마지 않는다.

2005-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