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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울 뿐인 게시판은 필요없다, 실질적인 정책 참여 보장해야{/}“열려라, 전자정부”

By 2004/07/08 10월 25th, 2016 No Comments

기획연재

장여경

네티즌 A씨의 경우를 보자. 최근 정부의 식품안전 정책에 할 말이 있어 관련기관 홈페이지를 방문했다. 종류별로 십여 개가 넘는 게시판 가운데 ‘참여마당’이라는 제목의 게시판을 골라 들어갔다. 글을 올리려고 했더니 성명과 주민번호를 비롯해 연락처와 이메일, 직업까지 상세히 적어서 내란다. 글 내용을 가지고 직장이나 집으로 연락하려는 게 아니면 이게 다 무슨 용도인가 싶어 꺼림칙했지만 설마 그러랴 싶어 열심히 적는다. 그런데 ‘등록’을 클릭한 순간, 내용에 포함된 단어 하나가 필터링(차단프로그램)에 걸렸다. 무슨 단어가 문제인지 일언반구도 없이 다시 쓰란다. 울화통이 터졌지만 정부 홈페이지이니 양해하기로 하고 다시 써서 올린다. 실명인증과 필터링을 통과해 글을 올리기까?걸린 시간은 30분 남짓. 그래도 올리고 나니 나름대로 뿌듯하다. 관련부처에서 향후 정책을 마련할 때 자신의 의견을 참고해 주면 좋겠다. 그런데 몇 시간 후 다시 들어가보니 온데간데 글이 사라졌다. ‘미풍양속’에 어긋난 글은 ‘통보하지 않고 삭제’된단다. 내 글의 어디가 미풍양속에 어긋났단 말인가. 아니, 이것저것 연락처를 물어볼 땐 언제고 소리소문도 없이 삭제한단 말인가. 삭제기준을 밝히라고 격렬히 항의했더니 그마저 삭제됐다. 허탈함을 넘어 분노가 인다. 내 글을 돌려달라고 다시 올렸다. 다시는 게시판을 찾을 생각이 없지만 글은 돌려받아야겠다. 내 의견이 정책에 반영되리라는 기대는 이미 버렸다.

게시판 의견, 보기는 하나

전자정부에 대한 기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컴퓨터라는 기술을 이용해 정부 기능을 효율화하는 데 대한 관심이 한 측면이라면, 다른 한편으로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고민도 있다. 게시판은 원칙적으로 국민의 정치 참여를 위해 제공된 공간이다. 이때의 정치 참여란, 국민이 정부의 의사결정에 직접 참가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강대학교 강정인 교수는 그의 저서 <세계화, 정보화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원격민주주의론을 비판한다. 한동안 유행처럼 언급되었던 원격민주주의론은 민주주의를 투표율의 증대와 토론의 활성화에 국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하지만 참된 민주주의는 의견을 교환하고 정책을 토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인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저절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제도적, 법적 변화가 병행돼야 하는 것이다. 이를 망각한 원격민주주의는 오히려 정치 과정에 대한 능동적인 참여를 가로막을 수도 있다. 토론만 하다 끝나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각 부처는 대부분 홈페이지에 게시판을, 그것도 여럿씩 갖고 있다. 겉보기에는 매우 참여적인 외양을 띄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게시판이 ‘참여’라는 제목을 달고 있어도 그 의견들이 정책에 반영되리라는 기약은 전혀 없다. 관리자와 네티즌 간의 공방만이 시끄러운 곳이 대부분이다.

함께하는시민행동의 조사에 따르면 이런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자정부 홈페이지(https://egov.go.kr)의 ‘정책포럼’이다. 대부분의 포럼에 10건 이하의 글들이 등록되어 ‘썰렁함’을 자랑한다. 무성의한 운영으로 정책 반영에 대한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 제도적인 보장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주제 선정도 일방적이어서 국민의 관심과 동떨어져 있다.

김명진 동국대 강사는 한국의 전자정부가 어떤 참여와도 ‘무관하다’고 꼬집는다. 한국의 전자정부는 △대민 행정서비스 △기업과의 전자조달 시스템 △정부내 정보시스템 도입(전자결제 등)에 주로 관심을 두어왔기 때문이다. 국민의정부 전자정부특별위원회에서 펴낸 <전자정부백서>에서도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고 국민의 참여 제고를 차기 전자정부 사업의 과제로 넘겼다. 앞으로 얼마나 ‘제고’될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지금과 같은 게시판 운영이 계속된다면 전자정부에서 국민의 온라인 정치 참여는 허울에 그칠 것이다.


 

게시판보다 확실한 정책 참여

다른 나라의 경우 게시판은 없지만 온라인 국민 참여를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고안되어 있다. 지난 26일 한국과학기술학회 학술대회에서 "온라인 시민참여: 한계와 가능성"이란 주제로 발표한 김명진씨는 OECD의 2001년 보고서를 인용하여 참여 유형을 (1)정보제공 (2)자문 (3)적극적 참여로 나누었다. 이 가운데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자문’의 경우 최근 세계 여러나라가 명목상의 토론 게시판을 벗어나 시민들의 숙의가 좀더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2000-2001년에 캐나다에서 개최된 ‘이종간 이식에 관한 대중자문(http://zeno.cpha.ca)’과 2003년 영국에서 진행된 ‘GM 대중논쟁(http://gmnation.org.uk)’ 사례가 그렇다.

특히 국민이 국가의 정책결정 과정과 내용 모두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실험적 시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정해진 선택지들 중에서 고르는 대신, 의제 설정이나 대안 제시 등에서 국민이 정부와 동등한 지위를 갖고 공동 결정을 하는 것이다. 이 흔치 않은 사례로 스코틀랜드 의회의 전자청원 제도를 들 수 있다(http://e-petitioner.org.uk). 국민청원 제도와 마찬가지로 일반 국민이 의회에 정책을 제안하고 이를 의회가 논의하도록 보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스코틀랜드 의회는 전자청원 시스템을 기술적으로 도입하는 동시에 산하에 ‘대중청원위원회’를 설치해 과련 업무를 전담하도록 했다. 일단 청원이 제기되면 다른 시민들이 청원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의견을 밝히고 대중청원위원회에서는 청원을 검토하여 관련 의원들에게 전달하고 의회에서 조치를 취하도록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웹사이트에 공개되어 청원자는 자신의 청원에 대한 처리 과정을 알 수 있다. 게시판보다 확실한 정책 참여라 하겠다.

 

 

2004-07-04