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네트워커인터넷거버넌스

.KR 인터넷주소자원관리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국내 인터넷의 정치적 상황

By 2004/11/15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심층연재

박윤정

지난 3회에 걸쳐 약육강식의 논리로 전개되는 인터넷주소자원관리의 국제적 논의들을 살펴보았다.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국제인터넷주소자원관리모델에 대한 국내활동가들 사이에서의 이견차이는 한국식 인터넷주소자원 관리모델의 논의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KR 운영방식을 둘러싼 논의들

현재 절대권력으로 군림하는 미국의 독주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국제무대에서 의사결정력을 행사했던 정부들 대신 기업과 시민사회에게 실질적인 참정권을 부여하는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이하 ICANN) 모델이 장기적인 시각에서, 기존의 국제기구 의사결정과정보다 선호되어야 한다는 시각은 .KR 관리모델 논의 시 그대로 연장된다. 국내에서도 정부는 인터넷주소자원 관리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인터넷운영과 관련된 전문가집단(엔지니어그룹), ISP(Internet Service Provider) 및 도메인 등록기관들 그리고 시민사회가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운영을 강조하게 된다.

또 한편에서는 미국정부의 ICANN 모델은 형식적으로 정부대신 기업과 시민사회에게 인터넷주소자원 의사결정권을 준다고 하지만, 이는 시장경제를 우선시하는 미국의 전략적 선택으로써, .KR의 관리에 있어 한국정부의 전략적 지위를 인정하자는 의견이다. .KR의 인터넷주소자원 의사결정은 구조상 국제사회의 여론 및 결정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는데, 한글최상위도메인의 도입, ICANN으로부터 북한 코드인수작업 협조, .KR 외에 다양한 국제인터넷주소자원관리권 확보 등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의 이해를 반영하려면 정부의 역할이 필요불가결하다는 판단에서이다. 만약 한국시민단체들이나 기업이 한국정부의 도움없이 위에 열거된 과제들을 국제무대에서 효과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다면, 굳이 정부의 전략적 지위를 인정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전자정부 논의과정에서 정부와 투쟁을 하고 있는 한국 시민단체들에게 이 제안은 어려운 숙제가 될 것이다. 다음은 정보통신관련 시민단체들이 정부주도의 인터넷주소관리체계를 반대하는 성명서에서 한국정부의 무능함에 대해 비판한 글이다.

“정보통신부는 최근 진대제 장관이 직접 참여한 유엔 정보사회세계정상회의(이하 WSIS)와 그 준비과정을 통해 소위 IT외교 부재 혹은 무능함을 노출시켰고, 이는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바 있다. 특히 인터넷주소자원 문제는 유엔회의에서 인터넷거버넌스(Internet Governance) 문제와 관련하여 국가 간의 갈등으로 나타났는데, 이미 정보통신부는 작년 국제전기통신동맹(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 이하 ITU) 회의에서 인터넷거버넌스를 현재의 ICANN이 아닌 각국 정부가 참여하는 ITU에서 다루도록 하자는 제안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바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WSIS 준비회의 과정에서 미국과 EU와는 정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는 중국 등의 주장과 사실상 동일한 입장임을 그 이전에 천명한 바 있다. 만약 이번에 이 법안이 통과된다면, 한국은 바로 중국 등과 같이 인터넷주소관리체계를 민간이 아닌 국가가 직접관리체제화하여 법률로 정착시키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몇 안 되는 국가의 하나가 된다. 이것은 실제로 인터넷의 발전역사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중대한 변화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신중히 숙고하여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성명] ‘인터넷주소자원에 관한 법’의 통과에 반대한다! 2003. 12. 17)

국제사회에서 한국정부의 무능함을 비아냥거리는 한국의 시민사회, 국제무대에서 한국 시민단체들을 진정한 협력자로서 수용하지 않는 한국정부. 정보통신부(이하 정통부)와 정보통신관련 시민단체들간의 불신을 허무는 열쇠는 정부와 시민단체의 손에 달려 있다. 이제 서로가 서로를 깎아내리는 노력보다는, ‘왜 우리는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이 국제무대에서 보여주는 정부와 시민단체들간의 성숙한 협력체제 구축에 실패하는가’ ‘어떻게 하면 이상적인 협조체제를 구축할 수 있을까’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해야겠다. 이번 WSIS 논의를 발판으로 국제인터넷주소자원관리는 보다 제도화되는 양상을 보일 것이며, UN의 안전보장이사회와 유사한 대표정부간 의사결정체제가 10년 안에 출범될 것으로 관측된다. 일본과 중국은 아시아의 대표주자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국은 정치, 경제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일본은 기업, 정부, 시민단체들간의 전략적 제휴로 포장하여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 인터넷 강국이라고 자랑하는 한국정부는 사이버공간의 국제기구 재편성 시 어디쯤 안주하게 될까?

인터넷주소자원관리 법전 후

정통부, 한국인터넷정보센터(이하 한인정), 인터넷주소위(이하 주소위) 간의 4년이라는 긴 협상 끝에 2004년 1월 29일, 인터넷주소자원관리법이 제정되었다. 그 결과 .KR은 한인정이 승계한 한국인터넷진흥원(이하 진흥원)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기구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 외에 표면상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일련의 시민단체들이 법안을 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정통부가 주소위의 의견수렴을 안 했다고 비난하는 걸까?

“우리는 이 법안이 제출되는 과정에서 법안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받게 될 한국인터넷정보센터 이사회가 정통부로부터 전혀 법안에 대한 사전협의를 받은 일도 없으며, 한국인터넷정보센터 주소위의 의견조차 정통부의 법안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고, 국회에 법안을 상정한 이후조차 정통부가 전혀 이러한 의견수렴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정부의 입법절차가 이러했을 뿐만 아니라, 민의수렴의 장이어야 할 국회조차 이러한 의견수렴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로 법을 통과시키려 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성명] ‘인터넷주소자원에 관한 법’의 통과에 반대한다!)

이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역류해보자. 1986년 이후 한국과학기술원 전길남 박사의 연구실을 중심으로 실험단계의 인터넷주소자원관리가 운영되다가,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전산원의 한 부서로 이전하게 된다. 비록 주소자원관리의 기술적 운영은 이전되었지만, 80년대 중반부터 자리잡아 온 인터넷주소자원 관련 정책결정은 엔지니어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전문가집단이 수행하게 된다. 인터넷주소자원관리를 세계추세에 맞추어 확대, 개편해야 한다는 의견이 개진된 1998년 무렵,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주소자원 정책결정의 주체였다. 정통부나 한인정의 당사자들은 새 기구가 주소자원관리기능뿐만 아니라, 정책기능까지 포괄적으로 승계해야 된다는 입장이었던 데 비해, 기존의 정책결정을 담당했던 전문가집단은 관리와 정책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주장한다. 결국 한인정 산하에서 기존의 전문가집단은 확실한 제도적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주소위라는 틀로 주소자원관리 정책기능을 수행한다는 어정쩡한 합의에 동의하게 된다.

“인터넷주소위원회(Number and Name Committee, 이하 NNC)는 인터넷정보센터와의 협력 하에 인터넷 전문가, 사용자, 서비스제공자, 정책 결정자가 함께 모여 국내 인터넷주소 관리주체로서 의사 합의 결정체의 기능을 수행해왔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참여자들의 의견 수렴을 바탕으로 인터넷주소 관련 정책 및 표준을 권고하며, 국제 교류 협력 및 국제 기구에 참여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인터넷주소위원회 향후 운영 방안, 2004. 6. 8)

주소위가 설립된 후 우선 과제는 기존 전문가 집단 외에 다양한 인터넷이용자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주소위는 시민단체들의 참여를 유도하기도 하고, 다른 부문의 사회활동을 하는 인사들을 섭외하는 노력을 보였지만, 기술적 논의가 전제되는 회의의 지속적 참여는 정보통신 관련한 일을 하는 소수로 한정되는 한계를 보인다. 한편 주소위의 안정적 운영에 관건이 되는 제도적 장치 구현은 한인정에 의해 저지당하면서, 열악한 행정적 지원 하에 위원들의 자발적 활동에만 의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주소위가 주소자원관리와 관련된 사안들에 대해 시의적절한 논의를 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정책전문가로서 위상에 위협을 받는다. 그 결과 한인정이 실질적으로 정책제안을 하는 역할을 하면서, 주소위는 지난 2년 간에 걸쳐 정책심의기구로 변화한다.

현 주소관리법안은 인터넷주소자원에 관한 정책 등을 심의하기 위해 장관 소속 하에 인터넷주소정책심의위원회(이하 주심위)를 신설키로 했다. 주심위는 위원장을 포함해 10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인터넷주소자원관리 준칙의 승인, 인터넷주소자원 관련 국제협력 등에 대한 심의를 맡게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존의 주소위와 정통부 장관소속하의 주심위에 차이가 있다면, 주소위는 원칙적으로 열린 구조를 하고 있어 일반 인터넷 이용자들의 참여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고, 후자는 임명제라 일반 이용자들의 참여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다.

한편, 갈 길이 애매해진 주소위는 그 향방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 주심위의 실무위원회에 참여할 것인지, 진흥원의 자문기구로서 기존의 위원회를 유지할 것인지, 독립 법인으로 활동할지 등 세 가지 안을 놓고 위원회에서 논의를 하고 있다. 다음은 주소위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어한 대목으로 보인다.

“인터넷주소자원은 기존의 전파와 같은 자원과 달리 상업적인 목적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연구, 교육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쓰이고 있기에, 다양하고 전문적인 의견을 수렴하여 실질적인 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 수립은 독립된 기구로서, 일정한 선임절차를 거쳐서 민주적 대표성을 가진 실질적인 민간관련 이해당사자들(인터넷주소 이용자, 인터넷주소 기술자, 관련 사업자, 관련 시민단체, 관련 국제기구 참여자 등)이 인터넷주소에 관한 정책과 기술표준, 국제협력, 이용자 의견수렴 등에 대해, 일정한 의결권을 갖는 민간정책위원회의 역할을 수행해 온 NNC의 역할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법에 근거하여 실질적인 정책 심의와 실행을 책임질 인터넷정책심의위원회와 인터넷진흥원과의 밀접한 협력을 유지하여 인터넷 사용자, 서비스제공자, 정부가 상호보완하는 관계가 정립되는 것이 필수적이다.”(인터넷주소위(NNC) 향후 운영 방안, 2004. 6. 8)

인터넷 이용자

‘인터넷 또 하나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4회에 걸쳐 인터넷주소관리 주체 논의가 각각의 정치적 어젠다에 따라 ‘관리구조가 열려있느냐 닫혀있느냐’로 귀결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통제 안에 있는 열린구조는 바람직하나, 통제 밖의 열린 구조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인터넷주소자원관리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논쟁은 통제 밖의 열린구조였던 반면, 이해당사자간 우리 사회에서 전개되었던 논의는 분명 통제 안에 있었던 열린구조 논의였다고 생각한다. .

KR의 초기주소정책 결정에 주도적 역할을 해왔던 기술전문가 집단이 한인정과의 기구간 갈등으로 주소위라는 제도화 과정에 실패함으로써, 정부주도의 .KR주소자원 관리체제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국내에서 논의가 좀 더 성숙하게 진행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물고 물리는 적이 아니라 국제무대의 열린구조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배양하거나, 열린구조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폭력에 좀 더 민감하게 대응했어야 했다.

인터넷 이용자들을 전면에 배치한 논의들을 접하면서, 인터넷 이용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권리가 엉뚱한 제3자들에 의해 매매당해 왔다는 느낌이 드는 ‘네트워커’가 더 많을지, 내가 다른 일로 겨를이 없는 사이 나의 권리를 대변하여 인터넷 이용자의 권익이 보장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한 논의의 참가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할지 궁금해진다.

*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인터넷 거버넌스’ 심층연재를 마칩니다.


박윤정

2000 2001 ICANN 도메인네임정책기구 WG-Review 의장
2000 – 2002 .KR 주소위원회 위원
2001 – 2002 다국어도메인네임 컨소시엄(MINC) 사무국장
2000 – 2002 .KR 주소위원회 위원
2003 WSIS 시민사회 인터넷 거버넌스 그룹 공동발기인 및 공동의장

2004-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